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9)
신중하게 접근할 요량이었는데, 놀랍게도 아는 놈들이 없었다.
언제 이렇게 조급해 본 적이 있었던가?
결국 그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후드를 벗어 버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그런 사내로 변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사제에게 안내를 받아 어디론가 향했다.
마차까지 타고 나가 도착한 곳은 외딴 공터의 작은 건물.
그곳에 들어가니, 이미 한 명의 사제 그리고 또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두 사제가 뭐라 속삭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름 조심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훤히 들렸다.
대충 내용은 이번에는 정말이길 바란다는 둥 사기꾼은 아닌 것 같다는 둥의 그런 이야기. 하지만 중요한 건 에펠리온 교단의 교황이 이곳에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한 사제가 다가오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건 그분께서 대답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는 두 사제 모두가 나가니, 공간에는 원래 기다리고 있던 사내와 함께 남게 되었다.
침묵. 정적.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듯이 서로를 살필 뿐 입은 열지 않았다.
‘탄탄하네.’
서로 대화 한마디 없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제국의 사람은 아니고. 서남부 쪽 계열의 복장인데.’
검게 그을린 얼굴, 흔하지 않은 흑발.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포스 마스터. 그쪽 지역에서는 마스터가 흔하지 않을 텐데, 이곳에?’
원래라면 흥미를 가지고 여러 가지를 유추하고, 알아내려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심적 여유가 없었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때 어색한 미소를 지었을 뿐.
그런데 말이다.
‘뭐지? 이…….’
위화감? 친근감?
상반된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기분은 말이다.
처음 봤고, 평범하지 않은 사내이니 경계심이 들어야 했지만, 의외로 그런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시간만 아니었으면 먼저 말이라도 걸어 보고 싶은 느낌.
이 세계에서 그런 존재는 몇 없었는데 말이다.
‘정말 뭐지?’
호기심이 극에 이르러 참지 못하고 먼저 대화를 시도하려 할 때였다.
“침묵하니 더 어색하군요.”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에이치 왕국의 백작. 라이너 슈베라트라고 합니다.”
다행히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기에 아는 척할 수 있었다.
“나인 마운틴. 실버 대회의 준우승자이기도 하시지요?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적 대화를 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쪽에서 쓰지 않는 화법을 썼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이름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너를 알고 있다는 걸 알려 주는 화법 아닌가. 호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명성 높은 기사이자 백작님을 뵙는군요. 저는 작위가 있지 않은 터라…… 그저 캐슬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캐슬 님이시군요.”
그리 말하는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 보였지만, 다음 대화를 이어 갔다.
“혹시 백작님께서도…….”
그렇게 물으면서 깨닫는 게 있었다. 그리고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만약 그 역시 이 문제로 왔다면, 그도 한자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그렇게 물었다.
‘그 뜻을 알고 있느냐?’의 물음과 동시에 해답을 함께 말이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캐슬 님은 알고 계십니까?”
교황이 오기 전까지 서로의 답을 말해서는 안 된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왔었고, 사기꾼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까.
그의 명성으로 봤을 때,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저 슬쩍 찔러 보고 싶었다. 어떻게 찔러 봐야 할까?
그리고 찔렀는데…… 정말 그가 답을 알고 있다면 난 또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도, 나도, 서로 입을 굳게 다문 채 한참 동안 시선을 교환했다.
눈으로 말했다.
네가 먼저 말하라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먼저라고. 묻는 이가 먼저 아니냐고 말이다.
“먼저 깨달아야 하는 법이지요(의식도료意識到了).”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깨달아야 나를 인지하여 내가 될 테니까요(아시아我是我).”
그의 대답에 가슴이 졸여졌다.
“나를 알아야 다른 것을 볼 수 있고(睁开眼睛정개안정), 그렇게 세상을 보는 법이니(앙망세계仰望世界)!”
그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소리친 그는 나인 마운틴.
아홉 개의 산.
저쪽 세계의 말로는 구봉九峰.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자신이 스카이 캐슬이라 자칭한 것도, 천왕성의 이름을 본뜬 것 아니었던가!
“누구냐 물었다!”
“제가 누구겠습니까!”
나의 대사형과 같은 이름을 쓰는 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제가 누구겠습니까!”
다시 한 번 소리치자 그가…… 대사형이 다가와 날 잡아끌었다. 그리고 울부짖듯 소리쳤다.
“막내야!”
* * *
“제겐 제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부님은 안 계십니다. 그리 혼란한 가운데서도 저만은 반드시 챙기셨지요.”
누구냐고 묻는 말에 엉뚱한 대답을 한다.
“계속 누구냐고 묻고 싶으신 겁니까?”
그리고 반문까지 하는 놈인데 밉지가 않았다.
“이쪽이 저쪽의 하루보다 한 시진 더 깁니다.”
“…….”
“편의상 같다 치고 말입니다. 이쪽, 저쪽 합쳐 정확히 사십 하고 삼 년이 걸려서 드디어 찾았는데 말입니다.”
“…….”
“정작 알아봐야 할 분이 알아보지 못하는군요.”
가슴이 시렸다.
어쩌면 눈물이 날 뻔했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곽아…… 아델리나를 만난 경험이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군이구나.”
아델리나의 말대로라면 구봉이와 악군이 넘어와 있었다. 하지만 구봉이는 어떤 경우에도 내게 이런 식의 투정은 부리지 못할 터.
“너는 크게 달라진 게 없구나. 다들 외모는 변했는데, 너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
“알고 있느냐? 곽아는 이미 만났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저희 사 형제는 다 만났습니다.”
“어디 있느냐? 왜 혼자 왔어?”
구봉이도 볼 수 있다는 반가움에 그리 물었는데 말이다.
“어딜 가는 것이냐?”
대 놓고 그냥 나가 버리는 녀석을 불렀지만, 들은 체도 없이 홱 가 버렸다.
‘뭐지?’
당황한 탓에 반응이 좀 많이 느렸다. 뒤늦게 찾았으나 이미 녀석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 * *
“사……부님!”
미어터지는 목소리로 큰절을 하는 구봉이를 보며, 내 안목을 탓했다.
왜 몰라봤을까?
라이너.
그가 구봉이인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분명 외형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분명 검까지 맞대어 본 사이거늘. 당시 개천지보의 경지가 아직 완숙하지 않았고, 포스와 마법의 개념에 심취했다 하더라도 알아봐야 했다.
“미안하다.”
그런 심정을 그런 말 한마디로 위로해 줄 수밖에 없는 것도 미안했다.
“어찌 찾은 것이냐?”
아델리나가 그 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여태 어렵게 생각했던 것이 참으로 허무할 정도의 간단한 방법이었다. 물론 대륙 곳곳에서 일을 벌일 수 있는 교단의 주인이었기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같이 넘어왔는데 다들 왜 이리 달랐을까?”
제자들의 나이가 다르고, 외형이 달랐다.
크게 변하지 않은 건 오로지 악군이밖에 없었다.
“막내 사제가 우리를 인도했으니, 그 이유는 녀석만이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를 찾아가지 않았느냐?”
며칠 전 악군이와의 만남을 이야기하자, 아델리나가 옆에서 말했다.
“막내이니까요. 아기가 어미 찾듯 가장 애타게 찾았던 것도 악군이었습니다. 아마도 감정을 주체 못 해 아이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자격이 있나. 스승이 제자를 못 알아봤는데. 그나저나 못 만난 것이냐?”
“네. 사매와 저는 사부님에게 먼저 달려간 거라고 생각을…….”
라이너의 말에 아델리나가 말했다.
“군아가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일단 막내를 만나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데.”
“너무 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이라도 나타나 옆에 달라붙을지도 모릅니다. 악군이는 그런 아이입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악군이를 아이로 받아들이기에는 괴리감이 약간 느껴지면서도,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하여 위화감이 느껴졌다.
‘말투도…….’
아델리나와 둘만 있을 땐 안 그러더니, 지금은 완전 유역후 시절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뭐가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에게 확실하게 할 필요성은 있었다.
난 로라스다, 유역후가 아니라. 어머님의 상처가 지워지기 전까지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대화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 * *
며칠 동안 악군이를 기다렸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미 에렌으로의 회군을 선포한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만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폐하. 모쪼록 옥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공작이 그 자리에 계셔 주셔야 짐도 평안하지 않겠소?”
새로운 황제는 능력이 있으나, 내 영향력을 벗어나려면 최소 십 년은 걸릴 터이고, 정쟁廷爭까지 가려면 또 십 년은 더 걸릴 것이다.
그 전까지는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니, 이제는 오로지 전쟁 복구와 마물 퇴치에만 신경 쓰면 될 터였다.
에렌으로 가는 길.
미소 짓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일 년이 넘은 긴 전쟁 기간. 그 고생에 대한 대가는 모두 넘치다 못해 받은 편이었으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다.
구봉이. 라이너를 찾았고, 북부의 자치권까지 손에 얻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사부님. 영지에 돌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헤어지는 게 아쉽긴 하지만 라이너도 제 영지민을 돌봐야 하는 영주.
“그게 맞는 일이다. 현재 삶에 충실해야지. 서로 어디에 있는지 알았으니, 뭐가 문제가 될까.”
“거리가 먼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것도 곧 해결이 될 거야. 옆집 드나들 듯이 할 수는 없겠지만.”
게이트 개발.
공간 왜곡을 통해 게이트 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은가.
영지전과 마물 토벌 때문에 당장 손을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제 연구할 여력이 생겼다. 그 원리를 이해하고, 루트를 확정할 수 있다면 대륙 어디든 빠른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다.
‘돌아가면 할 일이 많겠군.’
내정을 위해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건 영주로서 참으로 큰 즐거움.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직접 나설 일이 몇 개 없으니, 좀 더 많은 시간을 락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은근 귀찮았던 어머님과의 티타임도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이제 내 안사람이 된 에르자일에게 언제까지 미안한 감정만 가질 수 없고 말이다.
영주 로라스로, 아들 로라스로 그리고 이제 남편 로라스로서의 의무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로서의 의무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고 말이다. ……라는 작은 희망을 가졌지만, 에렌으로 돌아와서 할 것은 산더미였다.
넓어진 영지의 관리.
준비했다 생각했지만, 충분치 않은 듯했다.
사람이 부족했다.
특히나 좋게 느껴졌던 북부의 자치권을 가진 건 살짝 후회가 되었다. 이 때문에 새로운 행정이 적용되어야 했고, 또 그 탓에 더더욱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린델이 휑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그래서…… 급격한 확장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온다 진언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누가 이런 걸 알았나?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영지를 각 영주에게 나눠 주자고 한 건 그였다.
여하간 이런 행정은 린델에게 몽땅 넘기려 했는데, 얼굴을 보니 양심상 그럴 수가 없었다.
최종 결재자는 결국 나이니, 내가 에렌에 있어야 했다.
“락도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행정관으로 길러진 인재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호출 좀 하시면 안 됩니까?”
“이미 불렀고, 며칠 전 날 원망 어린 눈으로 보더군.”
“락의 기사님들도 행정에는 일가견이 있다 들었습니다. 특히 오리시암 경은 어떻게든 영지가 돌아가게 만드는 특출한 능력이…….”
“그들은 안 돼. 특히 기사들은 할 일이 명확해.”
락의 기사들은 무슨 일이든 현재 하는 훈련은 계속 진행해야 했다.
락이 원래 잘하는 것.
그건 마물 토벌.
이미 부대 편성까지 고민 중이다.
“일 년만 고생해. 인재 확충을 위한 제도도 준비하고 있잖아.”
현재 행정관들은 대부분 귀족들이다. 평민들도 있으나, 그들 대부분은 락에서 차출된 자들.
거대해진 땅, 늘어난 인구.
귀족들이 많이 사라진 상황에, 이제 능력 있는 평민들을 관리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만 되면 한숨 돌릴 수 있으리라.
“일하자고. 린델.”
그렇게 린델은 휑한 눈으로 다시 서류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