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8)
아칸이 말했다.
“저희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곳까지 도망쳐 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 왕성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무너져?”
“말 그대로 무너졌다 했습니다. 수많은 흙먼지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칸이 말끝을 흐리면서 표정이 굳는 걸 보며, 로라스가 말했다.
“몬스터로군.”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설 속의 드래곤이라도 나오지 않는 한, 어찌 몬스터가 단번에 왕성을 그렇게 무너트릴 수 있을지…….”
아칸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지진이 일어나던 날, 주변의 보이지 않았던 몬스터들이 출현했습니다. 다행히 저희 부대가…….”
아칸의 말은 요약하면 이랬다.
그날 새로운 종의 몬스터 그리고 평상시보다 다섯 배는 많은 몬스터가 출현했고, 수비대는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퇴치했다고 했다.
“다행히도 공작님을 맞이하기 위해, 병력들을 모아 두고 있던 터라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뭔가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근처 마을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왕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저희 왕국에서 유일한 마탑의 소속 마법사였습니다. 왕성이 무너졌다고 알려 준 이도 그였습니다.”
“그럴 리가.”
재차 확인한 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라고 정확히 시간을 못 박아 둔 건 아니지만, 자신이 도착하기 전 라이너와 아델리나가 타메라 왕국에 도착하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왕성을 덮친 몬스터들이 어떤 종류이고, 또 얼마만 한 숫자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있었다면 그리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을 것이다.
“저도 제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아칸의 힘없는 목소리에 로라스는 말했다.
“그대는 군인으로 훌륭하게 대처했다. 타국의 군인이나 높이 평가한다. 이 지역은 잘 모른다. 그대가 우리의 길 안내를 맡아 줄 수 있는가?”
“공작님의 제안은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제가 없으면…….”
“이곳 치안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도 구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까.”
“감사합니다, 공작님.”
“이 주변에 게이트가 있나?”
“없습니다. 몬스터들이 종종 출현하기는 하지만 빈도와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로라스는 대원들을 시켜 주변 정찰을 실시하게 했다. 그리고 새로운 게이트의 출현이 있을지도 모르니, 발견하면 진입하지 말고 돌아오라 지시했다.
‘놈이 다시 나타난 것인가?’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서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놈을 찾는 수고는 덜 수 있을 테니, 잘된 일. 하지만 라이너, 아델리나와 연락이 되기 전까지는 마음 편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왕성까지 얼마나 걸리지?”
“닷새면 도착합니다.”
“닷새라…….”
로라스는 생각에 잠겼다.
* * *
예상대로 타메라 국경에 새로운 게이트 출현이 발견되었다.
새로 생긴 게이트라 곧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될 터.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나, 이대로 이곳을 지나치면 게이트에서 가까운 이 지역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로라스는 멸마대를 둘로 나누고, 시그탑에게 나머지 반과 함께 게이트를 닫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나머지 반을 끌고 그대로 왕성으로 향했다.
며칠 후.
타메라 왕국의 왕성은 더 이상 성이라 불릴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주저앉았다더니, 정말 말 그대로였다.
눈으로는 폐허를 보았고, 코로는 썩은 내와 탄 내가 진동함을 느꼈으며, 귀로는 뭔가가 부숴지며 부패돼 가고 있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 죽었거나, 도망을 쳤다면 몬스터라도 있어야 했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폐허.
‘정말…….’
로라스는 성의 잔해 더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
‘놈이 그 정도로 강력하다는 건가?’
무너지는 성을 막지 못했더라도, 제 한 몸 빼지 못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살아 있다면 자신이 왔다는 걸 알 텐데,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경각심이 들었다.
단순하게 멸마대가 아닌 범국가적인 차원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로라스는 초조함을 느꼈고, 그 초조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정말 만에 하나 우려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테라.”
“네, 주군.”
“아무래도 린델에게 다녀와야 할 듯싶다. 그에게 현재 상황을 말해 주고, 주변 왕국들을 움직이게 해.”
“알겠습니다, 주군.”
원래라면 타메라 왕국에게 도움을 받아 놈을 색출해 내려 했다. 하지만 왕궁 자체가 이리되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모두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단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
‘제 놈이 도망쳐 봤자 이 하늘 어딘가에 있을 터!’
모든 흔적을 찾고, 지워 버리면 결국 걸리게 될 것이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깨끗한 공터까지 물러간다. 그리고 주변으로 정찰을 보내. 몬스터의 위치부터 파악하겠다.”
일 년이든 이 년이든 이 왕국의 모든 몬스터를 멸하리라 다짐하는 로라스였다.
* * *
누렇게 익은 곡식들로 만들어진 황금 물결.
분명 그리되어야 할 날씨와 장소는 검은 물결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장소에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장악했다.
보기만 해도 종말이 왔다고 생각이 될 그런 광경.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아다녀야 할 새들은 검은 피와 살점을 떨어트리며 하늘을 덮고 있고, 대지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새의 것들이 떠돌아다니는 모습.
더 경악할 건 땅이 스멀스멀 기어가듯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이한 광경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확실한 건,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땅이 종이 물들 듯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놈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런 검은 대지와 시체들을 상대로 하는 성이 있었다.
“머리를 쏴! 머리를 맞추라고! 그 부분은 제대로 재생이 안 돼!”
악 소리에 가까운 외침에 간부들은 병사들을 독려했고!
“성령의 힘으로!”
“큰 부상자들은 이쪽으로!”
그들 틈에서 신성력을 퍼부어 스멀스멀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시체들을 상대하고, 부상자들을 처리하는 성직자들이 있었다.
잘 버티는 것 같았다.
수만 이상의 시체들을 상대로, 이 천이 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정말 잘 수비하고 있었다.
“사제님, 정화를……! 성벽이 무너지면 모두 끝장이 납니다! 정화가 가장 먼저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검은 땅이었다.
사제들이 성수를 퍼붓고, 정화의 기도를 올리고 있어 주춤하고는 있었으나, 조금의 틈만 있으면 검은 땅은 성 내부로 들어오기 일쑤였다.
특히나 성벽은 그림자 드리운 것처럼, 검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성벽에서 돌과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내구성이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성벽을 의지하여 버티고 있는 상황인데,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장.
사제들 입장에선 사람이 우선이나, 군인들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니니 양쪽을 번갈아 가며 힘을 쓰느라 탈진 직전까지 이르렀다.
쿠우우우웅!
그리고 어느 순간 굉음이 울리자, 살아 있는 존재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저만한 굉음이 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어디 쪽인지 모르나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무너진 성을 단시간에 다시 세울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정화 역시 안전하게 하지 못하게 될 테니, 성벽은 이제 도미노 무너지는 것처럼 순서대로 무너질 것이다.
오늘만, 오늘 하루만!
그렇게 버틴 사람들의 희망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두두두!
성벽이 무너지는 굉음과는 결이 다른 소리가 땅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설마?’
사람들이 사그라드는 희망의 불씨를 필사적으로 태우며 버티고 있을 때.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환호성!
“원군이다!”
원군이 도착했다.
“신의 기사가 드디어 도착했다.”
“멸마대도 함께 왔다.”
게다가 그들은 원군이라는 단어가 줄 수 있는 그 이상을 가진 자들.
왜 아니겠는가?
땅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하늘에서 나타나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한 사람.
쿠우우우웅!
분명 사람 하나 떨어졌음에도 그 소리는 성벽 무너지는 소리보다 훨씬 컸고.
“죽은 것들이 어찌 산 자를 핍박하느냐!”
그보다 더한 거성과 함께, 눈이 시릴 듯한 섬광과 백염을 동시에 피워 올리는 창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리 휘몰아쳤으면 시체라 하더라도 육타음이 들리는 게 정상일진대, 그의 창에 베인 것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냥 잘렸을 뿐이다.
신기한 건 병사들이 그렇게 자르고 찔러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또 재생하던 것들이, 창에 잘렸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알까?
그 창에 베인 시체 절단면은 마치 비단결처럼 매끄러워, 그 어떤 재생도 허용치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주변으로 모든 것들을 베어 넘어트리고, 쓰러트리고, 소멸시켰다.
그는 가장 시체들이 밀집된 곳을 향해 걸으면서, 뛰면서, 날면서 그것들을 모조리 와해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걸 보는 모든 이들은 그 광경에 그저 입만 딱 벌릴 뿐.
“군단이다…….”
표현이 아닌 실제로 그는 하나의 군단이었다.
그래, 소문은 들었다.
전 영토의 반 이상이 검은 땅으로 물들어 버린 타메라 왕국에서,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고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말이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 정도가 아니다.
저런 무력이면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거기에…….
“빨리 처리해.”
“지겹다, 지겨워!”
타메라의 병사들과 사제들이 목숨 걸고 막았던 것들을 너무나도 수월하게 처리하고 있는 멸마대.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울음소리. 사람이, 늑대 따위가 내는 그런 울음소리가 아닌, 뭐랄까……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그런 울음이 들렸고.
스스스스스스스스슷.
기이하게 들리는 소리와 함께 시체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
모두가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면서 지금 살아 있음에 감사했지만, 누군가는 아직인 듯했다.
“어디를!”
“어림도 없다!”
멸마대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많이 쓰러졌다고 하나, 애초에 수만의 대군이었던 언데드들. 그런 것들을 고작 수백의 멸마대가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신의 기사 로라스가 있었다.
“확실하게 소멸시킨다!”
불필요한 외침이었다.
이미 이 언데드들을 처리한 지 반년이었다. 시체들은 그 숫자에 한계가 있으니, 소멸시키면 시킬수록 이후 이들의 숫자는 줄어든다.
로라스와 멸마대가 악착같이 그들의 숫자를 줄이는 이유였다.
그렇게 삼만이 넘는 언데드 무리 중, 살아…… 아니, 신체 멀쩡하게 돌아간 건 반이 되지 않았다.
* * *
살점 하나 없는 몸에 흑색의 거대한 로브를 두르고, 거대한 마법 지팡이를 두른 해골.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언데드의 왕 리치라 부른다.
그런 리치가 셋이 이 자리에 있었다. 하나의 존재 앞에 얌전하게 말이다.
그 존재는 이마에 거대한 두 개의 뿔을 지녔으며, 거대한 신체에, 등에는 네 개의 검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마족 말토덱트린.
리치 셋을 소환하여 타메라 왕국을 사자死者의 땅으로 바꾼 장본인.
―알 수 없는 존재로다. 대처하지 않았으면 제대로 부활할 수 없었을 터.
리딩 마인드로 리치들의 상황을 읽은 말토덱트린은 그의 날개를 활짝 펴며 생각했다. 그건 경악의 몸짓.
수 백년 만에 다시 인간계에 강림하는 것을 망칠 뻔했다.
―늘 이랬지. 손짓 한 번에 핏물로 변하는 종족 따위가.
말토덱트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세 명의 인간들이 거대한 검은 빛 덩어리에 갇혀 있었다.
―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말토덱트린은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