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3)
괴물이오.
괴물이 쓰러지라 함에 쓰러지고, 열리라 함에 대열은 그대로 갈라졌소.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퍼지는 가운데, 붉은 불꽃이 그대로 앞을 가르는데, 그 누가 괴물에게 대항하겠소.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괴물이 내 앞에 오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것뿐.
괴물에 대항하기 위해 지휘부가 총동원되었지만, 그 탓에 공포는 더 심해졌소.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소.
피하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더이다.
아니, 막은 자는 있었으나, 그대로 통째로 날아가더이다. 그것도 타고 있던 말과 함께 말이오.
공포에……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때, 적 기병이 짓쳐 들더이다.
숫자는 정말 많지 않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소.
괴물이 여전히 하얀 불꽃을 뿌려 대고, 말은 통제에 따르지 않으니 말이오.
…….
비겁한 변명이오. 사실은 말이 통제에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움직임도 없었을 뿐이오.
“아아아아아아아아!”
괴물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청아한 외침 뒤에 따르는 고함.
“무기를 버리고 꿇어라!”
“무기를 버리고 꿇어라!”
“무기를 버리고 꿇어라!”
믿기지 않았소.
이곳은 산이 아님에도…… 그 어떠한 은폐, 엄폐 할 사물이 없는 평야임에도, 그 목소리는 메아리치듯 퍼지기 시작했단 말이오. 그것도 단 한 번의 외침에 말이오.
이성적으로는 그냥 도망치려 하였소.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소.
그 탓에 짐승에게 굴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타아아아아아앙!
처음이었소.
괴물에게 먼저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차아아아아앙!
괴물의 발톱을 처음으로 막은 자는 말이오.
“모두 물러나랏!”
괴물의 명령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찢어지기 시작했소.
그래서 그저 기도할 뿐이오.
신이여! 이 지옥에서 우릴 구원하소서.
* * *
하늘을 열고, 대지를 닫았다.
한 명의 사내가 그 사이에서 오롯이 서서 그것을 맞이했다.
“으으으으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대한 압력에 슈베츠는 활로를 열려 했으나,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존재함으로써가 아닌, 버티고만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였을 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렸다.
하늘 위의 하늘. 세상 바깥의 세상.
찰나의 순간 그는 전부를 깨달았고, 궤를 달리하는 세상을 보여 주는 상대를 보며 모든 저항을 포기했다.
남은 것은 그저 죽음.
슈베츠는 그리 각오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
그 탓에 멍하니 로라스를 쳐다보는 슈베츠.
“애꿎다.”
“…….”
“사람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 가진 것을 알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쫓지. 그리고 꼭 마지막에 그 모순을 깨달아. 모든 것이 끝나는 그 순간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순간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방금 스스로 해답을 찾지 않았던가?
“올바르게 힘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을 터.”
그리고 그런 슈베츠를 보며 로라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힘을 쓰는 방향도 올발라야 할 터. 제힘이 강하다고 따질 때가 아니며, 땅덩어리를 두고 싸워야 할 때도 아니다.”
“…….”
“보지 않았는가? 이 빌어먹을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잡것들이 사람들을 해하는 것을.”
로라스가 말하는 잡것이 뭘 의미하는지 슈베츠도 잘 알고 있었다.
투욱.
슈베츠가 검을 바닥에 던졌고, 로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았으면 그대가 수습하라.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슈베츠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고, 로라스는 다시 소리쳤다.
“까미유! 까메유! 살아 있느냐!”
기병들 사이를 헤집으며 달려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로라스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진형을 가르고, 적장들을 무력화시켰다지만 적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다.
“까미유! 여기 있습니다.”
적지 않은 아군이 희생되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로라스는 까메유가 어디 있음을 묻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 했을 뿐.
“병력을 추슬러라. 본진으로 돌아간다.”
* * *
토오오옹! 토오오옹!
빗방울이 갑주를 두드리는 소리.
‘이게 뭐지?’
황금 기사단의 일원인 파우치는 자신의 갑주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의아했다.
‘이건 무슨 의미의 마법인가?’
갑주에 튕겨날 뿐, 그 비에는 어떤 물리력도, 그렇다고 어떠한 속성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체감도 안 될뿐더러 자신의 갑주를 믿어서다.
자신들의 갑주가 황금빛이 난다지만, 그건 정말 황금이라서가 아니라 마법적 처리 때문이었다.
갑주란 원래 크고 단단할수록 좋지만, 그럴수록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갑주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물건들. 게다가 약하지만 낮은 서클의 마법들을 무효화시키는 안티매직도 걸려 있다.
‘찝찝하게.’
파우치는 이내 눈앞의 적들을 정리하기 위해 창을 고쳐 잡았다.
근데 말이다.
‘뭐지?’
창을 들 때, 그것을 휘두를 때, 손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이질감.
그것이 움직임에 큰 제약을 주지는 않지만, 분명 평상시와의 감각과는 달랐다.
고수일수록 미약한 차이는 커다란 영향으로 변하는 법. 특히나 지금처럼 방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전장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눈앞에 날아오는 적장의 창을 보면서도 백 프로의 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니, 전력은 다했다. 다만 더 움직여야 할 창이 미세한 차이를 두고, 움직이지 않았고.
“하아아앗!”
적장의 창이 뿌리는 포스 충격파를 완벽하게 막아 내지 못했고, 그 여파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쉬리리리릿!
그리고 그 순간의 틈을 이용해, 적은 창을 뱀이 된 것 마냥, 공간을 흔들어 대며 공간을 점했다.
“커헉!”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창이 파우치의 가슴을 관통하고 만 것이다.
“다 죽엿!”
그리고 창의 주인 야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뭔진 모르겠으나!’
저 비를 맞은 이후로 황금 기사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뭐랄까? 움직임이 둔해졌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상황이 좋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여전히 아군의 포스 유저들은 쓰러져 가고 있었고, 병사들은 여전히 몸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하나씩 쳐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방금 보았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번천! 그대는 그를 감당해야 한다!’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을지, 아닐지는 지금 나타난 번천에게 달렸다.
그가 황금 기사단의 마스터를 막아 내면 버티는 것이고, 못 막아 내면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다.
‘주군이 올 때까지만!’
야휘는 번천이 그 시간까지만 버텨 주길 간절히 바라며…….
“흐아앗!”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 *
―넌 안 되겠다. 차라리 포스를 더 갈고 닦는 것이 낫겠다. 게다가 넌 운까지 좋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죽도록 힘들게 수련했던 마법을 단 한마디의 말로 무용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목숨 바쳐 모셔야 할 주군이었다.
하늘의 계시처럼 그 말만을 따랐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였다. 주군을 모시면서 에르자일 님에게 부지런히 방법을 구한 것은 말이다.
―올바른 방법이라 하더라도 한계 이상의 수련은 반드시 화를 불러일으키는데, 번천 님의 방법은 올바르지 않기까지 했어요.
나보다 몇 살이나 어렸지만 그 말에는 무게가 있었고.
―포스를 익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오는 것처럼, 마법사들에게는 마나 폭주라는 것이 있어요.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하루 종일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 하지만 거기에 상반 된 느낌으로 뿜어져 나오는 위엄으로,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에르자일 님은 그렇게 말했었다.
―수련하지 마세요. 사정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정 해야겠다면 제대로 하세요.
그리고 나의 마탑 출입을 허용하였다.
그때부터였다. 포스 수련과 함께 마법이란 학문을 정식으로 배운 것은.
꿈을 꿨다.
더블 마스터라는 타이틀을 지니면 주군을 더 잘 모시지 않을까?
간절했다.
내겐 테라 같은 재능이 없었으며, 오리시암 같은 번득이는 임기응변이 없었고, 토니 경 같은 노련함도 없었다.
착각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주군에게 귀하게 쓰였지만 나는 곁을 지킬 수 있었을 뿐, 이런저런 일을 하며 겉돈 건 사실이니까.
그런 와중에 에르자일 님의 가르침은 귀했다.
―음! 로라스에게 뭘 배웠는지 모르지만, 번천 님이 마나와 포스를 겸하여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어요. 특히나 물 속성에 관한 마나 감응력은 제 예상을 훨씬 초월했어요.
아쉬웠다.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습득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내 한계는 명확했다. 그녀가 무척이나 아쉬워할 정도로 말이다.
―몇 개만. 몇 개만 잡고 파 보겠습니다.
그래서 무식한 나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능숙지 않은 여러 개의 마법을 배우면서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실용성이 있는 마법을 몇 개 죽도록 수련하는 방법을 말이다.
그중 하나가 지금 사용한 스틸 레인이었다.
포스가 있는 자신이 파괴력을 지닌 고서클의 마법을 익힐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스틸 레인은 파괴력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범위를 내 마음대로 뿌릴 수 있었고, 맞은 자들은 움직임이 둔화된다.
지금이야 자신의 마나가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상대의 항마력이 높아 별 위력이 없어 보이지만, 예전 에르자일은 락에서 행패를 부리던 용병단 하나를 이 마법 하나만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었다.
스틸 레인은 그 광경을 보고 배운 마법.
여하간 마법 시전은 성공했는데, 별로 둔화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상관없다. 포스를 소모하지 않고도 적에게 눈곱만큼이라도 피해를 줬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일 테니.
“재미있는 마법을 쓰는구나. 마법사!”
눈앞에 달려오는 황금 기사.
쉽지 않을 것임은, 아니, 나보다 한 수 위라는 건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검에 서린 포스는 자신이 정말 기를 써야 한 번쯤 보일 수 있을 만한 것.
‘그래도 기회는 올 것이다!’
의도치 않게 그는 자신을 마법사라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건 대단한 이점이다.
“칼을 마법 지팡이처럼 쓰는 전투 마법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지.”
완벽한 착각!
‘첫수에 반드시 이득을 취해야 한다!’
그 이득이 놈과의 차이를 줄여 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 내야 했다.
“탄!”
놈의 착각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검에 마나를 서리게 만들었고 쏘아 내었다.
당연하게도 상대는 너무 쉽게 그것을 베어 버렸고, 그사이 공간은 어느새 놈의 창의 사정거리에 다다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성공을 위해서 놈의 창에 무방비로 다가갔다.
‘사자가 토끼 잡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으로 창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창에는 움직임이 없었다.
‘성공했다!’
별다른 포스가 실리지 않는 그런 찌르기.
몸을 비틀었고, 창이 겨드랑이 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푸우욱!
소리까지 들리는 육타음. 동시에 어께에서 느껴지는 화끈함.
그 고통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둔하고, 재능은 없지만, 놈보다 실력은 분명 떨어지지만 말이다.
난 내가 할 일을 잊는 그런 머저리는 아니다.
고통에 절로 힘이 들어간 손으로 움켜쥔 검을 놈에게 찔러 넣는 걸 잊지 않았다.
까아아앙!
딱딱한 손맛에 이어지는 자유로움.
놈의 갑주를 그렇게 뚫었고, 그 안의 살덩어리에 꽂아 넣는 순간, 그대로 아래로 내려 버렸다.
“으아아악!”
“으하하하하!”
고통 속에서 이를 보이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건, 바닥에 떨어진 놈의 팔 때문이리라.
“죽엇!”
그러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