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6)
“사부님.”
악군의 방문에 로라스는 환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락은 언제나 바쁘게 보여서 보기가 좋습니다.”
“그렇지. 무슨 할 일이 이리 계속 생기는지, 가끔은 번잡하게 느껴질 정도야.”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지 않으셨습니까?”
“큰일이 하나 남아 있으니까. 쉐도에게는 들었다. 계속 도와줬다고.”
“별거 아닙니다. 제국 바깥의 정보 조직은 제가 더 많이 잡고 있어서, 그냥 필요하다길래 몇 가지 알려 준 것뿐입니다.”
“덕분에 단서를 잡았다고 하는구나.”
악군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놈을 찾았단 말입니까?”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가능성이 농후하긴 하다. 제국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
“어딥니까?”
“타메라 왕국이라고 아느냐? 대륙 외곽의 작은 왕국인데.”
순간 악군은 흠칫했다.
타메라 왕국.
자신이 짐작한 놈이 있는 곳. 미치광이 마법사가 지랄하고 있는 그곳.
‘어라? 이러면 곤란해지는데.’
놈을 생포하든 아니면 목이라도 잘라 선물을 할 생각인데, 이러면 말짱 꽝이지 않은가.
“놈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다고 하더구나. 그걸 생각하면 네가 예전에 말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네?”
“미치광이 마법사가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라고.”
“아! 그랬습니다.”
“네 사형이나 사저와 함께 오지 않은 건, 그 이야기를 하러 왔기 때문이 아니냐?”
악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사부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여하간 잘 왔다. 바쁘지 않으면 나와 함께 가자꾸나.”
“어디를 말입니까?”
“타메라 왕국 말이다. 처리는 내가 할 테지만, 네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안전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아…… 네.”
로라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추종하는 무리가 마법사들이라면 재미있겠구나. 마법사들을 적으로 제대로 상대한 건 드물어서 말이지.”
“귀찮긴 합니다. 마음먹고 도망치고자 하면 잡기가 상당히 까다로워지니까요.”
“너도 마법을 배웠느냐? 네 성격이라면 분명 배우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은데. 옛날에도 그런 잡기들에 능하지 않았더냐.”
“하하하. 재미있으니까요. 마법은…… 적당히 배웠습니다.”
로라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역시구나. 잡기…… 아니, 마법만큼 체계화된 학문도 드물지. 나도 배우면서 종종 네 생각을 했다. 네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지.”
악군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역시 내가 잡아 바쳐야 의미가 있는 거지.’
악군은 역시 놈을 자신이 잡아야겠다 결심했다.
“한번 볼까?”
“마법 말입니까?”
“궁금해서 말이다. 네가 어떤 마법들을 배웠는지…… 속성도 궁금하고.”
“사모께서 매지스터이신데, 제 마법이 눈에 차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네가 관심이 없었다 하면 모를까, 분명 배웠다 하면 집요하게 파고들었을 텐데. 최소 여섯 개의 원은 그릴 것 같은데?”
악군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아쉽구나. 급하지 않았으면 나와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 일은 꼭 제가 모시겠습니다, 사부님. 이번에는 반드시 제가 처리할 일이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미리 사부님을 찾아뵌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그리해야지. 널 어찌할 수 있는 자가 몇 없을 테니 걱정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늘 몸은 조심해야 한다.”
“현재 모습과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사부. 다른 이들에게는 안 그러시면서, 저희 사형제들에게는 너무 할아버지같이 보인다고 할까요?”
“하하하하. 그러냐! 너희들을 상대로는 말투를 고치기가 쉽지 않구나.”
“모습 그대로 사십시오, 사부. 지금이 옛날보다 훨씬 보기 좋으시니까요. 일이 끝나는 대로 올라오겠습니다.”
로라스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자, 악군은 옆에 있는 에르자일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다음에 뵐 때는 사모님께 꼭 어울릴 선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다음에 볼 때도 오늘처럼 강녕하시기를 바라요.”
악군은 다시 한 번 목례를 하고 떠났다.
로라스와 에르자일은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냥 배운 수준이 아니던데?”
“응?”
“당신보다 더 나아.”
마탑에서 악군과 마법을 겨뤘고, 그 자리에는 에르자일도 있었다.
“비슷하지 않았나? 난 그렇게 느꼈는데.”
“조절하던데.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도 장담 못 할 것 같아.”
의외다.
전체적인 힘을 겨룬다면 모를까, 마법만으로 에르자일도 장담 못 할 정도라면 말이다.
에르자일은 지금 일곱 개의 원을 그리는 매지스터였으니까.
“그 정도야?”
“포스 마스터지?”
그녀의 반문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뭉그러트리면 그렇지. 힘을 세분화하면 그는 최상위 계층의 마스터야.”
“대단하네. 진정한 마검사인데.”
“악군이는 옛날부터 천재였어. 그 재능을 견줄 자가 천하에 없다 할 정도로.”
“으음.”
“왜? 뭘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마법을 쓸 때 기운이…… 일반적인 기운이 아니라서.”
“녀석도 불 속성이라 하지 않았어?”
“그 차원이 아니야. 아! 뭐라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
순간 로라스는 짐작되는 게 있었다.
“혹시 흑마법 계열인지 걱정하는 거야?”
“아니라고는…… 하지만 또 그쪽 계열이라면 내가 몰라볼 리 없단 말이지. 그래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거지.”
에르자일의 염려에 로라스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뭐가 됐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흑마법을 익혔더라도 그 사실이 녀석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까.”
“어찌 그리 장담해?”
“아델리나.”
“응? 아!”
“그 잡기를 처음 배웠던 건 아델리나가 아니라 악군이야. 남자에게는, 그리고 성격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도중에 그만두었지만.”
로라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후에 아델리나가 그 공부에 능통하고 장난을 쳤을 때도, 악군이 만큼은 조금의 영향도 없었으니까.”
“그러면 다행이고.”
“가자,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당분간 에젤과 어머니 옆에 있어 드려야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으로 돌아갔다.
* * *
멸마대 중 최고만 모여 있고, 늘 로라스와 함께 하는 멸마 일대의 인원이 락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타메라 왕국.
쉐도의 보고에 로라스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 치기로 결정한 것.
가는 데만 보통 넉 달 이상은 걸릴 거리였으나 게이트를 이용, 보름 만에 제국을 벗어난 로라스와 멸마 일대가 다시 게이트를 나와 이동 중이었다.
“너희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마족이라 불리는 놈의 힘이 너무 막강하다. 개인행동은 허락지 않을 것이고, 기존의 산개 방식도 바꾼다.”
로라스는 이번 토벌전은 기존의 마물 토벌전과는 차원이 다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멸마 일대가 최정예들이라 하나, 이들 중 에르페유를 능가할 사람은 시그탑 한 사람뿐. 그나마 맞상대가 가능한 수준은 번천과 테라뿐이다.
라이너와 아델리나도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놈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귀한 인재들. 한 사람도 잃을 생각은 없었다.
‘악군이라면…….’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건 악군 정도일까.
물론 경고를 했음에도 멸마대의 분위기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화기애애한 느낌이었다.
그럴 필요가 있는가?
로라스가 직접 참여한 작전인데 말이다.
“다시 한 번 들어가겠습니다.”
“얼마든지.”
투지를 불태우는 자와 여유 있게 그걸 받아 주는 자.
저녁마다 제힘을 시험하기 위해 겨루는 자들을 보는 건 로라스의 큰 즐거움.
“이번엔 내가 나서 볼까?”
늘 지켜만 보던 오늘은 흥이 동했는지 나서서 하는 말에, 까미유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경께서 나오시면 팀의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주군께서 저희 팀에 속해 주시면 또 모를까…….”
“영주님께서 나오시면 그야말로 반칙이지.”
“테라 경과 번천 경까지 다 청팀에 모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까미유가 슬쩍 자신을 보며 하는 말에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그럴까?”
“우아아아아!”
신나 하며 다시 편을 가르는 멸마대원들.
“영광입니다, 영주님.”
“오랜만에 검을 맞대는군요.”
나름대로 뜻한 것이 있기에 까미유의 제안에 응한 로라스. 처음으로 그런 로라스를 상대하는 건, 멸마대에서 제일 강한 고수 시그탑이었다.
“선수를 양보할 필요는 없겠지요?”
로라스의 가벼운 물음에 시그탑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주는 늘 내 한계를 그어 주셨으나 오늘은 다를 것이다!’
갈망이 있었다.
그건, 제힘을 백 프로 다 발휘해 보고 싶다는 욕구.
경지에 이른 후 검을 마구 휘둘러 본 적이 없다. 정확히는 전력을 다해 본 적이 없다.
몬스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지의 어떤 기사들도 힘 조절을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전력을, 아니, 전력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해도 거뜬히 받아 줄 상대가 있다.
“후우우우우!”
시그탑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로라스가 선수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은 했으나, 최소한 자신이 전력으로 끌어올릴 타이밍은 기다려 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호흡과 함께 포스가 전신에 활성화되었다.
컨디션마저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좋았고, 가벼운 흥분에 근육에 깃든 작은 긴장감마저 자신에게 득이 될 것 같았다.
“흐아아앗!”
그렇게 기합과 함께 모든 것을 내뿜을 수 있는 그 순간, 로라스가 다가왔다.
지나치게 느린 검.
보통 이런 검을 봤을 때, 변초를 의심할 것이나 시그탑은 그런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을 했다.
이십 년 이상을 로라스를 지켜봐 온 시그탑이었다.
그 어린 시절, 처음 자신과 검을 마주했을 때조차, 로라스는 변초를 써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정직하게 움직이는 그의 검. 하지만 이상하게 타이밍을 늘 빼앗겼고, 그래서 주도권을 늘 넘겨 줬었다.
‘오늘만큼은!’
시그탑은 느리디 느린 그 검을, 반대로 빠름과 강력함으로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의지는 곧바로 그의 검에 나타났다.
부우우우우웅!
시그탑의 검은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강렬하게 로라스의 검을 마주했다.
카아아앙! 카아아앙!
그리고 신나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해 마음껏 휘두른다는 건 하나의 쾌감이 되었고, 그 쾌감은 곧 시그탑을 무아지경으로 이끌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터어어어엉!
어느 순간 두 검은 순간 자석이 달라붙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서로의 몸을 비벼 대기 시작했다.
찌이잉! 찌이잉!
검은 어느새 음音이 아닌 곡哭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한 것인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검. 전력을 다해도 조금의 미동도 없는 검.
그렇다고 자신이 변화를 일으키자니, 조금의 힘이라도 빼는 순간 그 느릿하던 로라스의 검이 해일처럼 몰려올 거라는 두려움에 감히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게 아닌데?’
시그탑이 의문을 품는 순간 자신의 검을 막고 있던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힘에 적당히 맞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시그탑은 순간 멍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시그탑은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아지경을 맛본 후, 완전 반대로 엄청난 압력, 갑갑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래서였다.
“훌륭합니다, 시그탑 경.”
로라스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던 이유 말이다.
로라스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뒤로 슬쩍 물러났으며, 모인 이들 역시 입을 다물었다.
뭔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는 아는 것이다. 멸마대에서 가장 강한 시그탑이 또 한 번 경지가 올랐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모두의 시선에서는 부러움이 묻어났다.
‘나도!’
그리고 그 시선은 로라스를 향하며 열망으로 바뀌었다.
그들도 시그탑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어느새 정신을 차린 시그탑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리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르릉!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은 점점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