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화 (2/250)
  • #02.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2)

    자신이 살고 있는 반지하 원룸보다 몇 배는 넓어 보이는 깔끔한 병실. 한쪽엔 손님들도 편히 쉴 수 있는 응접 세트까지 갖춰진 1인실 침대 위에 앉은 은석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리둥절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아버지라니.

    그 말 탓이었는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 성큼성큼 은석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은석의 뺨을 후려쳤다. 은석은 눈앞에 불꽃이 번쩍이는 걸 보았다. 은석은 자신도 모르게 맞은 뺨을 어루만졌다. 그새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프냐?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아파? 너 때문에 다친 사람은 지금 사경을 헤매는데 겨우 이 정도로 아파? 언제까지 개망나니처럼 살 거냐? 응? 내가 이 나이 들어서 다 큰 자식 뒤치다꺼리 해야겠어?”

    남자의 기세에 은석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사람 구실 할 거야! 그래, 이게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너의 답이냐?”

    ‘뭘 물으셨는데요? 저한테도 도대체 왜 이러세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절대 나서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괜히 뭐라고 했다간 긁어 부스럼 만들기 딱 좋았다. 일단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잠자코 있어야 했다.

    “새명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넌 내 경고를 무시했어. 그렇다는 건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거겠지?”

    남자가 은석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은석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호적에서 아예 널 파 버리고 싶지만 네 엄마 얼굴을 봐서 이쯤에서 참는 거다. 그러니 잔말 말고 병원으로 가. 제정신 차릴 때까진 절대 못 나올 테니 그렇게 알고!”

    그렇게 말한 남자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은석은 부어오른 뺨을 문지르며 몸을 떨었다.

    병원이라니…….

    이미 병원에 있는데 왜 병원으로 보낸다는 건지 의아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보다 몸은 괜찮은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차에 부딪혀 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때 느껴졌던 통증은 하나도 없었다.

    “몇 시나 된 거야? 여긴 또 어느 병원인데?”

    연락이 올 곳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방송국 관계자가 자신을 찾지는 않았을까, 지난 밤 생각이 바뀌어 모든 책임을 고명희에게 돌린 건 아닌가 생각한 은석은 휴대폰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저나 이런 병실은 하루에 얼마야?”

    괜히 덤터기를 쓰는 건 아닌지,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입원을 시킨 거니까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옷가지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쪽에 있는 옷장에 있겠지 싶었던 은석은 옷장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보이는 거라곤 엄청 비싸 보이는 고급스러운 옷이 전부.

    “뭐야? 내 옷은 어디 있는 거야?”

    브랜드는 하나도 모르는 은석이었지만 그곳에 걸려 있는 옷은 딱 봐도 고가. 호기심에 옷을 살짝 들춰 보았지만 괜히 남의 옷에 관심 갖는 변태 같아서 그만두었다.

    다행히 옷장 안쪽엔 거울이 있었기에 일단 그는 자신의 얼굴부터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태가 날 정도로 맞은 쪽 뺨이 부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아프진 않았다. 그냥 한 대 맞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 거 외에는.

    많이 맞아 봐서 그런 걸까?

    응?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마치 많이 맞아 봤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바로 그 순간, 닫혀 있던 수문이 열리고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그동안의 기억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게 다 무슨 일인데?”

    * * *

    은석은 병실 안을 서성였다. 자신에게 벌어진 이 이상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이은석이라는 이름에 부모도 없는 흙수저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새명 그룹의 막내아들 민경우가 되어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민경우의 기억까지 모조리 그의 머릿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얼굴도 몸도 이은석의 것 그대로였는데 그를 둘러싼 상황이 모조리 바뀌어 버렸다. 거기다 달력을 확인해 보니 지금은 은석이 사고를 당했던 그날로부터 10년 전인 2008년 4월.

    “평행 세계라도 있는 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조바심 내고 있던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일어났냐? 회장님 다녀가셨지? 야, 말도 마.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었어.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냄새 맡고-.”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남자를 본 은석은 그가 당황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강철이?”

    “그렇게 부르는 거 보니까 제정신 돌아왔네.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처마셔?”

    “지, 진짜 강철이?”

    “너 얼굴이…… 설마 회장님한테 맞았냐? 하긴, 맞고도 남지. 그러게 내가 뭐랬어. 차라리 술을 마실 거면 나 부르라니까. 평소엔 귀찮다면서 운전도 잘 안 하던 놈이 왜 술만 마시면 운전대를 잡아, 잡길! 하여간 너 땜에 내가 제명에 못 산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말하는 강철을 보자 은석은 더욱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얼굴을 보니 강철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이름을 부른 것이었는데 상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 남자는 전략기획부 소속의 민경우 비서였다. 민경우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자신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할 개인 비서로 민경우가 직접 꽂아 둔 거였다. 죽이 잘 맞아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지랄 맞은 민경우의 성격을 잘 받아줬다.

    왜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런 기억들이 떠오르는 건지 은석은 알 수 없었다.

    “저기…… 내가 미친 건가? 고명희 때문에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진짜 너는 하늘에 감사해야 해. 좀 전에 그 사람 깨어났어. 깨어났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넌 진짜 정신 병원행이야. 그러게 왜 술은 먹고 운전을 해서 사람을 치어, 치길!”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뭐냐? 너 생각 안 나? 술 먹고 운전해서 사람까지 쳤잖아……. 미친 새끼. 하여간 저만 천하태평이지.”

    사람을 치어?

    강철의 말에 자신을 치고 달아나던 차 한 대가 떠올랐다. 그때 분명 차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내리고는 쓰러진 은석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 X발. 재수 없게.’

    남자는 쓰러진 은석을 그대로 내팽개친 채 차에 올라탔다. 차는 꼭 그의 걸음처럼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가로수를 쾅 박아 버리고 말았다. 은석이 쌤통이라고 생각할 무렵 주변의 모든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라 여겼는데, 만약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라면?

    설마 그때 그 남자가 민경우였던 건가? 그 사고로 내가 민경우가 된 건가? 근데 왜 과거로 온 거지?

    그보다 지금 깨어났다는 사람은 그럼 나인 건가?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영혼이라도 바뀐 건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은석은 차에 치어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 얼핏 들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은석아. 걱정 마라. 이젠 네 삶이 달라질 테니까.’

    그렇다고 갑자기 인생이 드라마처럼 급박하게 전개되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이 다쳤다고 하니 은석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야, 내가 그…… 다치게 했다는 사람, 깨어났다고 했지? 지금 어디 있어?”

    “아직 중환자실. 왜?”

    “면회 가능할까?”

    “왜?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나머진 실장님이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 넌 가만히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야, 나 때문에 사람이 다쳤다는데 어떻게 그냥 가만히 있냐?”

    은석의 말에 놀란 강철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서, 설마 너 지금 그 사람 걱정하는 거야?”

    도대체 이놈은 어떻게 된 놈이길래 친구란 놈한테 이런 반응을 얻는 걸까?

    사람이 다쳤으면 걱정하는 건 당연한 노릇이거늘. 은석은 한숨을 내쉬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냥…… 괜찮은지만 볼게. 아무짓도 안 하고 조용히 보기만 할 거니까, 좀 도와줘.”

    얼떨떨한 얼굴이 된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어. 정신이 들어서 아마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옮긴다고 했던 거 같으니까 내가 지금 가서 알아보고 올게.”

    그리고 얼마 후, 강철을 따라 은석은 회복실로 향했다. 긴장이 되는지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강철의 옷깃을 살짝 잡자 강철은 오히려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것도 모른 채 은석은 마침내 회복실 앞에 도착했다.

    깨어났다는 그 사람은 다시 약을 투여한 탓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미리 양해를 구해 놓은 덕인지 은석은 강철을 내버려 둔 채 회복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천천히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간 은석은 잠들어 있는 이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헙!

    * * *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인지 비틀거리던 은석은 강철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자신의 병실로 돌아왔다. 회복실에 잠들어 있던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였다. 이름도 이은석이 아닌 전혀 다른 이름.

    할머니가 즐겨 보던 막장 드라마의 롤러코스터급 전개가 펼쳐지자 은석은 당황하고 말았다. 진짜 할머니가 자신을 측은하게 여겨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어서.

    “저 사람 다 나을 때까지 우리 쪽에서 돌봐 주는 거지?”

    “너도 걱정이 되기는 하는 거냐?”

    “…….”

    “하긴, 너도 사람인데. 걱정 마. 다른 건 몰라도 치료하고 보상은 최상으로 할 테니까.”

    일단 그렇다면 안심이었다.

    그럼 이은석은, 바뀌어 버린 자신은 어디로 간 걸까?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민경우의 기억이 모두 돌아온 지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그의 앞에 닥쳐 있었으니.

    ‘도대체 언제쯤이면 사람 구실 할 테냐! 그래, 이게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너의 답이냐?’

    조금 전 은석이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라고 불렀던 새명 그룹의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이 생각났다는 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사정하는 건데…….”

    엄격해 보이지만 그래도 자식을 둔 아버지였으니 사정사정했으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면서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떠오르기 전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자신의 모습에 은석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야, 너 왜 그래? 불안하게.”

    “강철아…….”

    “왜 그렇게 불러. 왜? 무슨 일인데?”

    “나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학창 시절부터 사고만 치고 다니는 막내아들이었다. 어렸을 땐 철이 없어서 그랬다고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 몫을 해야 할 나이에도 생각이 없는 막내를 두고 민 회장은 말했다.

    ‘회사에 자리 하나 마련할 테니 네 형들처럼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더는 봐주지 않아. 만약 이번에도 날 실망시킨다면 지켜만 보지 않을 게다. 그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테고.’

    특단의 조치. 학창 시절 민경우는 일진 노릇을 하며 큰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그때 민 회장은 그를 정신 병원에 가둬 버렸다.

    차라리 관리가 엄한 기숙 학교라면 모를까, 정신 병원은 민경우에게 있어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곳이기도 했다.

    불안해하는 은석의 표정을 본 강철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 설마…… 진짜 정신 병원 가는 거냐? 아이 씨, 그럼 난? 나 짤리는 거야?”

    “야! 넌 지금 상황에 너 짤리고 말고 그게 중요하냐?”

    순간 은석은 욱하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남한테 윽박지르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어쩌면 민경우의 기억이 모두 넘어온 상태에서 그의 성격까지도 넘어온 것이었을까? 쫄아 있는 강철의 모습에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과거 민경우가 그를 괴롭혔던 것까지 떠오르면서.

    ‘나쁜 놈의 자식. 보아하니 친구도 쟤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해피엔딩을 맞기 위해선 이 위기를 잘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민경우의 머리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는지 그가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민경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해결하려고 생각해 두었던 방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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