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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88화 (288/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8)

번천은 고민을 시작하였지만 죽었다 깨도 그걸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큘라스의 영지전을 승리하고, 남부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실전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로라스의 내공은 이미 예전 유역후 말년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전쟁용 육체와 내력의 흐름이 급격하게 그의 몸을 바꿔 놓고 있던 것이다.

화인개화花儿开花.

그 탓인지, 그 덕분인지, 이제는 일반적인 운기조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력의 흐름이 사나워지는 상황. 그래서 꽃이 개화하듯 천천히 내력을 다스리고 있었다.

번천이 단내를 맡았다는 것도, 그 내력이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터.

‘이 정도면 말년의 유역후와 비슷한 수준일 터.’

그건 무인으로서 더 나아가려면 이제부터 새로운 명상이 필요하다는 뜻이지만, 로라스는 이 경지에서 더 나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이후의 경지는 머릿속으로만 상상했지,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등선이라도 하면 곤란하지.’

화인개화로 내력을 부드럽게 바꾸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용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공부로의 변환.

그렇게 로라스와 번천이 포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주군.”

귀족 하나가 달려오더니, 손님이 찾아왔음을 보고했다.

“누구라고?”

“브리츠라 이름을 밝혔습니다. 주군의 노예라고…….”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고, 노예를 둔 적이 한 번도 없는 로라스였기에, 의아하던 찰나였다.

‘아!’

생각난 것이 있어 그를 불러들였다.

“데리고 오라.”

잠시 후 귀족이 한 사내들 데리고 왔다.

짐작이 맞았다. 그 사내는 바로 히든아이의 수장 제리미였다.

그는 로라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주인을 뵙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공경한 표현에 로라스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델리나의 작품인가?’

이런 관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굳이 자초지종을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바로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인가?”

“주인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레미가 그리 말하며 그 사람에 관해 입을 열자, 로라스는 흥미를 보였다.

“테인 오베른. 태자 아닌가?”

“네, 맞습니다.”

“태자가 왜?”

“감히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간절히 찾는 것을 보니 급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반드시 황도로 입성하기 전에 뵈어야 한다기에…… 탐탁지 않으면 거절하겠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다음 대안이 바로 그 태자였으니까. 오히려 더 잘됐다 싶었다.

“아니, 만나 보지.”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잡고, 제레미가 돌아갔다.

“의외군요. 태자가 직접…… 혹시 주군과 일면식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소문은 들었다.

섀도가 태자에 관련한 내용을 매번 업데이트해 주고 있었으니까.

“궁금하긴 하군, 보고가 사실인지. 그리고 사실이길 바라고.”

* * *

‘개 같은 아비에 호랑이 같은 아들이로다.’

태자 테인 오베른을 만나고 첫 평가.

제 권력을 지키려는 감각만 지닌 현 황제보다 수백 배는 나았다.

‘하긴, 할아버지 같은 분의 존중을 받았던 전대 황제 밑에서 지금의 황제가 태어났는데, 이번에 또 바뀐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겠지.’

혈통, 혈통 하는 건 탐탁지 않은 건 사실이나, 또 그런 속설이 어느 정도 사실인 건 인정해야 했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나온 말일 테니 말이다.

현재 상황에서 압도적인 갑의 위치에 있는 나를 마주하면서도, 매우 당당하게 나왔다.

제 위치에 대한 건방이 아니라, 자리에 걸맞은 책임감에서 나온 자각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보였다.

스물여섯.

어리다 하면 어린 나이지만 몸짓은 품위가 있었고 화법은 노련했다.

‘제 아비가 저렇게 교육시켰을 것 같지는 않고…… 훌륭한 스승이 붙은 것 같은데.’

누가 이리 잘 가르쳤는지 궁금할 정도다.

‘현실적으로 협상을 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말이지.’

태자와의 대화는 짧았지만 그렇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주군. 린델입니다.‘

이제 해야 할 건 린델과, 태자와의 거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다.

“거래를 제안하더군.”

“어떤 거래입니까?”

“원하는 건 황가의 존속. 그에 대한 대가로 제 아비가 꾸미고 있는 일을 알려 주더군.”

“황제가 무슨 일을…….”

“그냥 입성했으면 원래 계획대로 다 죽이고 시작할 뻔했어. 시간도 낭비했을 것이고.”

그 대답만으로 린델은 무슨 일인지 짐작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황제가 또 무슨 헛수작을 부리고 있군요.”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는 모르니까.”

“현재 그가 믿을 만한 구석은, 황실의 로열 기사단뿐일 텐데…… 바보 같군요.”

“로열 기사단에 내가 알아야 할 인물이 있나?”

린델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전대 폐하께서 승하하신 후 인물이라 할 만한 인재를 키우지 못했습니다. 대단했던 기사들은 있지만 이미 오래전 은퇴했지요.”

“그럼 신경 쓸 건 없겠네.”

정말 신경 쓸 게 없었다. 태자가 미리 알려 주지 않아도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을 테기에.

그리고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없었다.

사흘 후.

황도에 도착했고, 다시 한나절이 지나서야 황궁으로 들어섰다.

쿠우우웅!

그리고 내성 문이 닫히기 무섭게, 로열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조리 제압된 채로 말이다.

“고작 이런 실력으로 잡으려 했단 말이야?”

히든아이의 조직원들. 그리고 나이트 플라워와 그쪽 조직원들과 함께 발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들에게 미소를 보이고, 날 여기까지 안내한 시종을 쳐다봤다.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손대면 그대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그에게 말했다.

“계속 안내하지. 폐하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겠나?”

“네…… 공작 각하.”

시종은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황제를 만날 시간이었다.

* * *

참으로 순박해 보이는 사내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촌부.

그를 보자면 딱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을 사내.

하지만 이 장소에서 그런 사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거대한 신전의 위용에 압도된 일반인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배 시간이 끝나고 모든 신도가 밖으로 나갔음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형제님, 예배 시간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혹시 고해할 것이 있다면, 이곳이 아닌 다른 성소가 있으니…….”

사내에게 사제가 다가와 조용히 이르는 말에, 사내가 급히 말했다.

“그게 아니라…….”

그리고는 작은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사제는 뭔가 하는 표정으로 보다, 그 조각에 적힌 글자 같은 것을 보며 급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듣자니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찾는다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혹시 형제님이…….”

“여기서 답해야 합니까?”

사제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건 저희가 아니라 따로 들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사제는 사내를 안내하며 생각했다.

‘무슨 날인가? 이 년 동안, 그 누구도 그 글자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두 사람이 동시에 찾아오다니.’

여하간 이 문제는 교황께서 특별하게 지시를 하신 일.

사내를 안내하는 사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황제와의 면담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 기대가 긍정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러지 못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그는 말에 무게가 없었고, 마음은 있지만 그에 걸맞은 책임감과 실행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있지 않은가?

머리는 제법 똑똑함에도 말만 앞서는 부류 말이다.

생각은 내가 할 테니,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고된 일은 너희들이 해라 하는 그런 부류.

황제가 딱 그런 부류이기에, 그를 그냥 제거한 후 모든 것을 깔끔하게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했다가는 일 처리가 너무 더딜 것이고, 태자와의 거래도 있었다.

‘몇 년 정도만 뒤를 봐주면 최소 이 체제는 유지할 능력이 있을 테니.’

마지막 남은 기대도 저버린 이상, 다음 할 일은 결정되어 있었다.

일단 황제의 주변 인물을 싹 감옥에 처넣었고, 본인은 일단 내성 한편에 가뒀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황도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래서 태자가 필요했다.

황제가 병이 심해 휴양한다고 선포한 후, 태자가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어려울 거 없다.

태자는 정통성을 지닌 후계자였으며,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놈들은 죄다 가두면 됐다.

원래 주먹은 법보다 가까운 법 아닌가.

딱 두 달 걸렸다.

태자를 새로운 황제로 만드는데 말이다.

그다음 일은 당연히, 멍청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이미 타국으로 갔던 병력은 회군해 있는 상황이었고, 국경의 혼란은 남아 있는 일군단에게 책임지게 했다.

왕국 연합 중 연승에 취해, 휴전 제안을 거부한 왕국은 곧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일군단장인 나키아는 남부 귀족들과는 달리 차원이 다른 인물이고, 병력 역시 마찬가지다.

일군단은 에렌의 최강 전력.

영지전에 불러들이지 않고, 타국에 남겨 둔 이유도 바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영지전의 책임을 져야 할 모든 놈들을 죽였고, 새로운 황제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다시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고되고, 짜증 나고, 엄청난 시간과 심력을 소비한 대가를 받아야 할 일.

내가 무슨 성인이라고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양보하겠는가?

가뜩이나 전쟁 때문에 쓴 돈이 천문학적이고,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터전을 복구하는 데도 다시 그만한 비용이 들어간다.

아큘라스 공작을 비롯하여 책임져야 할 모든 귀족들, 그들의 것은 동전 하나 남기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 가문의 성인 남성들은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 스스로 제 몸값을 갚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고, 내겐 그런 일을 너무 잘하는 인재들이 있었다.

히든아이가 그들의 은닉 자산까지 찾아냈고, 나이트 플라워와 발드가 회수에 나섰다.

남은 남부 귀족들과 황실의 종친이란 자들에게서 불만이 나왔으나 감히 대 놓고 따지는 자는 없었다.

황제 역시 당분간은 권력의 기반을 북부의 힘에 근거하고 있으니, 뭐라 말할 입장은 되지 않았다.

논공행상.

벌 줄 놈은 다 준 상황이니, 기분 좋게 전리품을 나눠 주면 됐다.

북부의 귀족들에게는 남부의 땅을 모조리 나눠 줬다. 피해를 복구하는 데 꽤 많은 시간과 재력이 소모되긴 하겠지만, 이쪽 땅은 북부와 달리 풍요롭다.

나눠 줄 땅은 많았기에 별 불만이 없었다.

재물들 대부분은 병사들에게 풀었다. 일부 떼어 남부군으로 참여한 병사들에게도 나눠 줬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을 이들이 태반이었으니까.

그 사업은 렌에게 맡겨 버렸다.

그간 상단이 휘청할 정도의 군자금을 댔으니, 상으로는 모자란 감이 있었으나 남부에 기반을 둔 상단들이 대부분 도산한 상황이다.

각종 사업의 기간을 한정하여 독점으로 줬으니, 몇 년만 고생하면 명실상부 대륙 제일의 상단이 될 터.

그래도 남은 것들은 모조리 에렌의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렇게 모든 것을 끝냈다.

아직 왕국 연합과 전쟁이 완벽하게 마무리된 것은 아니나, 그 정도는 이제 새로운 황제가 할 몫.

그렇게 철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날 따스하고 비옥한 곳이긴 하나, 우리의 고향은 북부.

에렌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판은 제가 짰는데, 그걸 다 홀랑 잘 드셨습니다.”

경비가 필요 없다 하나, 수하들이 나름 삼엄하게 경계를 하는 내 침실을 점거한 뒤 기다리던 사내가 있었다.

“황제…… 아니, 전대 황제를 제거하고, 지금의 황제를 세운 것 말입니다. 너무 쉽게 진행되었다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놈에게 물었다.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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