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95화 (295/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5)

린델이 말했다.

“대승입니다.”

근래 계속하는 말이긴 하나, 보고는 거짓이 없어야 했고 실제로 대승이었다.

무혈입성.

이보다 대승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로라스는 상황판의 지도를 쳐다봤다.

무척이나 넓어진 전선.

단 일 년 만에 전선이 두 배 이상 길어진 상황이다.

파죽지세로 성을 함락시키고, 영토를 넓혀 가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

“이제 어디 남았지?”

로라스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으나, 굳이 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국의 침략에 연합한 곳의 세력들은 지도에서 극히 미미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진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저항이 무의미할 정도로 세가 기울어졌으니 곧 항복 의사를 밝혀 올 것입니다.”

린델의 대답에 로라스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먼저 항복하면 책임을 묻기 곤란해지지 않을까?”

일 년이나 지났지만 로라스의 분노가 풀리지 않음에, 린델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량을 보여 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궁지에 몰려 결사 항전이라도 주장하면, 죄 없는 병사들이 더 죽지 않겠습니까?”

“…….”

“한 달만, 딱 그 시간만 다시 주십시오. 제가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린델이 재차 하는 말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야.”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빠르게 마무리하겠습니다.”

로라스는 다시 상황판을 쳐다봤다.

‘으음!’

린델의 말대로 정리해야 할 놈들은 대충 정리한 상황이다. 당연히 그다음 문제를 생각할 때였다.

‘기왕 대규모로 군세를 일으켰는데…….’

고민이 되었다.

영지 병력을 해산시키느냐, 아니면 이 군세와 함께 그대로 마물토벌전으로 넘어갈 것이냐를 말이다.

전자는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다. 길게는 이 년 가깝게 전선에 나온 병사들도 있을 터.

확고한 사명감을 심어 줬으니 향수병 같은 걸로 고생하지는 않겠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후자는 다 좋은데 효율성이 너무 떨어진다.

일반병들은 게이트 외의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겠으나 게이트 내부 토벌은 일정 수준 이상의 병력으로, 맞춤 훈련이 필요했다.

‘양쪽에서 적절한 선을 찾는 게 좋으려나.’

로라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린델을 불렀다.

“린델, 군단장들을 호출해야겠다. 일 년 이상 전선에 있던 병사와 간부들. 또 일 년이 넘지 않았지만, 일정 수준 미만의 병력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 말에 린델은 로라스의 다음 행보를 예측했다. 그래서 의견을 제시했다.

“몬스터를 염두에 두신 거라면 차라리 최정예 부대들만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실력 있다고 더 부려 먹는 꼴이지. 열심히, 싸우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누가 열심히 잘 하려고 할까?”

“그건 그렇지만…….”

“우리만 생각해서, 병사들의 희생을 강요하지는 마. 그 정도로 급한 일도 아니니.”

“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야. 네가 말한 방법이 가장 피해가 적은 건 사실이니까.”

로라스 역시 잘 싸우고, 가장 피해가 적을 정예병들과 함께 움직이는 게 좋다는 건 안다. 다만 형평성의 문제라 선을 확실하게 그은 것뿐.

“이러는 건 어떨까?”

“말씀하십시오.”

“지원병만 남기는 방식으로. 대신 지급하는 월봉을 두 배로 늘리는 건?”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으나, 린델은 단번에 로라스의 의견을 부정했다.

“안 됩니다. 정규병들에게 그런 식으로 특혜를 주시면, 선례가 남습니다.”

“상을 미리 내리는 것뿐이다.”

“그럼 그대로 논공행상을 걸쳐 따로 위로금을 지급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으음…….”

“이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줬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그리 발표하시면, 그들은 용병 취급을 받게 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 그렇군.”

남들보다 더 복무해야 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싶어 제안한 거지만, 린델의 말대로 그런 조건을 걸면 지원병으로 토벌대를 꾸리자는 의미가 퇴색된다.

듣고만 있던 번천이 입을 열었다.

“주군의 뜻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제 할 일을 다할 것입니다.”

“그래. 내가 실수했다.”

로라스는 그렇게 자신의 말실수를 깔끔하게 인정했다.

“군 체계를 다시 정비하면 그때 다시 움직이겠다. 그리고 번천, 멸마대를 집합시켜.”

“네, 주군.”

* * *

오백여 명의 멸마대의 숫자는 어느새 이천여 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인간들의 전쟁이 끝나면서 몬스터를 대비할 여유가 생겼을뿐더러 그 뜻에 호응하고자 하는 실력자들이 대거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락을 중심으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나라별로 멸마대가 구성되고, 유기적으로 협력하게 된 건 분명 큰 성과.

물론 이천여 명이라는 숫자는 수많은 몬스터에 비하면 여전히 적긴 했다.

하지만 멸마대와 몬스터 토벌대는 별개였다.

멸마대의 주 임무는 토벌대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 몬스터들과 게이트를 처리하는 것.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사제들까지 완벽하게 구성된 멸마대의 활약은 분명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나 이제 멸마 일대라 불리는 락의 멸마대의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포스 마스터가 일곱에 매지스터가 셋, 고위 사제들이 스물이나 포함된 멸마 일대는 그 어떤 게이트도 처리하는 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는 놀라운 위용을 보였다.

그래도 마물의 숫자는 여전히 엄청났으나,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희망.

그렇게 다시 시간은 흘러갔다.

* * *

…….

하나의 발이 움직이고, 또 하나의 발이 움직였다.

…….

미친년 머리카락 휘날리듯 양팔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면에는 수많은 원이 그려지기 시작했음에도 그 어떤 소리도 들리는 건 없었다.

“하아아아!”

그리고 긴 호흡 소리와 함께 움직임이 멈췄다.

‘놈이 어떤 놈이든 간에.’

대기의 잔잔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그걸 깨닫고는 그마저도 죽이기 시작했다.

‘민감해할 필요는 없다.’

놈이 얼마나 강해져서 나오든 간에, 잡는 건 문제없을 것이다. 아니 문제없다.

‘잡아서 찢어 죽여 복수를 하면 그뿐.’

절대 잊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염려와 더불어 에르페유가 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찌 됐든 자신에겐 스승이 되는 이.

누군가는 그의 죽음이 허무하다 할지 모른다.

에르페유는 권신이라 불리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적어도 하나의 기준점은 잡아 줬다.

놈을 잡으려면 최소 권신의 수준엔 올라야 한다는 것. 그 정도는 돼야 놈과 치고받고 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방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수많은 기인이사들을 감안하고도, 권신 에르페유는 대륙에서 서른 손가락 안에 들었던 고수.

‘결국 나밖에 없지 않은가?’

아니, 이제는 사정이 좀 달라지긴 했다.

라이너는 각성이 늦어 예전 무공을 찾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이나, 아델리나나 악군은 달랐다. 특히 악군은 예전 천왕성 시절의 무공을 능가하도고 남음이 있었다.

왜 아니겠나?

유역후 말득의 심년을 유역후보다 더 이해하여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악군이었고,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는데.

어쩌면 자신과도 능히 맞수를 이룰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라스는 그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정말 제자들이 자신보다 강해지더라도, 놈이 위험한 존재, 아니, 제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준이 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제는…….’

놈이 재출현할 때 게이트가 생성된다.

기존의 게이트가 남아 있는 상태라면 분명 그건 큰 위협이 되겠으나, 이제는 그것도 정리가 돼 가는 상황이다.

‘시간은 우리 편.’

이제 남은 건 오로지 스스로의 무력.

모든 토벌에 참여하지 않고, 홀로 관조의 시간을 보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하지만 더 이상의 시간은 내겐 무의미하니.’

이런 수련의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가련다!’

로라스는 손바닥을 뒤집어 어깨 높이로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쓸 듯 휘저었다.

가벼운 미풍이 불었고, 순간 그가 만들어 낸 모든 원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꽁꽁 숨어 있거라. 그래야 내 의지가 더 타오르지 않겠느냐.’

* * *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고 있지만, 조금 더 속도를 내 줬으면 좋겠다.

아주 나직한 목소리. 굳이 탓하려 부르지도 않은 것 같지만, 쉐도는 얼굴도 들지 못할 정도로 안면이 붉어졌다.

그 어떤 일이든 일 년이면 될 거라 호언장담한 게 자신이었다. 하지만 ‘놈’에 대해서 알아낸 건 하나도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스카이 캐슬이란 자에게 정보를 받았다.

지상 최대 정보 조직의 수장이라는 자부심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조직보다도 많은 재정, 인력 지원을 받고 있는데 결과물이 없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이럴 땐 어찌해야 합니까?’

쉐도는 이를 악물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수많은 정보는 여전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으나, 단서를 조합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에 뜨인 게 하나 있었다.

그건 하나의 실종사건이었다.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타메라 왕국, 빛의 신전의 사제 하나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시체가 발견됐다고 했다.

발견된 장소는 강 하구인데 이상하게 삐쩍 메말라 있어 사람들이 신기해한다는 것.

보통 강 하구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퉁퉁 불어야 하는데 메말라 있었다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쉐도가 원하는 정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들을 받은 게 생각났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실종자가 모두 교단의 사제들이라는 것과 하나같이 시체가 비쩍 말라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찾고, 사건이 벌어진 위치를 살폈다.

‘연쇄살인마…… 이런 게 아니라면!’

그녀는 다시 얻은 정보들을 취합하여 이런 류의 시체를 남기는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기어코 하나의 존재를 찾는 데 성공했다.

말토덱트린.

마족의 환생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말이다.

근 이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몬스터라, 이제는 책에서나 그 존재를 찾을 수 존재.

그녀는 수하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근 이십 년 동안의 보고서를 모조리 훑기 시작했다.

백일흔두 건의 보고서를 찾아내었고, 그 모든 실종 장소가 타메라 왕국의 근처라는 걸 확인한 쉐도는 곧바로 달려갔다.

드디어 보고할 수 있는 게 생긴 것이다.

* * *

“흐아암.”

악군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늘따라 유독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칠 인의 좌를 전설 속의 이야기만으로 남게 한 이후로는 지루함은 더 심해졌다.

‘이게 자랑할 거리도 아니고.’

칠 인의 좌의 모든 것을 흡수했다.

덕분에 악군은 개인적으로 대륙 최고의 갑부가 되었고, 대륙 최고의 전투 집단 중 몇 개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정보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사부께서는 걱정을 하시지만.’

사실 사부가 찾는 존재는 반년 전에 제대로 된 단서를 잡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이 일마저 끝내면,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사부가 원하는 건 다 갖다 드리고 싶지만…….’

사부는 이 일을 끝내면 또 잠적에 가까운 생활을 할 확률이 농후했다.

‘세계 통일 같은 걸 원하시면 훨씬 좋았을 텐데. 십 년 정도는 신나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보고 하지 않았다.

‘단서는 단서일 뿐이잖아.’

혹시 나중에 알려져도, 변명할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사실을 계속 숨길 생각은 없었다.

―잊고 있나 본데, 사부의 연세가 이제 백이 넘으셨다.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불안감은 있었으니까.

‘그래. 차라리 내가 놈을 잡자. 난 지루하지 않아 괜찮고, 사부께서는 잡아야 할 놈 잡아서 좋고, 일석이조잖아.’

악군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사부를 만나 볼 요량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