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화 (1/250)
  •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

    #01.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1)

    차에 몸이 부딪쳐 붕 떠오른 순간 은석은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은석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혼자 살기엔 젊은 나이가 아깝다며 할머니 손에 떠밀려 재가를 했다.

    물론 아주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을 멀리 떠나 버린 어머니가 그립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밖에 모르는 할머니가 계셔서 견딜 만했다.

    다만 그것도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이었다.

    강골이셨던 할머니가 은석의 곁을 떠난 건 어머니를 그렇게 재가 보내고 3년 후. 은석의 나이 겨우 열두살 때였다. 담낭암이었다.

    아직 어린 은석이를 지켜 줄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어떻게든 병을 떨쳐내고 일어나려 했지만 고령의 나이는 큰병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가지고 있던 집 한 채마저도 병원비로 다 쓰고서야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홀로 남겨진 은석이를 맡겠다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재가를 한 어머니까지도.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신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은석은 어쩌면 어머니가 할머니 손에 떠밀려 재가를 한 게 아니라 자신을 내팽개치고 자기 살길을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 뒤로 은석은 다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보육원밖에 없었다. 은석은 18살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올 때까지 보육원에서 지냈다.

    물론 세상의 쓴맛, 짠맛, 매운맛을 그곳에서 미리 맛봤다.

    덩치 큰 형들한테 얻어 맞기 일쑤였고 맞는 게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나쁜 짓도 했다. 학교에선 보육원 출신이라고 어느 누구하나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고 마치 그가 없는 사람인 양 그렇게 굴었다.

    이미 어릴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은석은 사실 그런 게 별로 큰 감흥이 없었다.

    니들이 나를 싫어하면 나도 똑같이 싫어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만으로 18살이 되어 얼마 되지도 않는 지원금을 받아 보육원을 나왔을 때 은석은 비로소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반지하 방, 다달이 내야 하는 월세 탓에 아침부터 밤 늦도록 아르바이트에 매달려야 했지만 홀가분했다. 이제 먹고살 걱정만 하면 됐으니. 그런 그에게 꿈이 생긴 건 해장국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였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자고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먹는 거라고.

    그리고 그 역시 굶주려 봤기에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열심히 벌어 월셋집에서 전셋집으로 이사도 가고 손바닥만 한 식당이라도 하나 차리고 싶었다. 그렇게 남들 사는 만큼만 살자 생각하며 찾아간 곳이 해장국집이었다. 비록 육수실은 꼭꼭 잠가 둔 탓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우다 보면 언젠간 자기 식당을 차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믿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 해장국집을 찾은 사람들은 세상사에 치인 그들의 속을 달래 줄 해장국보다는 식당 한쪽에 걸린 TV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밤새도록 좁은 육수실에 틀어박힌 사장님이 불 조절을 해 가며 정성스레 끓인 해장국을 앞에 두고 어쩌면 저렇게 TV만 보는 건지 사장보다는 은석이 더 불만이었다.

    도대체 제게 뭐라고, 흔해 빠진 드라마가 뭐가 좋다고.

    하지만 그렇게 투덜대던 그조차 힐끔힐끔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어느새 꼭꼭 잠긴 육수실의 비밀보다도 아침 드라마의 다음 화를 더욱 궁금해할 무렵, 은석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보던 연속극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보던 연속극을 옆에서 따라보던 그 시간이 실은 그의 인생에서 행복했던 몇 안 되는 순간임을 깨달은 은석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처음으로 꿈을 가지게 되었다.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돈을 더 아껴 이전엔 꿈조차 꿔 본 적 없던 대학에도 들어갔다. 대본을 손에 넣고 밤새도록 대본이 닳게 읽고 따라 쓰며 은석은 난생처음 자신이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름 만족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심혈을 기울여 쓴 드라마 대본을 생애 처음으로 공모전에 낸 은석은 당선이 되면 어떡하나 행복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작은 누구나 그렇듯 낙방.

    쓰린 마음을 달리며 다음엔 반드시 당선될 거라 같잖은 자기 위로를 하고 있을 무렵 은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화를 받게 되었다.

    [여기 고명희 작가님 작업실인데요.]

    고, 고명희?

    인기 드라마의 작가이자 <내일 프로덕션> 소속으로 이번 공모전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바로 그 고명희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공모전 발표가 난 다음 날이었다.

    전날 마신 소주의 기운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그때, 고명희라는 이름 석 자는 마치 냉수 한 바가지를 끼얹은 듯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른 게 아니라 작가님께서 이번 공모전에 제출한 이은석 씨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시는데 어떻습니까?]

    어떻거나 말거나 그녀의 드라마에 웃고 울었던 은석은 그저 팬심으로라도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달려갔다.

    작업실로 쓰고 있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주상 복합 아파트에서 처음 만난 고명희는 생각과는 다른 이미지였다. 성공하면 이런 으리으리한 곳을 작업실로 쓸 수도 있는 거구나 싶은 은석은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조금은 기죽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고명희가 꺼낸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사실 이번 공모전에서 전 이은석 작가의 작품을 강력히 추천했어요.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심사위원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요.”

    작가, 작가라니…….

    아직 꼬리표도 떼지 못한 지망생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기성 작가가 불러 준 작가라는 칭호는 꼭 작가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엔 다른 의미가 있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지만.

    “솔직히 나는 이은석 작가의 작품이 이번 공모전의 취지에 조금 더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작사 입장에서 이번 공모전,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거 외에도 제작 가능한 드라마를 찾는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은석 작가의 작품은 부담이 컸을 거예요.”

    “아, 아닙니다. 최종심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아니죠. 절대 그 정도로 만족하면 안 돼요. 작가란 모름지기 자신의 작품을 그저 컴퓨터 파일 속에 묻어 둬선 안 되는 거예요.”

    “아, 네.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음, 이런 말을 하길 그렇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할게요. 이은석 작가의 이름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건 솔직히 힘듭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공모전에서 떨어진 작가의 작품을 누가 드라마로 만들어 주겠는가. 다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정면에서 들으니 은석은 정강이를 걷어차인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제안하는 거예요. 이은석 작가의 작품에 내 이름을 붙인다면 충분히 제작이 가능할 것 같거든요.”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썩 내키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난 이은석 작가가 다르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이름 있는 작가들 작품도 엎어지는 거 다반사예요. 편성을 받아 놓고도 미끄러지는 것투성이구요. 더군다나 공모전에도 떨어진 네임드 하나 없는 작가의 작품, 제작하긴 여러모로 부담이죠.”

    “…….”

    “난 이대로 이은석 작가의 작품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내키진 않겠지만 내 이름이 달린다면 제작사 쪽에서도 부담을 덜지 않겠어요?”

    확실히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은석만 해도 그녀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봤으니까.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때요? 세상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골방에 처박히는 것보다 자기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내 빛을 보게 하고 싶지 않나요?”

    애초에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없어질 작품, 이런 식으로라도 세상에 나오게 한다는 그녀의 말이 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지 은석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은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뿐.

    결국 은석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꽤 오랫동안 그녀가 슬럼프에 빠져 제대로 된 드라마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장려상으로 정해져 있던 은석의 작품을 마지막 순간에 기어이 떨어뜨린 것이 그녀라는 것을 안 것은 그보다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한 번 빠진 고명희의 마수에서 은석은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보조 작가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작품을 빼앗기고 착취당한 시간이 자그마치 10년이었다.

    드디어 혼자가 된 은석은 고명희 밑에서 일하며 알게 된 PD의 단막 입봉작을 쓰기로 했다. 힘든 시간이 가고 이제 행복이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명희 쪽에서 은석을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파렴치한으로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겨우 받은 편성을 취소해 버린 탓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대신해 드라마를 썼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던 그녀는 생각보다 악랄했고 그럴 힘도 있었다.

    PD는 은석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장도 윗놈들도 다 알아. 고명희가 아니라 그동안 그 여자 작품 다 네가 쓴 거 안다고. 하지만 이 문제가 드러나면 자기들 입장도 난처해지니까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거야.”

    “…….”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어서.”

    “그럼 형은요? 형도 입봉작이라고 좋아했잖아요. 미끄러진 거 아니에요?”

    “그게…….”

    머뭇거리는 그의 태도에 알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빠진 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꼈다. 물심양면 도와준 그마저 불행에 빠진 건 아니었으니까.

    얼마나 마셨는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신 은석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러 주변을 살피다 그만 달려오는 차와 부딪쳤다.

    허공에 떠오른 몸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몸에 힘을 주려 했지만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눈을 떠 보는데 자신을 치고 달아난 차가 속력을 내더니 가로수를 쾅 하고 들이받아 버렸다.

    그 순간 세상이 마치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은석은 고통 속에서도 피식피식 웃었다. 그는 언제나 약자였다. 늘 당하는 것에 익숙했고 되갚아 주는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멍청하게 10년이란 세월 동안 착취당한 걸로 모자라 누명까지 쓰고 쫓겨난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이 똑같이 당하는 꼴을 보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쿨럭!”

    숨 쉬기가 어려워 저도 모르게 한 기침에 피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온몸 마디마디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결국 내 삶의 끝은 이 꼴이구나 싶은 그때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익숙한 손길이었다. 바로 할머니였다.

    아, 할머니가 나를 데리러 와 주었구나.

    이제 더는 혼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은석은 마음 한편으로는 편안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를 휘감던 육신의 고통도 마음을 짓누르던 생각들도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할머니가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석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으으-.”

    목에서 소리가 나는데 사람의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로 자신이 병원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이 빙빙 돌고 있었다. 너무 어지럽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직 죽지 않은 건가? 그럼 나 산 건가?’

    그러자 구역질이 확 올라온 은석은 몸을 일으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낚아챘다.

    “우웨엑!”

    있는 거 없는 거 전부 게워 내니 그나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괜찮니?”

    갑작스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은석이 정신을 차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 아버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단어에 놀란 은석은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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