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300)
“징그럽다. 징그러워!”
원정대 기사 하나가 자신이 한 말 그대로의 표정을 지으며,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약간은 투덜거리는 목소리였으나, 그것에 대해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징그럽다는 건 그만이 아니라 모든 대원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로라스의 우려와는 달리 시작지점은 아무 것도 없었던 상황. 그리고 개방형 던전.
이게 과연 게이트인가 할 정도로 화사한 햇볕에 길이 잘 닦여진 숲속.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날 좋은 날에 소풍이라도 나왔다 해도 믿을 만한 상황이었다.
허나 지금 상황이 그리 좋은 것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이틀을 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걸 깨닫고 혹시 마법인가 싶었다.
“일반적인 대지야. 속성이 거의 무에 가까워.”
하지만 에르자일이 마나 탐지까지 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이틀 내로 닫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을 터. 차라리 이대로 게이트의 핵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행인 게 있다면 식량은 충분하다는 것.
이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무작정 걷기만 했던 시간. 문제는 밤이 오지 않았다는 것.
백야에 휴식을 취하다 보니 일행의 피로는 가시지 않았고, 그 탓에 사람들의 불쾌감은 높아져 갔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차라리 그때가 훨씬 나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레가 지난, 해 짱짱한 아침.
처음으로 몬스터를 발견했다.
게이트 밖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인간형 몬스터 한 무리.
이 정도면 원정대의 대원 중 누구라도 홀로 처리 가능한 상황.
반가웠다.
지루하게 걷기만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무리를 보자마자 기사들 몇몇이 그대로 달려나갔고, 몬스터 무리를 도륙했다.
먼저 뛰어나가지 못한 이들은 아쉬웠지만, 잠시 후 다시 한 무리의 몬스터가 나타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았다.
딱 이틀 만에 기회는 기회가 아닌, 귀찮은 것들을 처리해야 하는 일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일거리는 점점 가중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다.
대원 하나가 징그럽다고 하고, 그것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이유 말이다.
쿠오오오오.
그리고 그 말을 한 지 십 분 만에 다시 몬스터 세 마리가 나타났다.
시선을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올려 봐야 얼굴이 확인되는 초대형 몬스터.
자신의 순서가 된 대원들이 나설 때였다.
그들보다 먼저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저벅저벅.
스윽.
몬스터들에게 다가가 검을 한 번 휘두르고 돌아오는 이는 바로 로라스.
쿠우웅.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렸다.
아무도 못 봤다.
로라스가 어떻게 몬스터들의 허리를 양단했는지 말이다. 그저 휘둘렀을 뿐인데 말이다.
“앞으로는 내가 처리하지.”
담담하게 한마디 하는 로라스.
여태 로라스는 전투에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대원들의 개인 수련을 봐주고, 그것에 익숙해지도록 그들에게 충분한 실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변했다.
이 게이트는 함정이다.
대단한 함정이지 않은가?
어떠한 거짓도 없는, 순수하게 자신들의 힘을 빼기 위한 함정.
“주군…….”
번천이 입을 열려 하자, 로라스는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지칠 것이다. 하지만 몬스터 개체도 무한정은 아니다. 그건 게이트 원정대의 경험이 있는 자들은 다 알 터.”
“…….”
“그게 수 천이든, 수 만이든 다 죽이면 된다.”
“…….”
“몬스터 전멸. 몬스터가 나오지 않아도 찾아서 죽일 각오로, 확고하게 전멸을 목적으로 한다! 모두 알았나?”
“네.”
피곤함에 가득했던 대원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목적을 확고하게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전멸! 찾아 죽인다! 결국 끝이 보인다!
일행의 속도가 빨라졌다.
애초에 상황이 문제였지, 일반 몬스터들은 건들지도 못하는 포스 마스터들.
그렇게 보름 동안 왔던 거리를 일주일 만에 다시 돌파했을 때, 마침내 보였다.
게이트 안의 또 다른 게이트가.
“이중 게이트?”
모두가 공통적으로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로라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게이트 안의 게이트?
‘그래서 뭐 어쩌란 건가?’
대적을 두고 가장 먼저 관리해야 하는 건 정신적 문제다.
종종 고수들이 자신보다 하수에게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건 마음가짐에서 밀려서다.
절박하고 절실하게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 배 이상을 낼 수 있는 법.
마인드를 잘 가져가야 했다.
보름을 그리 힘을 빼 놨는데, 안에서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면 정신적 타격이 크다.
“두 개든, 세 개든, 백 개든, 목표는 달라지지 않는다. 전멸시킨다.”
저음의 로라스의 음성은 대원들의 마음을 다시 똑바로 서게 만들었다.
일행은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이 씨가 되었던 걸까?
총 여덟 개의 게이트를 만났다.
걸린 시간은 세 달.
식량이 부족하기 시작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을 채집까지 해야 한 상황에서 아홉 번째 게이트를 만났다.
로라스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똥 씹은 표정들.
하지만 들어가서 그 표정은 달라졌다.
태양이 없는 공간. 아니, 달빛조차 없는 오로지 진한 어둠.
“라이트!”
에르자일이 수십여 개의 라이트를 허공으로 띄워 뿌리자 안쪽이 훤하게 보였다.
마침내 내부형 던전. 그리고 아주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손님을 초대할 마음이 들었나 보군.”
로라스가 옅은 미소와 함께 하는 말에, 모두가 따라 웃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듯했던, 그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매지스터분들은 중앙으로. 번천, 테라 너희 둘이 최후미를 맡아야겠다.”
마침내 자신에게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했던 던전이 나오자, 시그탑이 신이 나서 대열을 만들려 할 때였다.
“시그탑 경.”
“네, 영주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객이 빈손으로 올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로라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말했다.
“이제 제 차례라는 뜻입니다.”
* * *
―드디어 왔는가?
그들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모든 걸 지켜봤다.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길.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바깥에서 놈들이 자신의 권속들을 너무 없애는 바람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하지만 용케 분열도 하지 않고 잘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신의 권속들 중에 상위에 속하는 개체를 단 일 검에 소멸시키는 건 나름 충격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인간들이 말하는 포스 마스터의 경지를 완전히 넘어선 존재. 거기에 자신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안겼던 놈과 비슷한 움직임.
하지만 상관없다.
또다시 당할 것 같다면 애초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의 구속구에 갇힌 저 인간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대체 어떤 포스를 갖고 있기에 저리 버틸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지만, 곧 자신이 흡수할 힘.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인간인 이상 자신보다 더 버틸 수는 없을 테니. 다만…….
―생각 이상으로 여기까지 오는 속도가 빠르다는 건데.
아직 여유는 있다.
이 거처에는 최상위 권속들, 무엇보다 언데드들이 있다.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반 권속들과 달리, 언데드들은 아니다.
시간은 분명 충분했다.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쿠르르르르릉.
굉음과 동시에 사방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닌 이상 자신의 거처를 이리 만들 수는 없다. 분명 그러할진대…….
천장에서 작은 돌덩어리와 먼지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개천지보.
이 무공의 이름을 사부에게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뭐, 누구나 그리 생각하지 않나?
하늘을 날고 땅을 가르는 존재.
그게 무림인. 내 성취를 보기도 전에 돌아가신지라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사부는 하늘을 날고 땅을 갈랐다.
그래서 웃기지도 않은 개천지보라는 이름을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다.
노력했다. 그렇게 정말 하늘을 날고 땅을 가를 수 있게 되었다.
천하제일인.
경지에 이른 후 모두가 날 그렇게 불렀다.
그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마찬가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더 이상 경쟁할 상대도 오를 수 없는 경지도 없다 여겼을 때 생각한 것이 있었다.
개천지보 그 자체가 가진 의미.
하늘을 열어 나아간다라는 그 이름을 말이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하늘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능할 것 같았다.
관조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가 아니었다.
지레짐작으로, 아니, 그냥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뿐. 그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그걸로 끝이었다.
“주군?”
“아!”
날 부르는 번천을, 그리고 주변의 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깔끔하게 잘라 낼 수 있다면 좋겠으나, 좀 거칠 것 같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잔해물도 좀 남을지도 모르겠고. 여러모로 시끄러울 것 같으니 모두 옆으로 물러서는 게 낫겠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뒤로 물러나는 이들을 보며 커터를 들었다.
그리고 어둠 저 너머를 보았다.
‘내 차례다. 이제 그만 모습을 보여라.’
초식은 필요 없다.
그저 당연히 내가 필요한 길을 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허공을 그었다.
우르르르르르르.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은 울렸으나 잘린 공간은 비명을 질렀다.
호신강기를 일으켜 일행을 떨어지는 잔해물로부터 보호했다.
얼마나 걸리려나?
여덟 개의 게이트 안쪽이나, 내가 원하는 건 진짜 하늘.
거기까지 길을 내었으니, 내가 원하는 진짜 하늘이 보일 때까지 공간은 갈라지고 또 갈라질 것이다.
“으으으으으…….”
누군가가 신음을 내었고.
“말도 안 돼!”
누군가는 경악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대로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놈의 세계가 내가 원하는 세계와 한 공간에 혼재되는 바람에, 천지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쩌어어어엉!
드디어 놈의 첫 번째 공간이 깨졌다.
‘재미있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균열이 가고, 조각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
쩌어어어엉!
두 번째 게이트, 그러니까 우리가 경험했던 일곱 번째 게이트의 공간도 균열이 일어났다.
쩌어어어엉! 쩌어어어엉! 쩌어어어엉!
지나왔던 모든 게이트가 하나씩 터져 나가고, 마침내 더 이상의 균열과 파편이 생기지 않게 되었을 때, 게이트 이전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냥 돌아온 건 아니다.
다른 차원의 공간이 깨지는 충격에서 원정대야 내 힘으로 보호하고 있었으나, 전방은 아니었다.
한 공간에 수많은 존재가 겹치다 보니, 그들은 스스로 파멸하고 있었다.
저기서 안전한 공간은 거대한 검은 존재와 그 주변의 몬스터들이 있는 곳뿐. 그리고…….
있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저곳에 있었다.
내 귀하디 귀한 아이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이 어떤 상태인지 정도는 말이다.
여전히 터져 나가고 있는 몬스터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주군을 따른다!”
대원들이 그 아비규환의 공간으로 몸을 날렸고, 난 그냥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 원하는 공간마저 찢을 수 있는데, 저 몬스터 무리 따위가 장애물이 될까.
당연히 아무것도 없는 듯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구나! 네 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거대한 검은 존재에게서 전해지는 물음.
놈을 쳐다봤다.
그래. 할아버지가 놓칠 만하다. 이 세계에서 이만한 강력한 포스…… 아니, 더러운 감각을 느껴 본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네 놈을 소멸할 자.”
신이 아닌 이상 저놈은 반드시 여기서 죽는다.
마족이라는 것에게도 죽음이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