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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92화 (292/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2)

자신의 사형과 사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악군은 아델리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델리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사저가 역시 현명하십니다. 글 한 줄만 쓰면 되는 것을, 우둔한 이 사제는 그리 힘들게 찾으려 했네요.”

“우리 교단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도 이 일을 실행하기 전에 먼저 교단의 실권을 잡아야 했고.”

악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라이너가 말했다.

“난 돌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사부 곁을 지켜 드리기가 힘들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내가 있는 곳에서도 할 일이 있다고 하시니.”

“나야 교단의 본부가 에렌에 있으나, 지금은 외부에서 지원하는 게 더 필요한 상황이라.”

아델리나의 말에 악군이 말했다.

“사저가 사부님 신격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요.”

“결국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야 통치가 편해지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규모가 그 수준이 아니던데요. 저 세계에서 하지 못한 것을 이 세계에서 완수하실 생각입니까?”

중원에서 천왕성이 무림일통을 했을 때. 유역후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 다음 단계를 준비했었다.

그건 무림일통을 넘어선 천하일통. 당시 왕조를 엎어 버리고 황제로까지 추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지요. 그때, 거기서 못했던 것. 지금, 여기서 하는 겁니다.”

악군은 어느새 흥분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부가 이미 제국의 실세이고, 사저와 사형이 있는 이상 대륙을 통일을 하는데…… 으음, 보자.”

“…….”

“이십 년 안으로는 가능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일단은 주변 왕국부터 정리하고.”

한창 혼자 신나게 이야기하는 악군을 보며, 아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아까 듣지 못했어?”

“뭘 말입니까, 사저?”

“사부님의 뜻은 거기에 계시지 않아. 마물 퇴치가 최우선이시다. 그리고 그걸 이루면 아마도 락과 에렌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으실 거야.”

“왜요? 오히려 마물이 창궐하는 지금이 주변국들을 흡수할 수 있는 절호의…….”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던 악군은 순간 말끝을 흐렸다. 지금 자신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본 라이너가 입을 열었다.

“너의 뜻이, 우리의 뜻이 사부님의 뜻은 아니지.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자꾸나, 악군아.”

“…….”

“그때도 천하일통 대신 적당히 터를 잡고 전쟁을 멈췄다면 사부가 그렇게 주화입마에 들지 않으셨을 테고, 그러면 지금 많이 바뀌어 있지 않았을까?”

“대사형 말씀이 맞습니다. 마물이라…….”

“역시 넌 아는 게 있구나?”

“확실치 않습니다. 단지 몇 미치광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정도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알겠구나.”

아델리나가 툭 던지듯 하는 말에 악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게이트나 마물의 문제는 제가 신경 쓸 가치가 없었으나, 이제는…….”

악군의 두 눈이 빛났다.

철저하게 알게 될 것이다. 알아야 철저하게 박살 낼 것이니 말이다.

* * *

“쿠오오오오오!”

힘찬 오크들의 함성.

“나, 여기! 피 흘리는 땅에 내 두 발을 박아 두고 있으니!”

그리고 힘차게 울려 퍼지는 그들의 노래 같은 구호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전의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 같았다.

‘엄청 늘었군.’

락에서 식량의 상당 부분을 지원받고, 또 주변에 강력한 적이 없다 보니, 천년나무 오크 일족의 전사들의 숫자는 배 이상 늘어난 듯 보였다.

“어때, 멋지지?”

어느새 샤이한이 다가와 하는 말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을 간질이는 그런 게 있네.”

“요새는 전투가 드무니, 옛날 조상들의 노래를 갈고 닦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 예전보다 더 강력한 느낌인 거 같지 않아?”

“강력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것 같은데. 내 포스가 절로 반응하는 걸 보니 말이야.”

샤이한이 슬쩍 로라스를 보며 말했다.

“포스가…… 한판 붙자.”

“말이 왜 갑자기 그리로 튀나?”

“작년에 산 지렁이 한 마리를 잡은 후로 긴장감이 들지 않는다고.”

“산 지렁이?”

“드리프 경이 마운틴 드래곤이라 부르더군. 내 눈에는 커다란 산 지렁이일 뿐이었지만.”

로라스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몬스터 도감이라는 책에서 읽어 본 적이 있다. 드래곤의 아류종이라지만 도감에서 무조건 피해야 할 마물로 분류된 종.

“쉽지 않은 놈이었을 텐데.”

“그러니까. 그놈마저 때려잡은 뒤로는 긴장감이 없어. 이제 이곳에는 고만고만한 놈들밖에 없으니까.”

샤이한은 그리 말한 후, 저 멀리 북쪽 산맥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경계선을 넘으면 또 어떤 무시무시한 놈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우리 구역에서는 말이야.”

“너희 일족으로 인해 락은 안심할 수 있지.”

“그러니까 한판 하자. 너 엄청 강해진 것 같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로라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가늠할 수 없으면 싸우지 않는 게 상책이지. 그리고…… 지금의 평화는 잠깐일 거야.”

“응?”

“본 적 없는 강력한 몬스터들로 구성된 웨이브가 있을지도 모른다. 길지 않은 시간 내로 말이지.”

편안하게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내용은 편안할 수 없었기에 샤이한은 귀를 곤두세우며 듣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면…….”

로라스가 놈의 재출현에 있을 혼란에 대해 말하며, 그의 경각심을 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저곳에서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 쏟아져 내릴지도 몰라. 그때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지 예측도 할 수 없을 정도다.”

“크으으으응!”

샤이한은 깊은 콧바람을 뿜어내고는 말했다.

“그래 봤자 몬스터지. 예전에도 그랬지만 나중에도 우리는 우리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 뿐이다.”

“당연하지. 준비하고 있으면 뭐가 두려울까? 천년나무와 우리 락이 말이지.”

로라스는 샤이한과 그렇게 대화를 하며 생각했다.

‘어느 쪽으로 출현하던 이들이 있는 이상, 손 놓고 당하지만은 않겠지.’

샤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야지. 게다가 우리도 이제 큰 어르신이 생겼으니, 걱정하지 않아.”

“큰 어르신? 내가 모르는 새, 새로운 일족이 합류했는가?”

“너도 알 거야. 그도 인간이니까.”

로라스가 누군지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군, 락의 작은 영주.”

“프라일 님!”

천년나무 일족의 큰 어르신. 그는 바로 프라일이었다.

* * *

근질근질거렸다.

‘어디까지일까?’

예전에는 아직 개천지보의 완전함을 얻지 못하여,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당시 할아버지와도 견줄 만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실제로 할아버지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이 세계에 반노환동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지.’

프라일은 이십 년 전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말했던 그와도 다를 게 없었다.

―최소 이백 년 전부터 메타린 평야에 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

맞다.

이제는 내 또래로 보이는 프라일은 최소 이백 살이 넘었다.

아무리 관리를 잘했어도 인간이 그 정도로 살 수 있는가?

“예전과는 기운이 너무 달라서 몰라볼 정도네. 너는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야.”

그에 비하면 오히려 내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은데 말이다.

“이야기가 깁니다. 프라일 님처럼 말입니다.”

“대충 짐작 가는 건 있긴 해. 신탁의 기사? 그런 소문을 듣긴 들었어.”

“그렇게도 불린다고 들었지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일 뿐입니다.”

“그래도 일리는 있는 것 같지. 신이 내린 기사가 아니면…….”

프라일은 말을 잇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건가? 네 원래의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궁금하네.”

“…….”

“아니야, 넘어온 거?”

가슴이 철렁할 이유는 없는데, 순간 뭔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맞나 보군. 긴가민가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런데 지금 보니 확연하게 알 것 같다. 게이트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그 기운을 기氣라 부른다지?”

“내력이라고도 부르지요. 프라일 님, 혹시 저 말고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까?”

프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었다. 아주 옛날이긴 하지만.”

“옛날이라면…….”

“한 삼백 년 전쯤? 최초의 붕괴 때 보았지. 그 이후로는 연이 닿지 않았는지 보지 못했고.”

이백 살이 아닌 삼백 살이 넘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넘어왔다는 사람이 어떤 이인지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번 건 내 이야기가 길어져. 최초의 붕괴, 봉인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니까.”

“지금 상황이 옛날에도 있었다는 뜻입니까?”

“붕괴가 된 건 같은데, 사실 옛날에 비하면 이 붕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는…….”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간의 오만과 그에 따른 심판.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뻔했던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 번 찾아온 세계 멸망에 대해서까지.

프라일이 이야기한 건 말 그대로 이 세계의 역사일 뿐이었으나, 그 역사는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세계가 멸망할 뻔한 역사.

하지만 그 역사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 치부하기에는 힘들었다.

저쪽 세계에서도 대홍수에 관한 설화는 있었고, 그가 말한 역사와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옛 역사가 일부 다시 현실화 된 것도 사실.

“이계의 종. 악마, 어쩌면 천사라 불리는 신의 사자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의 출현은, 옛날 봉인되었던 것들의 불길함을 흔들었다. 그 여파로 게이트가 순식간에 곳곳에서 출현하게 된 거고.”

프라일은 이야기를 끝내며 정리했다.

“옛날에는 그런 존재가 일곱이나 되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하나일 뿐이라는 거지.”

그 하나가 바로 할아버지가 그토록 염려했던 놈일 것이다.

“혹시 위치를 파악하고 계시는 겁니까?”

“출현했다는 건 평야에 생겨났던 게이트로 알 수 있었는데, 놈의 실체까지는 잘 모르지. 그리고 난 하늘 산맥과 메타린 평야를 벗어나지 않아.”

“…….”

“그래서 고민했는데 큰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를 본 이후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지키던 자들이 많이 사라져서 염려스러웠는데, 희망이 보이는군.”

왜 하늘 산맥과 메타린 평야를 벗어나지 않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이만한 사람이 그런 말을 했을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까.

다만…….

“놈이 하늘 산맥 쪽에서 나타나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적으니.”

그가 할아버지가 놓쳤던 그 존재보다 강하다는 것쯤은 예측할 수 있었다.

“여기 샤이한과 내가 있으니 이쪽은 걱정할 필요 없다. 여긴 내 영역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영역에 집착한다는 것도 알았고 말이다.

“그래도 큰 걱정 하나는 덜 수 있겠군요. 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사실이다.

내 가족이 있는 땅. 그것만 걱정하지 않아도 벌써부터 큰 시름 하나를 던 느낌이다.

“락은 평야를 침범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약속을 지켜 줬으니까.”

“어찌 됐든 든든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놈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일, 네 일이 아닌 모두의 일이니. 또한 나도 믿을 만한 인간이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프라일은 마지막 한마디를 더 남기고 산을 내려갔다.

“때가 되면 우리 평야의 가족들이 불안에 떨 거야. 그때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그는 평야의 모든 짐승들의 수장이며, 가족이라 들었다. 미리 알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제거할 수 있다면 제거하겠지만.’

아직 제국 바깥 나라들의 다툼이 여전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찌해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내가 고민하는 건 이제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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