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4)
까아아아앙!
분명 시선이 바닥, 정확히는 잘린 자신의 팔을 향했음에도, 골든 나이트 에브라는 창을 휘둘러 번천의 검을 쳐 냈다.
상대가 한눈을 팔고는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일격이 성공하기 힘들 거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수월하게 쳐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차!’ 하는 순간 자신이 검을 놓칠 뻔했다.
“이놈! 마법사가 아니었구나!”
에브라는 한 손으로 창을 썼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슈르르릇!
오히려 약간의 불균형이 더 눈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으윽!”
게다가 팔 하나를 자르기 위해, 자신도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상황.
타아아앙!
작은 충돌에도 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의 고통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거리를 벌린 채, 급히 지혈을 하기 시작했다.
번천은 마법으로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고, 에브라는 창을 던지고는 검을 뽑더니, 그 검을 잘려 남은 팔뚝에 갖다 댔다.
치이이이!
에브라가 검으로 제 살을 지지는 것을 보며, 번천 역시 손에 힘을 주었다.
말 그대로 그렇게 응급처치를 하는 데 걸린 시간은 숨 두세 번 쉴 시간.
번천은 그 짧은 시간이 수 시간은 된듯한 착각을 했다. 무조건 상대보다 먼저 응급처치를 해야 했던 것이다.
“으아아아!”
“하아앗!”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다시 달려들었다.
마스터와 마스터의 격돌.
사방으로 포스의 기운이 터져 나갔고, 주변은 절로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서로 타고 있는 말들은, 그 영향력을 이기지 못해 쓰러진 지 오래.
“비겁한 놈! 기사라는 것이 마법사 흉내를 내서 속여!”
공세를 선점한 에브라가 노성을 터트리며 연신 번천을 압박했다.
전장에서 비겁 따지는 놈이 병신이라고 해 주고 싶었다. 그런 제 놈은 고작 고리대금업자 하수인 아니냔 말이다.
‘분명 내가 이득을 보고 시작했는데.’
팔 하나 없음에도, 에브라의 검에 실린 포스는 자신의 포스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흔들리며 가슴을 찔러 오는 검.
피할 수 없는 각도이기에, 무조건 쳐 내야 했고.
차아아앙!
쳐 냈음에도 가슴이 울릴 듯한 충격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밀며 베어 올리는 공격에 바로 공간을 내줬다.
그 탓에 완벽한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번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대인전에 많이 밀리는 건 사실이지.’
주군이 여러 번 주의를 주었던 문제였다.
자신에게는 강인한 체력과 무한한 포스가 있으나, 정교함이 떨어지고 폭발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계속 그렇게 남을 생각은 없다!’
그간 노력을 쏟아부었다.
특히 집요한 성격 탓에 대인전에 뛰어난 테라에게 아쉬운 소리까지 해 가면서 수많은 대련을 거쳤다.
그렇게 번천은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다.
피하지 못하면 막고, 막지 못하면 피하고. 둘 다 못하면 제 몸을 대가로 치명상을 피하는 데 노력했다.
타아아앙! 타아아아앙!
그렇게 철음이 울리며 쉴 새 없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단 한 번도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몸에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났지만, 번천은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장점은 강인한 체력과 무한에 가까운 포스를 유지할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말은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는 것.
그 사실은 이미 테라와의 대련에서 증명했다.
분명 테라는 열 번 싸우면 한두 번밖에 이기지 못하는 상대였으나, 버티면 버틸수록 자신이 유리해졌고, 이겼다.
그게 중요했다.
‘게다가 피는 네 놈이 더 많이 흘렸다. 체력이 훨씬 더 빨리 떨어질 것이다.’
“하아아아앗!”
번천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의지를 천명했다.
이미 팔, 다리, 허리,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자신은 이길 것이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크흐으윽!”
응급처치했던 상처가 다시 터져 나감에 신음이 절로 튀어나와도 말이다. 하지만 번천은 웃었다.
신음을 토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이한 표정.
처음으로 번천의 검이 상대에게 유효타를 먹인 것이다.
“이놈!”
제 허리에 난 상처를 보며 에브라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럴수록 번천은 더 웃었다.
‘너 이렇게 처절하게 싸워 본 경험이 있나?’
없을 것이다. 그는 엄청난 무인 아닌가? 웬만한 무인은 거리조차 점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방심은 하지 않았다. 팔 하나를 자른 직후에도 놀라운 무위를 보였던 놈이니까.
번천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자신은 점점 강해지고 있고, 놈은 약해지고 있었다.
“허어어억! 허어억!”
놈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이 그 증거.
번천은 그렇게 버티고 버텨 마침내 해냈다.
카아아아아앙!
마침내 포스량의 차이가 역전되었고, 검과 검의 마주침에서 우위를 점했다.
카아앙! 카아앙! 카아앙!
모루를 쳐 내는 망치처럼, 번천은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고, 내려찍었다.
쩌어어어어어엉!
급기야 자신의 검에 의해 놈의 검이 파괴되었을 때.
“죽엇!”
번천은 온몸의 힘을 다해 그대로 내리눌렀다.
…….
“허어억! 허억!”
거침 호흡. 그리고 눈앞의 현실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열기가 미칠 듯이 타고 오름에.
“우아아아아아아!”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 댔다.
해냈다. 기어코 그를 베어 내 버렸다. 자신이 이긴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시야가 확장되며 주변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
한창 싸우며 미칠듯한 분위기여야 했는데 이상하리만큼 정적인 느낌.
“한 단계 올라왔구나, 번천.”
그가 느낀 그 이상함의 답은 다가오는 로라스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자각했다.
“제가 해냈습니다, 주군.”
“보았다. 훌륭하다, 번천.”
인정받았다.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는가?
* * *
“어떻게…….”
병사들을 희생양으로 버리고 측근들과 도망치는 아큘라스 공작은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니, 앞뒤로 협공하면 끝난다는 전령의 보고.
성공했음을 깨닫고 기세 좋게 진격했다. 하지만 약속된 장소에 아군은 없었다.
에렌의 군기만 펄럭이는 공간.
숫자가 많지는 않았고, 아군의 기병들이 후방에서 뭔가 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에 그대로 돌격을 명령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군이 몇 배는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아군이 왜 없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약속했음에도 없다면 부대를 멈추고 사실 파악을 했어야 했다.
초반에는 자신들이 훨씬 유리했다.
적의 보병들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공격하여 갉아먹으면 되었으니까. 실제로도 어느 정도 갉아 먹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 기병들이 나타났다. 아군이 아닌 적 기병부대가 말이다.
문제는 메린 백작 부대에 대부분의 기병들을 배치한 탓에, 적 기병부대에 대항할 수단이 없다는 것.
적의 보병들이 아군들의 공세를 버티는 사이, 아군의 뒤로 적 기병이 휘돌기 시작했다.
학살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졌고, 최후방에서 그걸 지켜보던 아큘라스 공작은 도망쳤다. 그뿐만 아닌 대부분의 지휘부가 말이다.
‘이놈!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다.
자신은 역사에도 유례없을 대패를 기록한 지휘관이 될 터였지만, 그에겐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핀론드에 있는 예비부대.
핀론드는 요새화된 성이니 거기서 버티면서, 황실에 원군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아큘라스 공작은 오직 그 생각만 하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어이가 없군. 썩어도 이리 썩었을 줄이야.”
로라스는 혐오감을 감추지 않으며 화를 냈다.
“제정신이 아닌 새끼들인거야! 명예? 고귀한 핏줄을 부르짖던 놈들 아니었던가!”
로라스는 혐오를 넘어선 분노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승을 거둔 직후란 걸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으나, 주변 간부들은 그 이유를 알기에 침묵하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중보병들이 중심을 버티는 사이, 기병들이 후방을 치는 전술은 전술로서는 기본적인 것에 속했다.
물론 모든 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은 아니다.
적의 공세에 중앙보병들이 무너지면, 기병들도 끈 떨어진 연처럼 파괴력이 떨어졌다. 보병과 기병들의 훈련 그리고 장비에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하니까.
하지만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아는 그런 전술인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정확히는 적의 지휘부들이 말이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는 놈들이 말이다.
로라스는 그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숫자로 보는, 병사들의 목숨 따위는 벌레처럼 여기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
“같이 죽었어야지! 책임지지 못할 전쟁을 벌였다면, 제 놈들도 면이라는 게 있다면 같이 죽었어야지! 그리 책임졌어야지!”
그 누구도 로라스가 저렇게 분노를 터트리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아군의 피해는 없다시피 한 전쟁.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어 갔다.’
로라스는 그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놈들이 퇴각 명령이라도 내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추격하는 입장에서 포로로 잡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은 아무 명령 없이 도망을 쳤고, 그 탓에 애꿎은 병사들만 피를 흘렸다.
이쪽이 멈출 수는 없는 상황.
결국 적군의 반이 죽고 나서야 수습이 가능했다.
“야휘!”
“네! 주군.”
“포로/로 잡힌 이들을 잘 먹이고, 부상자들은 최선을 다해 살려라.”
“포로로 잡힌 이들이 많아서 당장 보급에…….”
“안다. 하지만 전쟁은 거의 끝나지 않았는가? 앞으로 이들 역시 내 영지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살리는 것에 주력한다.”
야휘는 보급 사정을 생각해야 하지만, 방금 전 로라스의 분노를 본 직후라 당장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사정을 살필 줄 아시니…… 화가 가라앉은 후에.’
야휘가 그렇게 생각할 때, 로라스가 린델을 불렀다.
“린델.”
“네, 주군.”
“이 전쟁놀음을 단숨에 끝내야겠다. 특히 오늘 전쟁의 책임을 확고하게 물어야겠다. 핀론드에서 확실하게 끝내는 걸 바꿀 수 있나?”
“어렵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귀족들의 몸값을…….”
“놀음을 끝내야겠다 했다. 책임도 묻겠다 했다. 내가 더 화를 내다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문제없습니다. 빠르게 마무리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야휘는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긴 핀론드에 관련하여 단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지.’
그래도 자신에게까지 숨긴 일인지라, 곱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린델을 쳐다봤을 때.
“상황을 보고 알려 드리려 했습니다. 주군께서 후작님에게 군 통솔만 신경 쓰게 하라 하신 부분이 있어서.”
린델이 작은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로라스에게도 다시 말했다.
“두 달. 두 달이면 모든 게 정리될 것입니다.”
“진군할 때가 잡히면 보고하라.”
그렇게 로라스가 말하고 막사를 나가 버리고, 린델은 남은 간부들을 보며 말했다.
“더 이상 오늘 같은 위험을 무릅쓴 전투는 없을 것입니다. 정확히는 오늘 이 전쟁은 끝났습니다.”
린델은 그렇게 숨긴 칼 중 하나를 간부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했고.
“그럼 이제 완전히 마무리된 거군.”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난 후 자리에는 야휘와 린델만 남았다.
“언제부터 계획 된 거지?”
“시작할 때부터였습니다. 기다리지 않고 선제적으로 움직인다는 계획하에 사람을 구분했고. 핀론드의 카론 백작은 이쪽 사람이었습니다. 주군의 정보 조직 쉐도가 그때 움직였습니다.”
“으음…… 또 숨긴 게 있나? 공을 다툴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런 경우는 기분이 좋지 않아.”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모든 지휘관이 각자의 임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안배한다는 것이.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알아야 할 것, 있나?”
기분이 많이 상한 듯, 야휘가 별말 없이 다시 묻는 말에 린델이 입을 열었다.
“결정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주군의 결정이 아직 끝나지 않으셨기에…….”
“그게 뭔가?”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군의 결정이 끝나시고, 때가 되면 가장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로라스의 결정이라는 부분을 앞세우자, 야휘도 더 이상 묻기에는 거북한 상황.
“그럼 하나만. 이번과 같은 안배인가?”
린델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 정도의 답만으로도 노련한 야휘가 알아차리겠지만, 앞을 위해 그 정도는 공개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