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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87화 (28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7)

황제와 볼일을 마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후드는 생각에 잠겼다.

‘이거…… 잘 됐다 박수를 쳐야 하는가? 아니면…….’

에렌의 기세가 예상보다 강했다.

그 탓에 크게는 벌써 두 번이나 계획을 조정해야 했고, 세세하게는 수십 번이나 명령을 번복해야 했다.

‘이 정도면…….’

후드는 다시 한 번 계획 전면 수정의 필요성과 함께, 이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자신이 로라스라는 젊은 영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긴, 너무 쉬워도 재미가 없지.’

그렇다고 그에 대해 크게 원망할 것도 없었다.

일을 좀 망치긴 했지만, 덕분에 손쉽게 세력을 불렸다.

얼마 전 골드맨 그 늙은이의 재산마저도 홀랑 다 털어먹지 않았는가.

골드맨은 더 이상 골드맨일 수 없었다. 새로운 골드맨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물론 촌스럽고, 경박스러운 골드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쓸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판을 짜야 하나?’

그대로 두다가는 황도에서 짜 둔 판을 모두 엎어야 할 판이다.

공들여 키우는 태자 대신, 그가 황제가 되면 꽤나 골치 아파지지 않겠는가?

‘템테이션이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그냥 사라진 걸 생각하면, 그쪽으로는 안 될 테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렌을 통하여 제국을 장악하고, 세계를 장악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만나 볼까?’

일단 보면 더 괜찮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않을까 싶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리고 만나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주인.”

오랫동안 후드를 보좌한 심복이 그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이걸…….”

심복이 대답 대신 서찰 하나를 내밀자, 후드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

침묵하며 편지를 뚫어져라 본 후드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난 거지?”

“에펠리온 신전입니다.”

후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내해.”

* * *

“우아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이긴 한데 말이다.

“우아아아…… 목 아프네.”

뭔가 참으로 무성의한 느낌.

어느새 병사들은 원래 자신의 성으로 귀환하는 것처럼 별 호들갑 떨지 않고 성으로 입성했다.

끊임없이 진격했고, 벌써 손에 넣은 성이 삼십여 개. 그중 네 개는 하나의 지방을 대표하는 대영지의 성.

하지만 그렇게 진격해 나가는 동안, 전투라고 할 만한 저항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간부들이 황도에 진입하기 전까지 특별히 위험할 건 없다고 귀띔을 해 주긴 했으나, 그래도 한 번도 전투가 없으니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아! 전투가 있긴 했다.

남부에 진입하면 할수록 마물들이 늘어났고, 딱 한 번 게이트를 지운 적이 있었다.

여하간 에렌의 대군은 오늘도 남부의 성 하나에 무혈입성했고, 어느새 황도와의 거리가 보름으로 좁혀졌을 무렵.

황제의 사신이 마침내 로라스 진영을 찾아왔다.

사신이 로라스에게 전한 건 딱 두 가지.

에렌의 영주로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것과 공작의 위를 내리겠다는 것.

“하아!”

그런 사신의 전달에 로라스가 처음 보인 반응은 어이없음이었다.

애초에 황제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던 로라스였다. 그런 게 필요했다면 진즉 수를 냈을 터.

공작의 작위 역시 마찬가지다.

에렌이 자신의 것이 된 것이 중요하지, 그딴 지위 따위를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중앙 정계에 필요한 인물들이 있다면 모를까, 자신이 옆에 두어야 할 사람들은 전부 북부에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무엄 하……십니다.”

그런 로라스의 헛웃음에 사신으로 온 스트라 백작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히 ‘무엄하다!’라고 꾸짖을 배짱은 없는 듯했다.

“내 집에 오는 손님인 걸 운 좋게 알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얼마나 모욕감을 느끼고 있는지, 그대로 알려 주었을 테니.”

로라스가 손을 휙 젓는 것으로 그를 내보내자, 옆에서 린델이 말했다.

“이제야 똥줄이 타는가 봅니다.”

“그래야지. 상황이 이럼에도 끝까지 왕국들과 전쟁을 고수했으니. 얼마 전에야 회군 명령을 내렸다지?”

“일군단에서 온 연락으로는 그렇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두 달 정도면 보냈던 병력이 회군할 것입니다.”

린델은 그리 말하고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때까지 시간을 벌 책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황도로 오라는 명령을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왜, 날 인질로라도 잡을 것 같아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홀로 게이트에 던져도 주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황제 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반드시 책임은 물어야 할 것이고…… 으음.”

“무슨 생각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기존 계획대로 황제의 목을 자르면, 안정화에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했지?”

“빠르면 일 년, 늦어도 삼 년입니다.”

로라스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걸 대번에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하시고,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린델은 로라스의 생각을 읽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그리 하겠습니까?”

그리고 한참 후에 반문했고, 로라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걸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 먼저 황도로 들어가야겠다.”

“만약 황제가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도 제 복인 게지.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제 놈을 살려 두는 것인데, 그러지 않겠다면 제 명을 재촉하는 것이겠지.”

린델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럴 요량이라시면 더 진군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군이 더 가까워지면 황제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게 더 낫겠군.”

“혈통이라는 게…….”

“더 많은 이를 살릴 수 있다, 이것만 생각하자고. 기회를 줬음에도 가지지 못하는 건, 제 복일 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말 온다더냐?”

“네. 내일이면 도착합니다.”

사신으로 보냈던 백작의 말에 황제는 좋으면서도 당황했다.

급한 마음에 사신을 보낸 건 사실이었으나, 그가 정말 작위를 받기 위해 입성하겠다 하니 오히려 당혹스러운 것이다.

“사람들!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렇게 황제는 측근들이라 할 수 있는 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정말 온다고 하면 뭐든 대책을 짜야 했다.

‘그냥 거기서 작위를 받고, 회군하면 얼마나 좋아? 아큘라스 공작의 영지를 바로 떼어 준다고 해야 했을까?’

황제는 좌불안석,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왔다 갔다 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사이 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회의가 시작된 후, 로라스의 입성 소리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각기 한마디씩 시작했다.

수많은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황제를 비롯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딱 두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첫 번째는 로라스를 어떻게든 환대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주고 다시 에렌로 돌려 보내는 방법.

두 번째는 로라스를 잡아 이 상황을 뒤집어 보는 방법.

그 두 가지의 선택을 놓고, 황제와 귀족들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첫 번째 선택을 하면 너무 많은 것을 내놓아야 했고, 두 번째 선택을 하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두 달 정도면 전선에 나가 있던 우리 군이 회군합니다. 그때까지만 버텨도…….”

하지만 누군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을 거론하였을 때, 모두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번득이는 눈빛들.

그리고 머릿속에 욕망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선택을 할 경우, 너무 많은 것을…… 어쩌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빼앗길 수도 있다.

그들에게 가진 것을 전부 내놓는다는 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

그 정도의 탐욕이 없었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족속들.

“황실 기사단이 있지 않습니까? 황도 경비대도 있고.”

그렇게 그들은 계속해서 상의하고 또 상의했다.

아니, 상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답을 정해 놓은 상태가 아닌가?

지금 하는 건 뺏기지 않고자, 그리고 자신들의 불안함을 감추고자 하는 자기 위로.

그것을 제 목숨 값만큼 충분히 자기 합리화를 시킨 이후, 회의가 끝났다.

귀족들이 나간 이후 황제도 침실로 가려고 몸을 움직였을 때였다.

“폐하!”

황제를 부른 건 바로 그의 맏아들이자, 태자인 테인 오베른이었다.

“왜 그러느냐?”

“좋지 않은 선택 같습니다.”

“뭐?”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지금 저들도 그러합니다.”

아들의 뜻밖의 말에 황제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그게?”

“저들은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고, 없어야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선택이 폐하께 큰 해가 될 것이 두렵습니다.”

황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뒤를 이을 놈이 담이 그리 작아서야 어찌 쓸까? 지금 한마음, 한뜻으로 일을 도모해야 할 상황에 그런 말을 해야겠느냐?”

“어찌, 감히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는 자들을 믿으십니까? 이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하셔야 합니다.”

“어허! 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구나!”

“너무나도 잘 압니다, 폐하. 뜻을 바꾸셔야 합니다. 에렌의 기세가 이리 날카로운데, 일단은 그 기세가 둔화되기를 기다려 기회를 보셔야 합니다. 반드시 그러셔야 합니다.”

태자의 간곡한 말에 황제는 오히려 노성을 터트렸다.

“이놈! 네가 정녕 그러고도 태자라 할 수 있겠느냐! 짐이 이미 분명하게 뜻을 밝혔거늘!”

“최소한 스승님이 오실 때까지만…… 그분의 지혜라면 반드시 묘책이 있을 것입니다.”

“됐다. 이 중한 시간에 없는 걸 보면 네 스승이라는 자리를 신중히 생각하지 않겠다는 거지.”

“폐하! 아버님!”

“물러가서 거처에서 자숙하라. 당분간 너를 보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휙 가 버리는 황제를 보며, 태자는 초조해졌다.

‘떨어지는 칼날은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 했는데…… 이러다가 정말 큰 사달이 나겠구나.’

태자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급히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 * *

“하아아아!”

밤하늘 별빛만큼이나, 부드러운 호흡을 토해내며 로라스는 두 팔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는 체조라도 하듯 두 팔을 좌로 그리고 우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일수록 그의 옷은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새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듯이 팽창했다.

“후우우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손을 천천히 내미는 순간, 그 기운들은 봄의 산들바람처럼 천천히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지켜보던 번천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특별난 것은 없었다.

주군의 수련은 동적이기보다 정적에 더 가까웠고, 그 기묘한 흐름은 늘 지켜봐 왔던 것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라. 분명히 달라.’

뭐가 다른 것일까?

분명 보이는 건 평상시와 다를 게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던 번천은 한참 후에야 무슨 차이점이 있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하지만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깨달았으면서도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황량한 황무지에 꽃향기에 가까운 단내라니. 하지만 주군에게서 발산되는 기류는 분명 단내를 포함하고 있었다.

“번천.”

“…….”

“번천?”

“네? 네!”

황급히 정신을 차린 번천을 보며 로라스는 웃었다.

“왜 그래? 넋 빠진 사람처럼.”

“정말 빠졌습니다. 제가, 뭐에 홀린 듯 이곳에서 꽃 냄새를 맡아서…….”

그 말에 로라스는 오히려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반년 전, 그 고리 업자 기사를 처리했을 때 벽을 넘었다고 여겼는데, 이제 그 경지가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감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내 동작에서 단내를 맡았다는 걸 보면 확실하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번천을 보며 로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옆에 둔 보람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리 얻어 가는 것이 많으니. 이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전부 달라질 것이다. 눈으로는 기세를 읽고, 귀로는 그것을 듣고, 코로는 그 향기를 맡을걸.”

“눈으로만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알아듣겠습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할수록 어려워질 거라는 걸 직감한 번천은 그렇게 정리했다.

그리고 그런 번천을 보는 로라스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제사보 앙망세계仰望世界(세계를 바라보다)에 오른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느꼈단 말이지?’

기특하여 쳐다본 시선에 번천은 오히려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정리한 것인가?’

고민을 시작하는 번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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