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화 (4/250)
  • #04.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1)

    지선은 아버지의 서재 앞에 섰다. 집안일을 봐주시는 함양댁 아주머니한테 아버지가 들어오셨다는 말을 들은 후였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그래, 이제 퇴근하는 거냐? 좀 늦었구나.”

    “네. 회사 일이 많아서요.”

    “안 그래도 널 부르려 던 참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신을 잘 찾지 않는 아버지였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지선은 바짝 긴장했다. 아버지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에 따라 경우와의 거래를 깨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석제 알지? 장 회장 둘째 말이다. 널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하더구나. 오늘 장 회장 쪽에서 직접 연락이 왔어.”

    장 회장의 둘째 장석제라면 지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막내한테 그룹 후계 자리를 빼앗긴 경음 그룹의 멍청이였으니까.

    경음 그룹도 여러 자식이 있었지만 결국 후계자는 막내가 차지했다. 똑같은 조건에게 무한 경쟁을 하게 한 결과였다.

    다른 재벌들은 자식들 간 후계 경쟁이 치열해지면 그룹이 쪼개질 걱정 때문에 첫째에게 밀어주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룹이 쪼개지는 걱정보다 실력 있는 자가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장 회장은 자식들에게 무한 경쟁을 하도록 했고, 그 결과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막내가 자리를 차지했다.

    지선은 그런 환경에서도 동생에게 밀린 석제를 멍청이 취급했다. 자신이라면, 자신도 오빠나 동생과 경쟁할 수 있다면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라 자신했으니까.

    “너도 이제 혼기가 지났으니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 이런 이야기는 안사람들이 해야 하는 건데, 크흠.”

    집안일엔 전혀 관심이 없는 정숙이 집에 붙어 있을 리가 없었다. 민 회장은 아내가 왜 그렇게 밖으로만 나도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집안일에 무심한 아내를 더 못마땅해했다.

    “싫어요. 그냥 거절하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거절만 할 셈이야. 네 나이 적지 않아. 적당한 자리 골라 이제 시집가야지.”

    할아버지라면 지난 세대의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그룹을 이끌어 가고 누구보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 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실은 할아버지와 별다른 차이가 없단 사실에 지선은 실망했다.

    “차라리 그 집 막내를 만나 보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걔는…….”

    “저보다 어려서요? 여자가 나이 많은 게 무슨 대순가요?”

    “…….”

    “솔직히 저 위해서 결혼하라고 하신 거 아니잖아요. 후계에서 물러난 둘째가 식품하고 유통을 맡고 있으니까 그게 탐이 나서 그게 새명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러시는 거잖아요.”

    “꼭 그런 것만은 아냐.”

    “단 한순간만이라도 저를 먼저 생각해 주실 순 없으세요?”

    “난 늘 널 먼저 생각했다.”

    거짓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는 여자와 살겠다고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니 지선은 믿을 수 없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킨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은 다스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경우 얘기예요.”

    맞선도 제쳐 두고 뜬금없이 경우라니. 민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경우는 왜?”

    “아버지 또 경우 정신 병원에 넣으실 생각이세요?”

    “……그건 네가 관여할 바 아니다.”

    “아버지, 제 동생 일이에요. 어떻게 상관을 안 해요?”

    사실 민 회장도 알고 있었다. 지선의 야심이 두 아들들 못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누구보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 지선의 입에서 경우가 튀어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더군다나 동생 일이라니. 지선이 경우를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단단한 얼굴이 제 엄마보다 확실히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민 회장은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그녀가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 건지 예상할 수 없었다.

    “경우 고등학교 때 생각나세요? 그때 수현이라는 아이였죠?”

    수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민 회장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경우는 제법 말썽을 부리고 다녔다. 처음엔 사내 녀석이 그럴 수도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새명 그룹의 막내아들이라는 신분에, 누구도 제재하지 못한 탓에 브레이크가 망가진 차처럼 경우는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같은 반에 있는 학우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다 끝내 그 학생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 학생이 축구 선수 유망주였던 것이다. 유럽으로 유학이 결정되어 있던 터라 상황은 심각했다. 치료를 위해 최고의 의료진을 붙여 줬지만 결국 수현이는 축구 선수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앞길 창창한 남의 자식의 앞길을 막아 버린 탓에 민 회장은 결국 경우를 정신 병원에 가두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더 악화가 되어 결국 자해까지 시도하고 말았다.

    “갑자기 옛날 일은 왜 꺼내는 거냐?”

    “경우, 정신 병원에 보내지 마세요.”

    “그럼? 그놈 때문에 사람이 죽을 뻔했어. 다리 하나가 아니야. 지금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고나 있는 거냐? 동생 걱정이 그렇게 지극하다면 모른 척해.”

    “그런 아버지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대적하진 않았을 터. 하지만 한번 봇물이 터지지 지선도 스스로를 막을 수 없었다. 후회를 한다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결국 아버지가 그런 식이니까 경우가 저렇게 엇나간 거라고 생각 않으세요?”

    “난 할 만큼 했다. 다 큰 자식한테 도대체 뭘 더 해?”

    “저희를 자식으로 생각하긴 하셨어요?”

    “뭐?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버지한텐 오직 정현 오빠밖에 없잖아요. 정현 오빠 생각하는 것의 10분의 1만큼 경우를 걱정하셨더라면 경우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와 내 원망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경우한테 기회를 한번 달라는 거예요.”

    “난 이미 기회를 줬다. 그 기회를 날려 버린 건 그놈이고.”

    “그럼 저한테 주세요. 그 기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경우를 돌볼게요. 어차피 정신 병원 말고 달리 생각하고 계신 것도 없으시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요.”

    “그동안 관심도 없던 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래도 제 동생이니까요.”

    단호하게 자신을 보는 지선의 모습에 흔들리긴 했지만 민 회장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안 돼.”

    “장 회장님 둘째 만나 볼게요.”

    “뭐?”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맞선 보겠다구요. 물론 결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한번 만나 볼 테니까 경우 저한테 맡겨 주세요.”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선 자리를 모두 마다하던 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싫다고 하던 딸이 말이 바꾸자 민 회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지선이 이렇게 무언가를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걸 둘째 치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게 뭐가 되었든 알아야 했다. 무조건 반대한다고 물러날 딸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동안 거절한 선도 보겠다고 하니 일단은 장단을 맞춰 주는 게 적어도 손해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기회를 한번 주마.”

    “감사합니다.”

    “장 회장한테도 연락해 놓을 테니 약속은 지켜.”

    “걱정 마세요.”

    겨우 얻은 기회였다. 조금 걸리긴 했지만 작은 걸 주고 큰 걸 얻는 게 나을 테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지선이 곧바로 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아버지 해결했어.”

    [우와, 역시 우리 누나 능력자.]

    “시끄럽고 내일 퇴원하지?”

    [퇴원하자마자 누나 사무실로 갈 테니까 걱정 마. 약속은 지키니까.]

    전화를 끊은 지선은 침대에 뻗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약한 마음으론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면 내 중심이 되게 만들면 돼.”

    * * *

    경우는 퇴원 후 곧장 찾아간 지선의 사무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이쪽은 내 대학 동기, 김기영. 이쪽은 아시다시피 사고뭉치 내 동생, 민경우.”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인사는 그쯤 하고 일 이야기 시작해 보자구.”

    이제부턴 세 사람만 아는 계약서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명목은 경우가 가진 새명물산의 지분을 담보로 지선에게 돈을 빌리는 것. 경우가 돈을 갚지 못하면 자연히 경우의 지분은 지선에게로 넘어갈 것이고,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을 테니 아버지의 눈을 피할 수도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거기다 돈이 필요한 경우에겐 쓸데도 없는 지분을 대신해 돈을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경우나 지선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었다.

    “근데 누나. 돈은 있어? 회사 돈 횡령해서 주는 거 아냐?”

    “누나 그렇게 허술한 사람 아니다.”

    째려보는 지선의 시선이 매서웠다.

    동생한테도 저러는데 친구가 있다는 게 의외였다. 회사 법무팀 변호사는 아닐 줄 알았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어쩌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는 건데 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건 그만큼 이 친구한테는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것 같아 경우는 신기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나라고 친구 하나 없을 줄 알아?”

    “누가 그렇대?”

    “지선이 학교 다닐 땐 제법 인기가 많았습니다. 재벌 딸인 거 밝혀지곤 다들 놀랐어요. 누구도 예상을 못 했거든요.”

    “우리 누나 학교 다닐 때 어땠어요?”

    “또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너 안 바쁘니? 할 일 다 했으면 그만 가지?”

    “알았어. 간다 가. 하여간 까칠하긴.”

    일어나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게 지선의 잔소리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나중에 전화해. 술이나 한잔하자. 애들 못 본 지 꽤 됐잖아.”

    “알았어. 연락할게.”

    꾸벅 인사를 한 김기영 변호사가 사무실을 나가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경우가 지선을 바라봤다.

    “저 형님이랑은 어떤 사이야?”

    “형님? 언제 봤다고 형님이야? 딴 소리 하지 말고 이제 어쩔 셈이야?”

    “뭐가 그렇게 급해?”

    “급하지. 너 하나로 인해서 내 인생까지 위태로워졌는데.”

    “위태로워지긴, 스펙터클해진 거겠지. 어차피 언제고 발톱 세울 거였잖아. 그 시기가 조금 빨라졌다고 생각해.”

    지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뭔데?”

    “아직은 비밀.”

    “너 뭐 사업한다고 설치고 다니는 건 아니지?”

    “내가 그럴 재주나 있고?”

    “그나마 주제 파악은 잘하니 다행이다.”

    “누나가 뭘 걱정하는지 아는데 이거 하나는 약속할 수 있어. 누나한테 해 되는 짓은 안 해.”

    “…….”

    “누난, 우리 가족들 중에서 유일한 내 편이니까.”

    “좋아. 우선은 너한테 시간을 줄게. 대신 뭘 할 건지 제대로 보고해. 그렇지 않으면 바로 족쇄 채운다.”

    “아, 누나!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애가 아니니까 이러는 거잖아. 잘못되면 너 하나로 끝나지 않아. 그러니까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경우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주머니도 두둑해졌겠다, 경우는 무서울 게 없었다.

    “이야기는 잘 끝냈어? 그나저나 진짜 의외야.”

    “뭐가?”

    “아니, 지선 누님이 너랑 할 이야기가 있기는 하시대?”

    “뭐래? 나 우리 누나 동생이거든.”

    “남보다도 못한 동생?”

    “이게 진짜!”

    움찔움찔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강철이 경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놈이랑 그렇게 붙어 다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근데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무슨 일인데?”

    “어허, 너무 많은 걸 알려 하지 마. 다쳐.”

    “뭐?”

    “됐고, 배고픈 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그나저나 오늘은 뭐 먹냐?”

    “내가 맛집 하나 알거든. 거기로 가자. 60년 전통 해장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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