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3)
“으아아악!”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엄마!”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가 울부짖었고.
“도망쳐!”
천금 같은 자신의 아이의 손을 놓친 게 아니라 놓고, 그리 소리치는 여인.
그 뒤로는 새의 머리에 사람의 신체, 맹수의 발을 지닌 짐승이 흉악한 발톱을 하늘 높게 쳐들고 있었다.
그렇게 짐승의 발은 곧게 여인을 향해 내려쳐졌다.
쌔애애애애애앵!
하지만 그 발은 여인에게 접근하기 전에, 파공음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온 볼트에 중앙이 꿰뚫렸다.
“다 조져!”
노성과 함께, 일반적인 짐승이라 볼 수 없는 그 흉악한 것들을 향해 한 무리의 기병대가 달려들었다.
크허허허헉!
그리고 기병대의 습격을 받은 짐승 같은 몬스터들은 기병대의 말발굽과 창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한 놈도 남기지 마랏!”
천둥 같은 외침과 함께, 가장 많은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곳 그리고 그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가장 큰 개체에 한 기사가 달려들었다.
“하아앗!”
말 위에서 몸을 던지듯 내린 그는,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그대로 몸을 날렸다.
휘이이이이잉!
그리고 검을 수평으로 세워 그대로 휘둘렀다.
사르르르르르.
대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백염이 피어올랐고, 그 사정거리에 닿은 몬스터들은 그대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
황소 두 마리는 합쳐 놓은 듯한 덩치의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으나, 그 어떤 놈도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찌르고, 베고, 쳐 내고, 사내는 순식간에 몬스터들의 우두머리에게 접근했다.
커다랗고 높은 지붕을 지닌 건물에 준하는 덩치의 몬스터.
크르르르르르!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몬스터는 역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부우우우우우웅.
그리고 장정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무겁고 길어 보이는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집채만 한 몬스터가 커다란 도끼를 하늘에 치켜들며 일식인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를 사내의 주변에 잔뜩 드리웠다.
누가 이런 걸 경험이나 해 봤을까?
상상에서나 가능한 그 장면은 정말 비현실적이었으나, 그것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사내의 대응은 그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그래 봤자 닭 대가리 새끼가!”
자신을 향해 벼락처럼 내려 떨어지는 거대한 철 날에 대한 감상.
사내는 거대한 도끼에 비하면 이쑤시개 같은 느낌의 자신의 검으로 아래서 위로 올려 쳤다.
참으로 무모한 대응 방법이 아닌가?
하지만 말이다. 분명 망치가 못을 내려치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타아아아앙.
이쑤시개는 부러지지 않았으며, 못은 대지 위로 박혀 들어가지 않았다.
쿠아아아아!
몬스터는 분노의 음성과 함께, 그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민첩성을 보이며 그대로 계속 내리쳤다.
타아아앙! 타아아앙! 타아아앙!
하지만 사내는 태양을 가릴 양산이라도 든 것처럼, 검을 올린 손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제 죽을 걸 알고 발악을 하는구나.”
사내는 다시 한 번 떨어지는 도끼를 막았고,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샤르르르릉!
도끼의 검면에 백염이 튀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탁! 탁! 탁!
사내는 그 도끼를 발판 삼아 그대로 몬스터의 머리를 향해 올라갔는데, 사내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단 세 발자국이면 충분했다.
푸우욱!
마른 땅에 삽을 한 번 내리박는 것처럼, 사내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검을 몬스터의 이마에 박아 넣었다.
화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검의 백염이 맹렬하게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박힌 도끼를 잡은 그 자세 그대로, 몬스터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했다. 그리고 숨 한 번 쉬는 순간, 그대로 넘어갔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몬스터가 쓰러졌고, 그 전에 가볍게 지면에 몸을 날린 사내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아직 남은 수많은 몬스터들. 그는 눈에 보이는 족족 그것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그 모든 걸 완수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는 너무도 컸다.
한때 블랑드 지방에서 인구 일 천이 넘어갈 정도의 커다란 마을이었던 이곳은 이미 지옥이었다.
“이 찢어 죽일 새끼들!”
사내는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의 대상은 자신과 자신의 부대가 죽인 몬스터를 향해 있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땅따먹기를 아직도 멈추지 않는다는 거지!”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는 건 말이다. 하지만 보고로 듣는 것과 현실로 보는 것은 엄청난 인지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리고 그 화는 이 지역의 영주, 이 나라의 군주를 넘어 자신에게까지 향했다.
굳이 일을 크게 만들어, 현재의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잃고 싶지 않았던 스스로를 탓하고 싶었다.
“번천!”
“네, 주군.”
“대영주 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황궁에 사신을 보내. 이 빌어먹을 새끼들을 모조리 갈아 치워야겠다.”
로라스는 다시 뜻을 세웠다.
* * *
오베른 제국의 내전이 끝난 지도 십 년.
원래 대륙 최강의 세를 자랑했던 오베른 제국은, 이제는 대륙 그 어떤 곳보다 더한 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나 에렌을 중심으로 한 제국의 북부는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 다섯 개의 왕국과 전면전을 벌여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뤘고, 엄청나게 군대의 힘을 늘렸으면, 민심이 안 좋아질 만한데도 에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백성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들끓는 몬스터들은 그들에게 강 건너 불구경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일자리는 넘쳐 의지만 있으면 배 곯을 일 따위는 없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제국이 다시 한 번 황금기를 맞이했을 때, 다른 왕국들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수많은 게이트의 출현을 너무 수수방관한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군대도 동원하고, 마정석을 노리는 용병들과 모험가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숨겨진 인물들까지 몬스터들을 제거하는 데 힘썼다.
그런데 말이다.
그 정도의 능력이 되지 못한 나라들이 있었다.
원래 선군이 있으면 폭군이 있고 현군이 있으면 우군도 있듯이, 몬스터, 치안, 그런 것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어이없는 왕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나라가 무너지면서, 주변의 나라들이 그 나라를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몬스터들을 향해야 할 군대는 타국을 향했으며, 용병들은 그곳에 고용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먹잇감을 탐한 다른 나라와 충돌이 벌어지니, 대륙은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물론 뜻 있는 군주들도 있기에, 자국의 치안에 계속 힘쓰는 것은 물론, 타국들의 전쟁을 중재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군주들에게는 막강한 힘이 없었다.
오로지 단 한 명.
에렌의 영주이자, 새로운 초월자인 로라스 공작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 * *
대영주 회의.
단 한 명도 불참하지 말란 명령이 있었고, 그간 대영주급의 귀족들이 많이 늘어난 상태였기에, 그 어떤 회의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도착한 귀족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미래를 설계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데 에렌 성에서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좀 바뀔 거라 생각했다.”
“…….”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그럴 거라 생각했다.”
“…….”
“하지만 아니더군.”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굳이 그걸 표현하지 않아도 말 몇 마디만으로 그 분노가 고스란히 사람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경 시찰 중 타국의 마을 하나를 구한 이후로, 로라스는 북부의 모든 대영주들과 군단장들을 모조리 소집했다.
예외는 없었다.
그만큼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로라스는 옆자리에 있는 린델에게 물었다.
“황궁의 답은?”
“에렌이 움직이는 대로 같이 보조를 맞추겠다 하였습니다.”
“전력은 되겠지?”
“옛날과는 다릅니다.”
하긴, 다를 것이다.
내전 시 남부의 영주 자리가 상당수 교체됐고, 그들이 바로 여기 모인 북부의 대영주들이기 때문이다.
북부의 영지 그리고 남부의 영지 두 곳을 안정화시키는 초반 오 년 정도는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지만, 다시 오 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이제 모든 것이 폭발할 시기다.
그건 로라스가 무엇을 하든 뒷받침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대영주들 중에도 그것에 불만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절대권력을 가짐에도 평상시 로라스의 언행은 정도에 어긋남이 없었던데다, 이 중 몇몇은 원래 몬스터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이고, 또 몇몇은 이미 참상을 겪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린델.”
“네, 주군.”
“선전포고문을 준비해야겠다.”
“생각하신 것을 말씀해 주시면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로라스는 미리 생각이라도 했던 듯, 바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반년의 유예기간을 주겠다는 것. 인간의 전쟁을 멈추고 몬스터를 토벌하지 않는다면!”
“…….”
“우리가 몬스터를 토벌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토벌한 지역은 앞으로 영구적으로 에렌의 영지가 될 거라는 것을 명확히 해.”
“네. 그리 포고문을 준비하겠습니다.”
로라스는 검지손가락을 쳐들며 말했다.
“또 하나.”
“말씀하십시오.”
“이건 개인과 집단, 국가 모두에 해당한다. 내 땅의 모든 국경을 개방한다.”
로라스의 뜻밖의 말에, 린델은 물론이고 대영주들도 살짝 당황했다.
“주군, 그 말씀은…….”
“대항하고 싶어도 대항할 수 없는, 힘이 없는 곳이 있을 터. 길을 열어 주어 피난의 희망이라도 심어 줘야 하지 않겠나?”
뜻은 좋지만 린델을 비롯한 실제 행정을 담당해야 하는 대영주에게는 기겁할 만한 일이다.
지금도 군인의 눈을 피해 제국, 특히 북부 영지로 몰려드는 피난민과 불법체국자들이 많았다.
애초에 그런 문제 때문에 로라스가 국경 시찰을 나갔다 온 것이기도 했다.
“무턱대고 길을 열어 주다가 저희 쪽에서 혼란이 옵니다.”
“지금은 안정화 되어 있지만, 대규모 이주민이 넘어오면 기존의 원주민들과 충돌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문화도 많이 다릅니다. 종교 역시 다르다 보니 충돌이 일어나면 거세질 확률이 높습니다.”
린델을 비롯한 대영주들이 부정적 의견을 보이자, 로라스는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과 시늉을 하면서도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 매우 처참하게, 그리고 많이, 그것도 마물에게…….”
띄엄띄엄, 하지만 의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화법에 사람들은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로라스는 그런 이들에게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그렇게 일을 미루지 않았는가?
“물론 무작정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다시 로라스를 쳐다봤고, 그는 다시 말했다.
“융화되지 못하는 놈. 저만, 제 집단의 문화만 고집하는 곳은 쳐낸다. 노약자들은 제외하겠으나, 젊은 놈들 중 몬스터들과 싸우지 못하는 놈들은 쳐낼 것이다.”
“…….”
“살고자 하는,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이만 받아들이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강력하게 쳐낸다. 린델.”
“네, 주군.”
“대영주들과 그와 관련된 법을 만들어라. 가장 시급하게 다뤄야 할 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로라스가 무작정 고집을 부리지 않고, 피난민, 이주민에 대한 재량권을 대영주들에게 준 것이나 다름없기에, 더 이상 큰 반대는 없었다.
“나키아.”
일군단장 나키아가 앞으로 나섰다.
“전 군단은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 적은 몬스터와 그것을 보고만 있는 위정자들이다. 그것을 병사들에게도 명확히 할 수 있도록.”
“명령 받듭니다.”
그렇게 대영주 회의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