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화 (3/250)
  • #03.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3)

    일탈을 일삼던 모 재벌가의 막내아들이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다는 기사는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문을 완전히 덮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새명 그룹이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는 것은 막아야했다.

    답답함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민홍준은 비서실장을 불러들였다.

    “네, 회장님.”

    “지난번 내가 말한 거, 마땅한 곳 찾아봐.”

    그의 말에 비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러다 이사장님 아시면…….”

    “일단 집사람 모르게 해. 보안 철저한 곳, 예전 그런 곳 말고 제대로 하는 곳으로 알아봐. 저놈 저대로 놔뒀다간 다음번엔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몰라. 그 전에 사람 만들어야겠어. 아니, 사람 구실이라도 하게 만들어야 해.”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회장실 밖으로 나가자 민홍준은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처음 아들이 엇나갔을 때 뭐든 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자를 위하는 아버지를 핑계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 아랫사람을 시켜 가장 쉬운 방법인 돈으로 해결했다.

    어떻게 보면 방관이었고 무관심이었다.

    자신이 방치한 덕에 아들이 더 엇나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민홍준은 이제라도 아들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비틀어진 뿔을 바로잡으려다 결국 소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 *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새명 그룹의 회장 민홍준에게는 첫째 아들이 아픈 손가락이었다.

    젊은 시절 그에겐 자신이 가진 걸 모두 다 버릴 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택했지만 그녀는 결국 아들 하나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남겨진 아들이 장남인 민정현이었다.

    민홍준은 아버지의 설득에 마지못해 유진 그룹의 고명딸 윤정숙과 결혼한다. 딸린 자식이 있었지만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 여자관계가 복잡한 다른 재벌집 자제들과 달리 순정을 바칠 줄 알았던 민홍준이 윤정숙의 마음에 든 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게 어떤 형태로든 평생 가슴에 남기 마련. 거기다 죽은 사람의 자식까지 눈앞에 있으니 윤정숙은 세 식구 사이에 자신이 낀 것 같았다. 부부는 자주 다퉜고 급기야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법적인 관계로만 남았다.

    ‘그렇지. 거봐, 저년이 딸 흉내 낼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아이고, 이 사람아! 그년은 딸이 아냐! 그 옆에 쟤가 친딸이라고.’

    은석은 문득 연속극을 보며 답답해하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저놈의 연속극, 지난번에 끝난 그거하고 사람만 바뀌었지 내용은 완전히 그대로야. 부잣집에서 자식들은 왜 그렇게들 잃어버리는 거야? 근데 잃어버린 자식을 코앞에 두고도 찾지를 못해.’

    ‘그걸 출생의 비밀이라고 한다던데요. 그게 없으면 이야기가 맛이 안 산대요.’

    ‘우리 은석이 그것도 알아?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할까?’

    ‘할머니 닮아서 똑똑하죠. 근데 할머니, 재미없으면 보지 마요.’

    ‘뭐…… 재미가 아예 없지는 않아. 보면서 욕이라도 해야지 시원하지. 하여간 나쁜 년들 같으니라고.’

    사고로 아내가 죽고 딸을 잃어버린 재벌 후계자. 그의 앞에 매혹적인 여인이 나타나 달래 준다. 결국 그녀와 결혼하고 딸을 찾는데 마침내 찾은 딸은 친딸이 아닌 새 아내의 숨겨진 자식. 코앞에 딸이 온갖 구박을 받지만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짜는 친딸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회사를 차지하려는데. 은석은 앞으로의 전개가 뻔히 예상되는 드라마를 보며 욕하던 할머니를 떠올렸다.

    출생의 비밀, 기억 상실, 불치병.

    할머니가 주로 보던 연속극에 빠지지 않는 소재였다.

    은석은 드라마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드라마는 하나의 거대한 갈등을 그리는 이야기라 그 갈등이 크면 클수록 재미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갈등이 주로 사람의 생명과 관련이 되었을 때 치명적이라는 것도.

    그러니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 기억 상실이 클리셰로 등장하는 게 그런 이유였다.

    사실 이 집안의 문제는,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처 자식과 뒷배경이 좋은 후처 자식 간의 후계 다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작가의 시선으로 봤을 때 한마디로 갈등 최고조였다. 당연히 모든 시선은 그쪽으로 쏠렸으니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 있는 막내아들에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어서, 관심을 받고 싶어서 저질렀던 잘못들도 돈으로 해결할 뿐, 누구 하나 그를 꾸중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의 민경우를 만든 건 모두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러니 애가 이 모양 이 꼴이지. 아무도 관심 안 가져 주니 더 엇나가는 거잖아.”

    민경우의 과거지사를 떠올린 은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결국 보육원에서 자란 자신과 민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돈만 많으면 뭐 해. 가슴에 뚫린 구멍은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는걸.’

    어쨌든 이제는 남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 되어 버렸다. 생각을 정리한 은석은 민경우가 되어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들 다 있는 부모는 물론, 가진 건 쥐뿔도 없다고 무시당하며 살아왔다. 물론 언제 정신 병원에 처박힐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이 건만 잘 해결하면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몬드수저다.

    ‘그래, 이제부터 난 이은석이 아니라 민경우야. 이제야 민경우가 되었는데 젊은 나이에 정신 병원에 처박힐 순 없어.’

    생각을 정리한 은석 아니, 경우가 강철을 불렀다.

    “야, 강철아.”

    “왜?”

    “회사 가서 누나 좀 데리고 와.”

    “야, 내가 무슨 수로! 솔직히 회장님보다 너희 누나가 더 무서워.”

    “잘 생각해. 넌 내 개인 비서야. 내가 없으면 회사에서 네 책상 아예 빼 버릴지도 몰라.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니야. 다 너를 위한 거지.”

    “그래, 좋아. 좋다고. 근데 누님이 네가 오라고 했다고 오시겠냐?”

    “머리를 다쳐서 누나를 보고 싶어한다고 해. 그나마 나한테 덜 매정한 사람이 누나니까 분명 올 거야.”

    “그냥 네가 전화를 해서 와 달라고-.”

    “나보다 네가 말해야 더 절절하지. 그러니까 가서 말해.”

    “내가 진짜 제명에 못 산다, 못 살아!”

    투덜거리며 강철은 어쩔 수 없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약간의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누나라면 반드시 올 거라고 경우는 생각했다.

    사실 민경우도 그렇지만 그의 누나인 민지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아닌 딸이라서, 가업을 이을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선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차별을 받아 왔다. 다름 아닌 할아버지로부터.

    사실 민경우의 할아버지는 처음엔 민정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생모에 대한 미움과 며느리 윤정숙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민지선이 태어났고 딸이라는 아쉬움 속에 민정현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그러다 민준호가 태어나자 할아버지의 관심은 모두 민준호에게 향했다. 그러니 민지선이 장녀이긴 했지만 찬밥 신세가 되는 건 당연지사.

    어차피 남의 집으로 시집갈 출가외인이라며 대놓고 제외시켜 버렸다. 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발표된 유언장엔 민지선의 이름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지주 회사로 되어 있는 새명물산, 할아버지가 소유한 새명물산의 주식은 할아버지의 편애를 가장 많이 받은 민준호가 큰 비율을 차지했고 심지어 민경우조차 받았지만 민지선은 받지도 못했다.

    누구보다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있고 후계자로서의 야심도 있는 민지선이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늘 항상 뒷전이었다. 그렇기에 민지선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 다 쓰러져 가던 새명패션과 새명유통을 탄탄하게 만들어 놓은 것도 그 노력의 결과였다.

    경우는 그런 누나의 마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니, 힘든 처지에 서로 돕자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경우의 예상대로 지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우의 병실을 찾아왔다. 하지만 생각보다 멀쩡한 경우의 모습에 못마땅한 듯 팔짱을 낀 지선이 소파에 앉았다.

    “보아하니 꾀병인 것 같은데 왜 사람을 오라 가라야?”

    “동생이 다쳤다는데 정 없게.”

    “나 지금 일하다 말고 왔어.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거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오호, 알고 있었어?”

    “……할 말 없으면 나 그냥 간다.”

    지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경우가 다급히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 내가 왜?”

    “그래야 누나한테 좋은 일이 생길 거니까.”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나 들어 보자. 뭔데? 내가 무슨 부탁을 들어줬으면 하는데?”

    “누나…… 내가 여기 왜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지?”

    “술 처먹고 사람 친 거? 어디 가서 내 동생이라 하지 마. 쪽팔리니까.”

    차갑게 식은 지선의 눈빛에 경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이런 취급을 받으려니 서럽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살아남아야 이기는 거니까.

    “아버지가 아무래도 날 정신 병원에 보내 버릴 것 같아. 그러니까 누나가 아버지를 설득해 줘.”

    “뭐? 야, 그러다 나까지 아버지 눈 밖에 나. 얘가 완전히 돌았구나.”

    어이가 없는지 지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탁만 들어주면 새명물산의 내 지분 절반을 줄게.”

    경우의 말에 지선이 우뚝 섰다.

    “누나가 새명물산 주식, 차명으로 모으고 있는 거 알아. 그러니까 내가 주겠다고. 혹시 알아? 나머지 절반도 누나한테 넘길지.”

    “너, 너…….”

    “나는 새명의 후계자로 누구보다 누나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솔직히 형들은 관심 밖이야. 능력도 안 되는 놈들이 금수저 물었다고 후계자가 되는 건 새명의 얼굴에 먹칠하는 거라고 생각해. 적어도 자리에 맞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새명을 이어 가야지. 안 그래?”

    “너 뭐야? 나한테 뭘 원하는 건데?”

    “말했잖아. 정신 병원만 가지 않으면 된다고. 누나도 알잖아. 예전에 나 말이야……. 이번에 들어가면 나 정말 죽을지도 몰라.”

    “엄살 그만 떨어. 정신 병원 간다고 다 죽지는 않아.”

    “그렇지. 근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누나가 더 잘 알잖아.”

    “…….”

    옛일이 떠오른 듯 경우의 말을 듣던 지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천방지축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안타까운 막내였다.

    “만약에 말이야, 내가 잘못된다 쳐. 그래도 내 지분, 누나한테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마 아버지는 큰형 주려고 할 테고 엄마는 큰형이 후계자 되는 거 바라지 않으니까 작은형 밀어주겠지. 지금 집안에 누나 편은 없어. 그러니까 내 손 잡아. 누나가 날 도와주면 나도 누날 도와줄게.”

    돈이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경우가 내미는 손은 달콤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것보다 자신이 은밀히 행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망나니 막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럼에도 선뜻 경우의 손을 잡을 수 없는 건 평소 경우의 행실 탓이 컸다. 이번은 어찌저찌 넘어간다고 해도 만약 이런 일이 또 반복된다면 아버지의 화살이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임을 지선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경우가 말을 이었다.

    “누나, 누나가 뭘 걱정하는 지 알아. 근데 이제 그럴 일 없어. 나 정말 정신 차렸어. 앞으로 술먹고 운전하는 일도 없을 테고 사고 치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도와줘. 부탁이야.”

    “나도 믿고 싶다. 근데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약속을 내 팽개치는 너 같은 놈을 내가 어떻게 믿냐고?”

    “누나, 나 말이야……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지금까지는 꿈도 목표도 없이 그냥 아버지 눈에 엄마 눈에 들고 관심 받고 싶어서 그랬는데 이젠 아냐. 나도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도와줘, 부탁이야.”

    어쩌면 그녀가 원했던 지분을 주겠다는 경우의 말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동생의 간절한 눈빛에 지선의 마음이 더욱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아버지 아시면? 가만히 안 계실 것 같은데?”

    “모르시게 해야지. 우리 두 사람만 아는 걸로.”

    완전히 넘어왔다고 생각한 경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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