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01)
로라스는 존재의 검은 구속구에 손을 대었다.
귀한 제자들을 저런 더러운 곳에 일분일초라도 갇혀 있게 하는 것이 몸서리나게 싫었다.
―내 권역을 벗어났다지만 구속구는 내 영역.
비웃는 듯한 마족 말토덱트린의 의사.
―감히 인간 따위가…….
하지만 말토덱트린의 의사는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부우욱!
가죽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구속구는 로라스의 손에서 너무나도 쉽게 찢어져 버렸으니까.
너무 예측 밖의 일이었을까?
말토덱트린을 형성하고 있던 검은 기운들이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로라스는 진기를 일으켜 그들의 몸에 손을 갖다 대며 생각했다.
‘예상보다 나쁘지는 않군.’
검은 마기 안에서 꽤나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했을 텐데도 의외로 제자들은 서로를 잘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의아하기도 했다.
‘셋이 힘을 합쳤다면 저 잡스러운 것도 능히 처리 가능했을 텐데.’
이리 수세에 몰렸다는 것이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구속구를 찢었다지만 놈들의 의식은 이미 내가 잠식…….
그때 말토덱트린이 뭔가 의사를 전달하는 것 같았으나, 이번에도 끝맺지 못했다.
“일어나거라.”
로라스가 자는 아이들을 깨우듯, 툭 던진 가벼운 한마디.
“으으으으…….”
그 한마디에 세 사람 모두 일제히 소리를 내며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이 처음으로 날 걱정시키는구나. 그것도 저런 잡스러운 것을 상대로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로라스의 말에 말토덱트린의 기운이 다시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잡스러운? 인간이 감히 내게 그런 단어를 입에 담았단 말인가!”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의념으로 의사를 전달하다 음성이 터져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로라스는 그런 말토덱트린의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세 제자에게 말했다.
“그래서 늘 최선을 다하라 하지 않았더냐. 그랬다면 이런 수모를 당했겠느냐?”
“죄송합니다, 사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라이너의 대답.
“죄송합니다. 사형과 사제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게…… 저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델리나의 말은 이랬다.
말토덱트린이 세 사람을 자신의 권속 아래로 두기 위해 정신 제압을 시도했을 때.
아델리나는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여 말토덱트린을 자신의 언어 아래 두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하나 몰랐다.
아델리나가 시도했던 대법은 이 세계에서는 그의 권역.
그로 인해 오히려 말토덱트린에게 더욱 힘을 실어 줬던 것이다.
그녀는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게 있다면, 라이너와 악군이 그녀를 늦지 않게 보호했다는 것. 하지만 그 탓에 승기는 완전히 말토덱트린에게 넘어갔고, 서로를 보호하며 일단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순수한 개천지보의 힘으로 대항할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그 방법을 포기했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들의 사부가 이 지역에 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곧 자신들을 찾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말토덱트린은 거대한 힘을 가진 마족이나, 그 할아비가 오더라도 사부가 오면 끝장난다는 확고한 믿음에 시간을 끄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부가 왔고 말이다.
“알 만큼 알면서도 그런 실수를 했구나.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으면 되지.”
부모가 자기 아이의 실수를 감싸듯 로라스는 딱 그 한마디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놈! 인간 따위가 감히 날……!”
“일단 저 시끄러운 놈부터 잡고 계속 이야기하자꾸나.”
로라스는 그제야 말토덱트린에게 관심을 주었다.
“인간 따위가 가질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 고작 그 정도로 날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폭우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검은 기운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보고 로라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인간이나 마족이나 같은 게 있군.”
“…….”
“꼭 자신 없는 것들이, 힘없는 것들이, 말로 자신의 체면을 살려 보려 한다는 것!”
“뭐라!”
“그 검은 연기 같은 것을 굉장히 믿는 모양인데, 그런 잡스러운 것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
“좋아. 그걸 먼저 벗기면 뭐라 말할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말토덱트린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로라스는 커터를 들고 그에게 걸어갔다.
걸어갔다…… 분명 그리 보였을진대, 한 번 보폭을 디딜 때마다 거리는 순식간에 당겨졌고, 그의 몸은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다.
무림에서 소위 말하는 허공답보의 수준이 아닌, 정말 하늘이란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한 움직임.
―인간!
그리고 그런 로라스를 향해 검은 기운은 하나의 거대한 창이 되어 날아갔다. 하지만 로라스는 그 창을 피하지 않았다.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런 잡스러운 건 내게 통하지 않는다고.”
로라스는 말을 하면서 그 검은 창을 막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커터를 이용하여 튕겨 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것을 관조할 뿐이었다.
그사이 거대한 검은 창은 로라스를 관통했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창으로 보이나, 그 크기가 거대하여 창 안으로 로라스의 몸이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굉장한 길이를 자랑하던 창은 로라스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게 완벽히 감싸며 스쳐 지나갔다.
―제 능력을 이리도 과신하다니! 역시 인간이다! 그 어리석은 대가는 너의 소멸로…….
“학습 능력이 정말 없구나.”
하지만 멀쩡히 모습을 드러낸 로라스는 명백한 비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잡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면 성공하긴 했다만.”
―놈!
말토덱트린은 쏘아 낸 자신의 기운을 회수하려 했고, 기운으로 만들어진 창이 그에게 돌아가려 할 때였다.
“보낼 때는 네 마음대로였겠지만, 가져갈 때는 아니란다.”
로라스가 손바닥을 뻗자, 검은 창은 그대로 멈춰 섰다.
쿠르르르릉.
말토덱트린의 주변으로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천지가 울리며 창이 다시 한 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듯했다. 하지만 뻗은 손바닥을 움켜쥐는 로라스의 동작에 창은 가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로라스 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이 잡스러운 기운을 벗겨 낸 후에 네가 어찌 나올지 궁금하다고.”
지진이 일어날 정도로 잔뜩 힘을 준 말토덱트린과는 달리 로라스는 말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스팟!
그리고 자신에게 빨려 들어오는 창을 커터로 그어 내니 검은 창은 그대로 조각이 났고…….
치치치치치!
커터 주변의 백염에 의해 기화하며 그 크기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안 돼!”
말토덱트린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저 검은 마기는 자신의 근본.
저렇게 키우는 데까지 얼마만 한 시간이 걸렸는데, 그것을 저리 허무하게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놈!
상당한 검은 마기를 뺏긴 말토덱트린은 마침내 자신의 본체를 드러냈다.
이마에 달린 뿔과 거대한 네 개의 날개까지.
보는 것만으로 압도될 만한 말토덱트린의 본체.
“구설로 전해지는 동화들이 영 거짓은 아닌 것 같군. 딱 이야기 속의 대마왕 아닌가?”
하지만 로라스는 오히려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그의 본체를 감평했다.
“박제라도 하면 딱이겠구나. 제법 상품이 되겠어.”
쿠르르르르릉.
너무 어이없음에 말토덱트린은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더 마기가 사라지기 전에 그를 끝장내기로 마음먹었을 뿐.
그가 손을 뻗어 남아 있는 마기를 응축시키자 그의 손에는 이번에 거대한 검은 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로라스에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저 제 기운만 믿고 살았던 놈은 늘 그랬지.”
그런 그를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는 로라스.
“그런 제 기운보다 더 큰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이가 된다는 거지.”
로라스는 별다른 동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커터를 들고 검의 궤적에 미리 갖다 대었을 뿐이다.
스파아앗!
공격은 검이 했는데, 중간에 서 있는 커터에 그대로 물살 갈라지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짓뭉개 주마!
여하간 가까워지긴 했으니 말토덱트린이 로라스를 향해 손을 날렸다.
자신의 주변에 검은 그림자를 형성할 정도의 거대한 손바닥을 보면서도 로라스는 오히려 비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거대해 봤자 두부는 두부지. 거대한 두부로 못을 쳐 봤자 못이 부서지겠느냐? 그런 물렁살에는 무기도 필요 없겠구나.”
로라스가 그대로 주먹을 뻗는 순간, 손바닥이 파리라도 잡듯이 그를 덮쳤다.
퍼억.
그리고 말대로 말토덱트린의 손바닥을 꿰뚫고 나온 로라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로라스는 어느새 자신에게 바짝 다가온 말토덱트린의 얼굴로 날아갔다.
말토덱트린이 손을 홰홰 저었으나, 로라스는 이미 원하는 장소에 서 있었다.
“안사람이 좋아하겠네. 대마왕의 뿔이라니, 분명 연구가치는 있을 터.”
말토덱트린의 뿔을 향해 커터를 긋는 로라스.
분명 단단한 각질일 것이 분명함에도 뿔을 그어 가는 커터의 속도는 떨어지지 않았고, 궤적은 전혀 지장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두 뿔을 잃은 말토덱트린이 두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는 사이.
“날개도 쓸모가 있는가?”
고통보다 더한 섬뜩한 말에 말토덱트린은 그제야 자신이 이 인간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 마족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형상화한 육체가 흐릿해지고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차라리 발악이라도 했다면 좀 더 수월했겠지만.”
하지만 로라스가 그걸 용납할 리 없었다.
이미 전대 공작에게 그가 어찌 도망을 쳤는지 확실하게 들었다.
‘어! 어!’ 하면서 놓칠 이유가 없었다.
뻗은 커터에 휘말려 말토덱트린은 마기 그 자체로 변환하지 못했다. 아니, 변화한 족족 소멸했다는 것이 맞았다.
뒤늦게 변환을 포기한 말토덱트린은 본체로 돌아와 탈주를 시도했지만, 그때는 이미 많은 마기를 잃은 상황.
그 정도의 본체면 번천이나 테라 수준에서도 정리 가능할 정도였다.
“그만 가거라. 수없는 악업을 저질렀으니 그대로 소멸하면 더 좋고!”
그렇게 말토덱트린이 완벽하게 소멸되고, 검은 기운 한 올만이 남아 일렁일 때.
“로라스.”
에르자일이 다가오며 그 검은 기운 한 올을 거둬들였다.
“이걸 연구하면 정화 작업을 빨리할 수도 있을 거야.”
에르자일의 지팡이에 박힌 구슬 하나가 검은 기운을 흡수하는 걸 보며,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끝났다.
남은 건 검게 물든 땅을 되돌리고, 놈의 잔해라 할 수 있는 마물들의 처리와 게이트를 닫는 것뿐이었다.
* * *
여전히 수많은 게이트와 마물들이 남아 있었으나,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계속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
게이트를 닫는 대로, 마물들을 소멸시키는 대로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졌다.
에렌을 중심으로 모든 국가들이 오로지 그것에만 힘을 쓴 지 정확히 2년.
여전히 군데군데 게이트가 있고 마물들의 서식처가 남아 있었으나, 그건 이 세계가 원래 뱉어 내는 흔적.
그것을 제외하면 국가 간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니, 세계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됐다.
하지만 로라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향후 십 년간 어떠한 국가적 분쟁도 허용치 않겠다.
신의 사자, 대륙의 왕, 게이트 클로저, 마물 학살자 등 수많은 수식을 달고 다니던 그의 영향력은 이제 대륙 제일이라,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위정자들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마침내 에렌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외환이 사라진 상황에서, 로라스는 내정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에렌, 아니, 제국 북부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말토덱트린의 난에도 별 피해가 없었던 지역이니까.
하지만 다른 국가들은, 지역들은 그러지 못했다.
에렌의 부로 제국을 떠받치고 제국이 정상화된 이후, 그 부로 이제는 제국 주변 국가들을 떠받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세계는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변만 평안하면 된다는 로라스답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그는 기왕 시작한 거 완벽한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언제 그런 놈이 다시 나타날지 모르지.
프라일의 충고도 로라스의 그런 변화에 일조했다.
‘어쩌면 내가…… 로라스가 된 이유가 이런 것에 있을지도.’
로라스는 이 모든 걸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대신 하늘도 그에게 확실한 보상을 해 주지 않았는가?
저 세계에서는 없었던 가족, 진짜 혈육까지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로라스의 만족감은 높아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