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7)
“정리 끝났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악군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별 볼 일 없는데.”
미치광이 마법사들 집단.
나름 자신의 정예를 데려왔는데,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정확히는 싸울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수고했다. 제법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은 곳이었으니, 알아서 배분하고.”
“감사합니다, 주군.”
수하들이 모두 나가고, 방에는 악군과 포박당해 있는 한 마법사만이 남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진즉 항복이라도 하지. 그러면 서로 더 깔끔하고 좋은 일이 많았을 텐데.”
“…….”
“아. 아혈을 잡아 놨었군. 마법사들이라 귀찮아질 것 같아서.”
악군은 마법사의 아혈을 풀어주며 물었다.
“대체 왜 저항을 하지 않은 거지?”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마법사의 반문에 악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희들이 꾸미는 일, 이미 들켰어. 바로 이 몸한테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악군은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놈은 자신을 봤을 때 원한이 가득 차야 정상이나, 지금 저 눈은 강렬하게 ‘왜?’라는 의문을 나타내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었다면 저희에게 그냥 이야기해 주면 되지 않으셨습니까?”
“…….”
“굳이 이런 식으로 벌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벌?”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면 주인께서는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악군의 표정이 굳어 갔다.
‘뭐지? 이 기시감은?’
악군은 살짝 혼란스러웠다.
“날 아나?”
결국 악군은 마법사에게 그리 물었고, 그는 매우 당황하면서도 황당해했다.
“주인…… 대체 왜 그러십니까?”
주인. 그 단어가 갖는 의미.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기억에 없는 노예들이라니. 의문스러운 건 있었다.
‘이들에 대한 보고를 누구에게 받았더라?’
생각해 보니 그런 보고를 받은 것도 없다. 아니, 집단의 존재 유무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상세히 들은 건 없다.
그런데 자신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들을 무너트렸다.
“너!”
악군은 마법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날 만났을 때부터 모든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아주 상세히 말이다.”
마법사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악군은 모든 기억이 났다.
이들이 누군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이 이들을 이리 쉽게 요리했는지 말이다.
당연하다.
이들 조직은 자신이 만든 것이고, 미치광이 마법사들 그 수장이 자신이었으니까.
‘마법…… 안 좋았지.’
그래서 얼마 전 사부와 마법을 겨루는 것도 내심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묘한 힘에 취하면서도, 찝찝함이 오랫동안 남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마법에 취해 있었을 때, 무엇을 했는지 백 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 그럼 문제가 무엇일까?
당연하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이 사부가 잡아 죽여야 할 ‘놈’을 소환했을 확률이 크다는 것.
그다음 문제는, 얼마 전 마법을 전력으로 사용했다는 것.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이건 간단한 귀납법이다.
옛날 마법을 사용했을 때 기억에 있지 않은 일들을 벌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발생할 확률이 있다는 것 아닌가?
악군은 수하들에게 모든 일을 멈추라 지시하고, 자신의 집무실, 아니, 집무실이었을 듯한 공간에 갔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비밀 금고를 찾았다.
여덟 개의 각기 다른 락 마법이 걸린 금고. 그것도 순서대로 풀어야 하는 마법을 쉽게 풀고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별게 없었다.
그저 몇 권의 서책과 금속으로 만든 물체가 있을 뿐이었다.
그 서책은 마법 서적이었고 물체는 기이한 도형을 표현한 징표였다.
악군은 급히 서적을 펼쳤다. 그리고 확인했다.
앞 몇 장만 훑어봐도 이 서적이 보통 마법 서적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마법 책이 첫 장부터 ‘재물’이라는 표현을 해 가며, 그것을 다루는 법이 적혀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서적을 확인하다,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징표를 발견했다.
‘미친…….’
대체 왜, 자신은 이런 것에 관심을 가졌을까?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이런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악군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감쌌다.
“주인님.”
밖에서 수하가 부르는 소리.
“주인님.”
“뭔 일이냐!”
“주인님을 찾으시는 손님이…….”
“그게 무슨! 내가 여기 있는 줄 누가…….”
악군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 미리 알려 준 사람이.
악군은 급히 밖으로 나갔고, 거기에는 예상대로 그 사람이 있었다.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대사형! 사저! 저 큰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
악군이 다짜고짜 하는 말에, 라이너와 아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 * *
계약契約.
해당 관계자들의 의사표시를 합의하는 것.
한마디로 구속력 있는 약속이다.
그리고 어떠한 일과 사유로 그것이 해지될 수도 있으나, 몇몇 계약은 목숨으로 지켜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마탑의 수입원인 언약의 서 같은 것도 있으나, 어떠한 계약은 그런 게 필요 없다.
악군이 이 세계로 넘어와서 처음 배웠던 마법. 그리고 그 마법을 익히는 도중 어떠한 존재와의 약속이 바로 여기에 속했다.
“마족? 흑마법을 말하는 것이냐?”
아델리나의 물음에 악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분명 그리 했습니다.”
악군은 효율을 따지는 성격이고, 가장 강한 힘을, 가장 빠르게 손에 넣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배운 마법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덕분에 사람의 심리를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정신 마법과 더불어 개천지보 오보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걸로 기반을 잡았고 말이다.
다만 그 대가, 마법에 관해 무지했을 때 그 계약 조건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버린 게 문제였을 뿐이다.
악군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델리나가 말했다.
“그래서 놈을 네가 소환했다는 거구나.”
“저도 지금 알았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 수습부터 해야지. 그런데 놈이 소환된 이상 계약은 해지된 거 아닌가?”
“온전한 힘을 가진 소환. 그게 조건이었습니다. 다만 그 힘을 가지기 전에…….”
아델리나가 말을 받았다.
“베스타인 공작에게 타격을 입었지. 게이트의 마물들에게 얻어야 할 힘은 사부님이 모조리 제거하고 계시고.”
“네. 바로 그겁니다. 이대로라면 계약은 계속 유지되고, 전 또 제 시간을 잃은 사이 그것을 해내려고 하겠지요.”
“으음…….”
두 사람이 고민할 때 옆에서 라이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문제가 되나?”
“네?”
“결국 놈이 완벽한 힘을 가지면 너는 그 계약에서 풀린다는 거 아니냐?”
“그렇지요.”
“그럼 놈에게 완전한 힘을 가지게 해. 그리고 그런 놈을 잡으면 되잖아.”
참으로 간단한 정리였다.
그사이 벌어질 일을 모조리 무시하면 말이다.
“언제까지 잡혀 있을 건데. 그리고 그사이 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
“난 솔직히 그 마족이라는 놈보다, 막내 네가 자아를 상실했을 때 벌일 일이 더 무섭다.”
라이너의 말에 아델리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쉽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너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완벽하게 소환해서 잡으면 되는 문제다. 계속 어중간하게 소환되었다가는 악군에게 평생의 족쇄가 될 터.
“그 마족 위력이 얼마만큼 되지?”
“본체 힘 자체도 크지만, 무엇보다 놈이 게이트와 마물들을 소환합니다. 죽은 자들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악군은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사실 게이트와 대량의 마물의 출현으로 자신이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했다.
칠 인의 좌의 조직은 물론이고, 제국을 먹을 뻔했던 것도 세계가 혼란하여 빠르게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기억에 없다지만 그렇게 게이트와 마물을 이용한 건 사실.
그때 귀신같이 아델리나가 말했다.
“마족이란…… 어찌 보면 이 세계의 신 중 하나.”
로라스가 마물 척결을 원한 것을 알고 난 후, 에펠리온 교단의 고서적을 모조리 훑었던 그녀다.
아마 모인 셋 중 마족이란 존재를 그리고 생각보다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알았다.
아델리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두두두두두.
심하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셋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직 시간이 남은 줄 알았는데.”
악군의 말에 아델리나가 급히 물었다.
“소환되고 있다는 것이냐?”
“아무래도 제가 이 왕국에 온 탓에…….”
악군은 지금 현상이 놈과 자신, 그러니까 계약자와의 공명이라는 것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소환하지요. 제대로!”
“지금 말이냐?”
라이너의 물음에 악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소환은 시작되었고, 제가 여길 또 빠져나가면 불안전하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기가 딱 이러는 건지!”
“그래. 차라리 잘됐다. 우리 셋이 여기 있는데 마물 따위 하나를 제압 못 할까!”
라이너의 힘 있는 말에 아델리나도 동의했다.
“우리 사형제가 놈을 잡아 사부에게 바치는 것도 좋겠지요. 어찌 됐든 악군이가 벌린 일이니, 수습도 우리가 해야 하니까요.”
셋은 그렇게 다시 한 번 시선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처음에는 지진이 난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진동이 멈췄기에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며칠 후, 타메라 왕국의 국경에 도착하던 날.
“이게…….”
이게 국경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피난민인 것처럼 이곳에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로라스 공작님이십니까?”
로라스와 멸마대 국경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기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타메라 왕국의 삼 수비대의 대장 아칸이라고 합니다. 미리 영접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아칸이라 자신을 밝힌 사내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양 뺨이 홀쭉해져 있었다. 마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지도 못한 것처럼 말이다.
“죄송하지만…… 공작님, 혹시 식량의 여유가 있으십니까?”
그리고 조심스레 물어 오는 말에 타메라 왕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확신했다.
‘며칠 전 지진과 연관이 된 것일까?’
로라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번천을 쳐다봤다.
귀족이며 이 지역 군부의 수장인 그가 보자마자 묻는 걸 보면, 지금 이곳 식량 사정은 최악이라고 봐야 했다.
다행히 멸마대의 물자는 충분함을 넘어, 넘침이 있었다.
북부는 이미 안정화되어 있어, 특히 락은 어느새 제국 최대 곡창 지역 중 하나. 거기에 몇 년 만의 출정이라 보급관들이 바리바리 식량을 싸 준 덕분이다.
“한 달 치를 남겨 두고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주변으로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새 다음까지 생각하게 된 번천의 말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졸지에 식량을 가지고 온 보급대 역할을 맡게 된 멸마대원들은, 현지 수비대원들과 함께 당장 굶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그사이 로라스는 아칸에 물었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인가?”
“그게…… 본국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연락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로라스는 정말 큰 사달이 났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