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1)
“탑이 더 커졌네.”
에르자일의 마탑은 예전의 마탑이 아니었다.
에렌의 영광찬란한 마탑에 비하면 아직은 초라한 수준이었으나, 다른 마탑의 규모에 비해서는 작지 않다. 특히나 초기의 마탑에 비하면 엄청나게 커져 있었고, 곳곳에 박힌 마나석도 그 크기가 달랐다.
에르자일이 로라스와 함께 마탑의 꼭대기를 보며 대답했다.
“아버님이 엄청 신경 써 주시거든. 영지 예산의 삼 할은 내가 다 썼을걸.”
로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은 아무리 갖다 드려도 더 달라 하시던데?”
“규모가 달라. 실제로 스승님의 마탑 정도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고,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시간과 돈이 필요하니까.”
모르는 건 아니다.
사군단에 지원한 마법사들에게 연구 보장 약속까지 해 줬으니 많이 필요할 터다. 게다가…….
“게이트만 활용할 수 있다면 모든 걸 보상받고도 남음이 있지.”
“사실 그게 제일 궁금했던 거지? 나보다 더.”
“그럴 리가. 난 내 안사람이 최우선인데.”
“이런 걸 열흘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먹히는 말이라고 하는구나.”
에르자일은 마치 탓하듯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그렇게 마탑으로 들어간 로라스는 게이트 연구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제국 내의 게이트는 세 개만이 활용 가능해.”
“고작 세 개?”
“처음에는 계속 유지될 줄 알았는데, 게이트 내 몬스터들을 토벌하면서 그 힘을 잃더라고.”
“이동을 하기 위해 몬스터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일단은. 마나원이 아무래도 몬스터들에게서 나오는 것 같으니까.”
로라스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손쉽게 이용할 수는 없는 건가?”
“위치를 생각하면 엄청난 메리트가 있는 걸로 만족해야지.”
“그럼 확보된 세 개의 게이트가……?”
“락과 에렌 동쪽 국경 지역 하나. 그리고 수도에서 남부 쪽으로 하나.”
“중앙이 없는 것이 아깝군. 그러면 활용하기 더 좋았을 텐데.”
“그보다는 이 게이트들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마물들을 관리하는 것부터 신경 쓰는 게 좋아.”
에르자일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말했다.
“다른 곳에 있는 건 어떡할 생각이야?”
“외국?”
“응. 외국은 게이트 내의 마물조차 정리하지 못한 곳이 많으니, 잘만 활용하면 촘촘하게 이동망을 짤 수 있을 것 같은데?”
로라스는 잠시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경고했던 놈. 그놈이 깨어나면 게이트가 다시 활성화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제국을 제외하면 서로 간의 이득때문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의 것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게이트?’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굳이 아쉬운 소리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책임은 북부. 조금 더 나아가면 제국까지다. 내 사람들을 희생해 가면서 다른 나라 사람을 구한다?
그 정도의 성인은 아닌 것이다.
다만 사군단과 멸마대가 활용할 수 있게, 연구에는 협조가 필요하다.
‘죄다 쳐 낼까? 시범적으로 몇몇 작은 나라를 작살 내면?’
로라스는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 수습한 지가 얼마 되었다고. 지금 자신은 행복하지 않은가?
또 일을 벌이다가는 간신히 얻은 이 평안이 금세 사라질 것이다.
우리 일과 그들의 일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거지.’
생각해 보면 먼저 나설 필요는 없다. 지금이야 자기들 잇속을 차리기 위해 바쁠 테지만, 제 놈들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뭔가 달라질 터.
분명 그리 생각은 되지만 말이다.
자꾸 갈팡질팡하는 건, 힘없는 자들. 아무 정보도 없이 무지하게 마물에 당할 사람들 때문이다.
‘지금의 평화를 크게 깨지 않고,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로라스는 고민했다.
* * *
“언제까지 이리 버틸 생각이냐?”
“버티기는 누가 뭘 버팁니까?”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악군을 보며 라이너는 한숨부터 나왔다.
“중원에서도 오지 않았던 질풍노도의 시기가 이곳에서 왔나 보구나.”
지켜보던 아델리나가 옆에서 쏘아붙이듯 하는 말에, 악군은 살짝 움츠리며 답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아닐까? 누가 봐도 삐져 있는데.”
“사저!”
“잊고 있나 본데, 사부의 연세가 이제 백이 넘으셨다. 네가 더 잘 알겠지?”
……!
“이곳에서 우리는 환생이 아닌 전생일 뿐. 반노환동이 어디 수명까지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고 장담할 수 있더냐?”
악군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배는 더 사실 겁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능한 거지, 절대는 아니지. 특히나 지금처럼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
“천왕성을 떠난다 하셨을 때, 우리가 강력하게 말리지 못한 이유 역시 그 때문이 아니었나?”
라이너도 아델리나의 말을 거들었다.
“사부가 평안을 찾기 위해,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도, 막내 바로 너였지?”
그제야 악군은 확실하게 기세 꺾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크게 걱정할 일도 없는데…… 무슨 일을 그렇게…….”
“게이트.”
“전쟁보다 마물 토벌에 확실하게 목표를 두셨다.”
아델리나는 말을 이었다.
“아닌 척하시지만 사부님은 절대 그냥 못 보신다. 옛날 그 힘들던 시절에도 우리를 거두셨던 사부님인데, 지금 상황에서 못 본 척하신다?”
라이너가 말을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지금은 에렌에서 보시는 게 없으나, 다른 나라의 상황을 눈으로 보기라도 하시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또 밤낮없이 움직이시겠지.”
두 사람의 말에 악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사부에게 무슨 특별한 불만이 있어서, 그렇게 외면하고 도망쳤던 건 아니다.
그냥…….
‘하아! 나도 애가 다 됐군. 관심을 받고 싶었던 건가, 그 순간에도?’
반가운 마음이 지나쳐, 관심받고 싶었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을 뿐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이 어리광을 멈춰야 했다.
아델리나가 계속 말했다.
“너도 깨달았으면 이제 협조해야 하지 않겠어?”
“어떤…….”
악군은 표정을 달리하며 말을 이었다.
“협조가 필요한 겁니까, 사저는?”
“그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부터가 먼저 아닐까? 그리고 대사형과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네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
대답 못 하는 악군을 보며 라이너가 말했다.
“우리 막내는 우리 중 제일 현명했으니, 지금쯤이면 모두 알았을 거야. 안 그러냐?”
악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로라스…… 사부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모든 걸 알고 만났다.
‘어쩌면 그래서 섭섭했을지도.’
힘을 가졌으면서도 자신들을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말이다. 물론 사부는 제자들이 당신의 흔적을 찾아 이 세계로 넘어왔음을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알아주셨어야지…… 우리 사분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주군이면, 사부였고 아버지이기도 했던 당신께서 조금의 관심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궁금하구나,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됨을 알기에, 그 생각을 지우고 라이너의 말에 반문했다.
“대사형과 사저는 언제 깨달으셨습니까?”
약간은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아델리나와 라이너는 곧바로 무슨 물음인지 깨달으며 대답했다.
“나는 꽤 되었다, 스물이 되기 전에 완전하게 깨달았으니. 그래서 사부님을 찾을 수도 있었고.”
“나는 사매에 비하면 많이 늦었지. 스물이 한참 넘고 나서야 인지했으니까.”
두 사람의 대답에 악군이 말했다.
“저는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델리나가 물었다.
“역시 너는 기억을 잃지 않은 채로 넘어왔구나.”
악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날.
예측하지 못했던 용오름에 천지가 뒤바뀌었던 그때, 주변에서 멀어져 가는 대사형과 사저를 보며 생각했던 건 하나였다.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왜곡 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을 잃으면 자아마저도 왜곡될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었지만…….
쿠우우우웅!
지면에 다시 닿았다 생각했을 때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서역의 색목인色目人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기가 막혔지요. 말을 할 때마다 울음소리가 들렸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내 목소리라는 걸 자각했을 때 정말 하늘이 노래졌지요.”
반노환동.
저잣거리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듯한 그 상황이 실제로 펼쳐졌다.
나이 마흔에 사부와 사형제를 제외하고 적수가 없다 여겼던 공력 역시 느껴지지 않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을 거둔 색목인들……이 자신을 애지중지 귀하게 여겨 줬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 지역에 정착하지 않고 평원 곳곳을 떠도는 유목 민족이었고, 그들과 함께하며 이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다행이구나. 나쁘지 않았어.”
라이너가 안도의 표정으로 하는 말에 악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
“은혜는 갚았습니다. 정착할지 안 할지는 그들의 선택이겠지만, 많은 땅과 재물 그리고 치안력도 제공했으니까요.”
악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에게 어려울 건 없었다.
한 번 갔던 길을 다시 밟아 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천하에 둘 없을 재능까지 가지고 있는 천재였으니까.
영향력을 얻기 위해 뭐든 했다.
장사도 했고, 용병단도 이끌었으며, 귀족들을 대 영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영향력을 늘렸고, 칠 인의 좌라는 비밀 조직까지 들어갔다.
“그놈들을 안다고?”
거기에서 아는 이름을 들은 아델리나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하는 말에 악군이 답했다.
“이제 그 조직도 거의 해체 직전입니다. 몇 안 남았으니까요. 사실 그때 사부님을 알아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내가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골드맨스는 이미 제 수중에 떨어졌고, 다른 조직들도 지금까지 열심히 흡수 중이니까요.”
“손이 필요하다면…….”
아델리나의 말에 악군은 씩 웃었다.
옛날부터 사저는 욕심이 많은 편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물론 사부와 사형제들에게는 베푸는 쪽이긴 했지만, 일단 제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혼자도 충분합니다. 모두 점조직들이라 우두머리만 제거하면 손에 넣는 건 쉬운 일이니까요.”
“한마디로 막내, 네가 대단해졌다는거지?”
라이너의 물음에 악군은 아델리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에펠리온 교단의 교황인 사저만큼은 아닙니다. 물론 제 조직이 작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요.”
악군은 어느새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왜 아니겠는가?
여태 자신이 모든 걸 홀로 해야 했다면, 지금은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형제들이 있었다.
뭔가 눈치 보지 않고, 제 자랑을 실컷 하고, 응석도 부릴 수 있다. 가족, 윗사람이 있다는 건 그래서 좋은 거 아닌가?
악군의 자랑질에 라이너와 아델리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눈을 떴다.
‘역시 막내다.’
대체 관리하고 있는 조직이 몇 개인가?
권력, 재력, 무력까지, 그야말로 삼력三力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하긴, 중원에서도 천왕성이 천하 통일을 했던 것도, 반 이상은 악군이 해낸 거나 다름없었다.
“원래 제국도 먹으려고 했지요. 그 이후 사부와 사형제들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정도의 인력이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을 찾기 위해 제국을 손에 넣으려 했다는 그의 말에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오히려 역시 막내 사제다운 생각이라며, 감탄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