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90)
에렌 제2의 황금기.
지난 일 년은 딱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유입으로 인한 생산성 증가.
뭘 해도 먹고 살 만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본디 급작스러운 발전은 치안의 불안을 야기하지만 에렌은 그런 것도 없었다.
기존의 법 제도를 더욱 강화하여, 강력범죄자들은 그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사형 또는 노예로 만들어 함부로 사람을 해하지 못하게 했다.
―법치주의는 좋으나 그 사유를 따지지 않으면 부작용이 심해질 겁니다.
학자들이 로라스에게 그리 진언을 했으나, 로라스는 삼 년이라는 한시적 유예를 두고 강력하게 법에 따라야 한다고 천명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영지에 정규병들을 더 둬야 하지만, 전쟁 복구로 인해 재정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나가는 시장에 세금을 높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남부를 점령해서 얻은 이익은 아직 고스란히 재투자되어야 할 시점. 그래서 각 영지의 재정이 충분해질 때까지는 말이다.
그사이 많은 부작용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민심이 흉악해지진 않았다.
처벌이 공평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고위 귀족들이 평민을 수탈한 것이 발각되어 교수형으로 공개 처형까지 되니, 다른 이들도 감히 법을 어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각 영지의 재정이 쌓이기 시작했으니, 병력을 더 증강시켜 법을 좀 느슨하게 할 수 있으리라.
여하간 그렇게 경제와 치안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사명감까지는 아니지만, 할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건 중요했기에 마물 토벌을 큰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군부에 신경을 썼다.
이미 새롭게 조직화했기에 크게 손을 보지는 않았지만, 몇 개의 부대를 새롭게 창설했다.
기존 세 개의 군단에서 하나를 더 늘렸고, 제사 군단은 마물 토벌을 위한 조직 체계를 만들었다.
다행히 사군단을 신설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탑과 에펠리온 교단의 협조.
수백여 명의 마법사들과 사제들에게 집중투자함으로 사군단의 기반을 잡았다.
로라스가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획, 추진하는 사이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 * *
“하아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는 사내들이 있었다.
그런 사내들이 대략 오백여 명.
일반적인 부대 훈련이라 볼 수 없는 것이, 그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검과 창 등에는 포스 없는 이들이 없었다. 그것도 매우 선명한 기운이 뿜어지는 것이 최소 포스 상위 유저들.
그리고 몇몇은 그 기운을 검과 손 사이에서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증명했다.
다섯이 넘는 포스 마스터에 전원 포스 상위 유저들.
그런 이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훈련하는 것을 세상 어디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장관이었다.
일제히 포스를 뿜어 대며 찌르기, 베기 등 기초 동작들을 일제히 행하는데, 그때마다 공간이 압축되고 폭발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었다.
저 자리에 서서 같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각기 다른 포스들의 마찰 속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분명 의미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단체 훈련이 끝나자, 곧바로 기사들은 삼삼오오 그룹을 이루기 시작했다.
“시그탑 경, 부탁드립니다.”
“드리프 경, 오늘은 꼭…….”
그리고 그룹마다 최상위의 실력을 지닌 이에게 도전이 쏟아졌다.
이건 멸마대라 이름 붙여진 이 그룹의 전통.
모두들 일정 수준 이상의 포스를 지닌 이들이라, 혼자 수련해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 내가 갖추지 못한 걸 갖춘 상대에게 대련을 청하며 훈련을 하는 것이다.
“미안하네. 오늘은 안 돼.”
“나도 도전할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그리고 평상시라면 그런 대원들의 도전은 거부하지 않는 상위 기사들이었으나 오늘은 반응들이 달랐다.
무슨 일인가?
대체 포스 마스터라 불리는 이들이 왜 모두 대련을 거부하는가?
대원들이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 누군가가 멸마대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 차렷!”
시그탑이 그를 보며 큰소리로 외치자, 훈련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충성!”
시그탑의 예를 받으며 훈련장 중앙으로 나오는 이는 바로 로라스였다.
“북부의 지배자이며, 주신이 선택한 성기사이며, 또한 락의 후계자임과 동시에…….”
마치 자신이 누군지 모두에게 알려 주는 듯한 시그탑의 기나긴 인사에, 로라스는 미소를 지었다.
굳이 저렇게 말하는 데에는 멸마대에 로라스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만들라고 지시하고는 너무 무심했지.’
마물들과 게이트를 닫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부대.
린델이 락의 인원을 빼자고 했을 때도, 안된다 못 박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 후, 각 지역의 유능한 인재를 락으로 보내고, 멸마대를 훈련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일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락에 도착한 지금, 가장 먼저 이들을 찾은 것이다.
“훌륭하군.”
시그탑을 비롯한 락의 기사만큼 마물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터. 또한 포스 마스터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부대를 훌륭하게 만들 거라 믿었는데, 과연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정기 가득한 시선과 이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진한 무인의 냄새.
만족스러웠다.
로라스는 기대에 부응한 이들에게 몇 마디 하고 싶었다. 분명 그랬는데 말이다…….
“시그탑, 공작 각하께 감히 대련을 요청합니다.”
“테라, 주군께 지도 대련을 부탁합니다.”
그가 반가운 마음을 표시하기도 전에 대련을 요청하는 기사들.
테라나 몇몇 호승심 강한 인물들을 그렇다 치더라도, 시그탑은 물론이고 드리블까지 대련을 요청하는 건 의외였다.
‘필요성이 있다는 거겠지?’
로라스는 멸마대가 어떤 식으로 훈련을 받고 있는지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지극히 단순한 방식의 훈련들.
오로지 강함만을 추구하며, 자신보다 나은 상대방을 보며 자극받게 만드는 방식.
그 덕분에 나름 점잖았던 이들마저 승부욕 가득한 성격으로 변했을지도 모를 터였다.
‘아직 눈이 트이지 않은 대원들을 개안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로라스는 검을 뽑았다.
이미 무기는 로라스에게 큰 의미가 없었으나, 시그탑은 이들의 수장.
무기를 들지 않으면 그의 위엄이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일부 내력까지 방출했다.
후아아악!
로라스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바람이 뻗어 나갔고, 바닥에는 커다란 원이 그려지면서 그 흔적이 남았다.
놀란 눈으로 그 흔적을 보는 대원들.
보라고 한 연출이었고, 효과는 지대했다.
“시그탑 경부터 시작하지.”
시그탑을 제외하고 모두가 급히 뒤로 물러났다.
로라스는 자세를 잡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확실하게 고민했던 벽은 넘었군.’
기세마저 뚫고 오는 그의 포스가 경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거칠긴 했다.
‘아마도 마물들을 상대하는 와중에 벽을 부순 모양이군.’
같은 깨달음이라도 주변 상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
로라스는 시그탑의 거친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하며 검을 뻗었다.
멸마대의 수준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 * *
로라스가 멸마대의 수준 확인을 끝냈을 때는 이미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그탑 경.”
“영주님께서 하신 것이지, 제가 한 것은 별거 없었습니다.”
시그탑은 멸마대의 공을 전부 에듀에게 돌렸다.
실제로 부친이 크게 공을 기울이긴 했지만 로라스는 시그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공작님.”
“말씀하십시오.”
“원하시는 수준을 말씀해 주셔서 거기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시그탑 경. 전 에렌의 영주이지만 락의 후계자입니다. 제게 편히 말 못 할 것이 있으십니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공작님이 제게 예우를 해 주신 건 알지만, 그래도 말하기 쉽지 않은 게 있어서…….”
시그탑의 반응에 로라스는 생각했다.
‘뭔데 이리 뜸을 들이지?’
좋은 말은 아닐 것이다. 좋은 말이라면 이리 어려워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시그탑이 말을 꺼내길 기다릴 때, 옆에서 테라가 끼어들었다.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대장님?”
시그탑이 고개를 끄덕였고, 테라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대원들이 많습니다.”
“불공평? 무슨 이야기냐?”
“하루하루 정말 전력을 다해 훈련하고 있습니다. 저희 멸마대는 분명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있습니다.”
“시그탑 경도 그리고 너도, 평상시답지 않게 말을 빙빙 돌리는구나. 불공평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왜 우리만 이리 힘든 훈련을 매일 반복해야 하는지, 불만이 조금 있습니다.”
“…….”
“아! 정말 약간의 불만일 뿐입니다.”
“정말 약간이라면 너나 시그탑 경이 이리 조심스러울까?”
“그게…….”
로라스는 곤란해하는 테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 할 말이 아니다. 이해도 한다. 에렌에서 멸마대 만큼 힘든 훈련 스케줄을 가진 부대도 없는 게 사실이니.”
“주군께서 그 정도의 인정만 해 주셔도, 대원들의 불만은 싹 가라앉을 것입니다.”
“어디 인정만 할까. 그에 대한 대가도 확실하게 지불할 것이다. 날 모르느냐!”
로라스는 어느새 주변으로 모여든 대원들을 둘러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난 상벌이 분명한 사람! 그리고 무작정 희생을 요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만 상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빠르다.”
로라스는 다시 한 번 대원들을 쓰윽 쳐다봤다.
“제 몸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내가 상을 줘야 하는가?”
당근과 채찍은 늘 균형을 이뤄야 한다. 인정함으로 당근을 줬다면, 그 불만에 대해 채찍도 휘둘러 줘야 했다.
“각 지역에서, 각 부대에서 최고만을 모았다. 최고에게 최고의 실력을 요구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상을 내려야 하는가?”
“…….”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난 상벌이 분명한 사람. 최고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필요로 할 때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하라. 상은 그때 논하겠다.”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 * *
“어머니.”
“아들!”
늘 몸이 좋지 못해 평상시에도 움직임이 매우 최소화된 여인. 그런 그녀가 말 그대로 날아가듯 달려가 로라스의 품에 안겼다.
“너무 오랜만이구나. 바쁜 것을 알아 내가 몇 번이나 가려고 했는데, 다들 말리니…….”
“길이 너무 멉니다. 이제 제가 더 자주 찾아뵐 것입니다.”
“온다 하더라도 네 일이 많으니, 얼굴을 몇 번이나 본다고……. 네가 큰일을 하니 나는 감히 재촉할 수가 없구나.”
“약속드립니다. 오늘부터 사흘은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쿠키와 차만 마시며 모실 겁니다.”
메어리는 환한 웃음으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어머니께서는 거짓말하라고 가르치진 않으셨습니다.”
로라스의 가벼운 농에 메어리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로라스는 그런 모친을 보며 생각했다.
‘목적에 주객전도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애초에 자신을 로라스로 인지하고 그리 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단 하나, 가족 때문이 아니었던가?
“차를 마시고 싶습니다.”
로라스는 슬쩍 메어리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그녀의 팔목 상태를 살폈다.
그 옛날 몬스터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린 자국은 여전했다.
저 사라지지 않을 흔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리 살기로 결심했다.
로라스는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 그 사실을 잊지 않기로 다시 한 번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