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2)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근육이 수축되었고, 덕분에 움찔움찔한 것도 몇 차례.
적 기병들의 돌격에 아군이 유린될 때마다 몇 번이나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설 수가 없었다.
―절대 나서서는 안 됩니다. 번천 경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검이니까요.
린델의 신신당부.
사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임무는 잘 알고 있었다.
―테라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리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버텨 줄 전력이 당장은 없구나.
주군이 이곳에 자신을 남긴 이유가 바로 자신의 임무.
‘얼른 오너라!’
번천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적의 황금 기사단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저 위세만 꺽어 주시면 됩니다. 아군의 진형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말입니다.
―네가 해야 한다. 버텨야 한다.
머릿속에 자꾸 두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이기면 안 되는 건가?’
왜 자꾸 자신에게 버티라고만 하는 걸까?
그만한 믿음까지는 보이지 못한 걸까?
번천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경은 독하지 않아요. 테라 경과 경의 차이가 그걸 겁니다.
하다못해 오리시암까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모든 걸,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줄 안다.
독기가 없어 보이는 건, 스스로 가늠했을 때 안되는 건 고민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에 전력을 다해서다. 그래서 그렇게 보인 것뿐이다.
‘이긴다! 죽인다!’
번천의 생각은 말로 변환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씹고 또 씹었다.
“이긴다. 죽인다. 이긴다. 죽인다.”
번천은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금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번천은 기병들에게 소리쳤다.
“죽지 마라. 우리가 무너지면 남은 이들도 무너진다!”
“우오오오오오!”
“힘든 전투지만 지레 불리하다고!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병사들이 소리를 모으며 호응하는 목소리에 번천은 자신의 창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이길 것이다. 내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번천이 달리고, 그 뒤를 따라 기병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하아아앗!”
확실히 마법은 쓸모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집단전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막힌 것은 뚫어 내고, 걸리는 것은 그대로 치워 냈다.
“이놈!”
그런 와중에 욕설을 하며 달려오는 놈들이 있었다.
칭찬해 줄 만하다. 보고도 덤비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아앗!”
기사단들인 듯했다.
제법 날카롭게 창을 찔러 오는 기세, 순수한 힘만으로는 쉽게 처리가 힘든 걸 보면 말이다.
“후우우!”
하지만 뭐 달라질 것이 있겠나.
탁한 진기를 뿜어내고 새로운 진기를 흡입했다.
타아아아앙!
찔러 오는 창들은 그냥 날려 버렸다.
미는 창은 잡아 던졌고, 끊어 치는 창은 밀어 버렸다.
“흐으음!”
그런데 숫자가 많긴 했다. 그 탓에 허벅지를 찔러 오는 창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다.
물론 대가는 치러졌다.
부우우우웅!
절로 힘이 들어간 창에, 희망을 보던 놈을 말과 함께 날려 버렸다.
동시에 창에 진력을 실었다.
눈앞의 적들은 포스 유저들.
제대로 된 내력을 실을 때가 되었고. 그 어떠한 제약 없이 봉을 휘둘렀다.
터어엉! 퍼어어억!
손바닥에 걸리는 각기 다른 저항감을 느끼며 휘두르고 또 휘둘렀고, 어느샌가 메린 백작을 눈앞에 뒀다.
“이놈, 감히…….”
잡아야 할 셋 중 가장 존재감 없던 놈. 초전에 잡은 바르샤바에 비해서도 한참 떨어지는 놈.
“지금이라도.”
뭐라 헛소리를 지껄이려 했지만, 놈은 불행했다.
웬만하면 마지막 유언이라 생각하며 들어 주겠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느껴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제대로 힘을 써야 할 상대가 악에 받쳐 쫓아오고 있음을.
그대로 봉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마지막 말을 들어 주지는 못했으나, 고통 없이, 제 놈의 힘이 너무나도 부족함을 체감하지 못하고 갔으니 원망은 없을 터.
“아아아아아아!”
이제 주목하라.
“아아아아아!”
공포에 떠드는 이들이여 날 주목하라!
천왕지로天王之路.
천왕의 기운을 사방에 뿌리며 이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으로만 보지 말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까?
솔직히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저 감정적으로 그렇게 될 거라 믿었을 뿐.
테이밍 마법을 이리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테이밍은 마물을 제어하는 마법이다.
잡기로 생각되는 마법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그 어떤 것보다 효율적인 마법.
천왕지로와 만난 테이밍의 효과는 분명 있었다.
주춤거리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들. 기다리고 있던 아군에게 진입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그때였고.
“더 이상 모욕하지 말라!”
슈베츠가 뒤를 잡은 것도 그때였다.
까아아아앙!
손이 저릴 듯한 충격.
확실히 그는 강하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진심이다.
이 세계에서 포스를 수련하여,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 몇 안 되는 무인 아닌가?
하지만 그는 길을 잘못 들었다.
길만 제대로 갔다면 분명 대종사급의 무인이 되었을 테지만, 지금 그는 결여된 것이 있었다.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닌 마치 남의 것을 빌려 쓰는 듯한 공허함.
그래서였다. 그에게 허상을 쫓았다고 한 것은.
“정당하게 마주하라! 에렌의 영주여! 그리고 증명해 다오. 내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저만한 무공을 가졌다면 누구의 인정은 필요 없었을 것인데. 어린아이처럼 왜 저러는가?
“그리고 허상을 쫓았다는 그대의 말 역시도……!”
그의 창에 서린 백염을 보며 말했다.
“쫓으려면 그분의 내면의 강함까지 쫓았어야지. 왜 겉모습에 드러난 것만 쫓았을까?”
“…….”
“둘 다 쫓았다면 훌륭한 적수가 되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지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슈베츠는 부르르 떨었다. 그도 내심 알고 있었을까?
“헛소리! 이미 포스의 정점에 섰는데, 무슨 강인함이 더 남아 있을까?”
발끈한 걸 보며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아닌, 나중에 진짜 길을 알려 줄 수 있는데. 받아들이겠나?”
허상을 쫓았다 하나 지니고 있는 힘은 진짜. 나라 하더라도 반드시 전력의 반 이상을 소비할 것이 분명하기에 물었다.
“지금! 증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슈베츠는 그것을 거절했다.
심마에 빠져들어 간 것으로 보이니, 어찌 보면 저게 정상적인 반응일 터.
“모두 물러나랏!”
이미 심리적으로 제압당한 이들. 명령을 거스르는 자는 없었다.
흑아에게서 내려왔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너라.”
마상에서 전력의 힘을 썼다가는 흑아도 몸통이 주저앉을 터. 흑아를 보내자마자 슈베츠 역시 말 위에서 내려왔다.
“잘못 오른 산은 다시 내려오면 된다. 그리고 올바른 길로 다시 올라가면 된다. 다른 길이나 극에 이르면 모두 같아지는 이치로 그대는 다시 금방 올라서겠지.”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저만한 무인이 마물 토벌에 힘을 더하면 일은 한결 수월해질 터. 그래서 정말 죽이고 싶지 않다.
“에렌의 영주! 내 위에 선 듯한 그 말투가 무척 거슬리는군! 그대는 아직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지 못했다!”
“증명하면 따를 텐가?”
“그딴 말은 증명하고 하랏!”
그의 창끝에 피어오르는 포스.
그래. 인간은 보지 못하면 믿지 않는 종족.
“오라. 하늘 위로 하늘이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니. 바른길로 돌아올 기회를 가지길!”
개천지보 십보, 아지니 我知你.
움직였다.
* * *
무의미했다.
모든 것을 제대로 막아 주던 강철 방패는 종잇장처럼 찢어졌고, 접근을 멈추게 하고, 낙마를 시켜 생존율을 높여 주던 강철 창날 역시 너무나도 어이가 없게 잘라졌다.
분명 모든 대책이 무의미했으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죽어!”
방패가 찢기면 몸통으로 막았고, 창날이 잘리면 정말 나무 막대기로 변한 창으로 달려들었다.
“말! 말을 노려!”
몇몇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사실 그것마저 용의하지 않았다.
창끝이 다가가기 전에 이미 그들은 자신의 코앞에 있었고, 앞 열의 전우들이 당한 그 상황이 자신들에게 반복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탄탄히 뭉쳐져, 단 한 번도 붕괴되지 않았던 진형이 갈라지고 있을 때.
“흐아앗!”
에렌 군에서도 포스 유저들이 나섰다.
“겁먹지 마라! 그들도 인간이다!”
남부의 귀족들과는 결이 다른 에렌의 귀족들.
북부의 귀족은 펜보다 무기를 먼저 손에 쥐는 이들이었고, 애초에 그런 이들만 간부로서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었다.
“도륙하라!”
특히나 선두에 서서 황금빛 갑주를 단숨에 갈라 내는 야휘 후작은, 그가 왜 베스타인 공작에게 중임을 받았던 장수였는지를 알려 주었다.
‘내가! 내가 해야 한다!’
이 기세를 놓치면 뒤가 없다.
황금 기사단에 중앙이 붕괴되면, 남부 기병들의 밥이 될 뿐이다.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다.
방금 한 명을 베어 냈지만, 사실 그 기사의 방심이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어랏!”
동료의 죽음을 본 두 명의 황금 기사들이 야휘에게 달려들었다.
야휘는 곧게 날아오는 두 개의 창날을 좌우로 쳐 냈다.
지이이이이잉!
손아귀에서 전해져 오는 짜릿함.
왜 사람들이 황금 기사단, 황금 기사단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포스 마스터인 자신이 고작 창을 쳐 낸 것에 불과함에도, 짜릿함을 느낄 정도라면 말이다.
단숨에 전력을 다해 반격하고 싶으나, 자신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이런 난전에서 포스 마스터를 막을 수 있는 자는 같은 포스 마스터밖에 없다.
자신의 검에 이미 포스를 형상화시키고 학살에 가까운 공격력을 보이는 세 놈.
포스 유저라면 이쪽에서도 막아 낼 수 있는 전력이 있지만, 저 세 놈은 아니다.
오로지 자신밖에 없었다.
버티는 게 우선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포스 유저의 숫자라면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것.
“백작님을 보호하랏!”
미리 계획한 대로, 호위 기사들도 자신의 주변으로 똘똘 뭉쳐 적의 기세만을 죽이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찔러!”
또 당장 크게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창병들의 창은 그들의 주의를 뺏어 줄 것이다.
그렇게 긴 돌파선을 만들려는 자들과 그 선을 지우려는 자들 간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아니, 공방전은 아니다. 야휘를 비롯한 병력이 일방적으로 밀렸다.
특히 골든 나이트의 위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그나마 기마의 속도가 줄었고, 야휘가 그를 견제하지 않았다면 그 한 명으로 주변 병력이 전부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으아아악!”
그사이 수많은 병사들과 간부들이 쓰러져 갔다.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야휘는 진심으로 미치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들과 생사결을 겨루고, 최소한 셋 중 한 놈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야휘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짊어진 짐이 크다.
지금도 쓰러지고 있는 이들의 희생. 거기에 따른 죄책감은 모두 온전히 짊어져야 할 자신의 몫.
중요한 건 그런 희생이 헛되지 않아야 최소한 자기 위로라도 삼을 수 있다는 것.
버텼다.
“우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검이 날아들었다.
“마법사다!”
적에게서 튀어나오는 외침.
야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달려오는 번천. 그가 내세운 창 앞으로 투명하면서도 이질적인 뭔가가 있었다. 그건 분명 포스가 아니었다.
‘번천 경이 마법을?’
사실 번천이 매지스터 급은 아니나, 수 속성의 마법만큼은 그에 준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
아군도 모르는 사실이니, 당연히 황금 기사단도 달려드는 번천을 전투 마법사로 생각했다.
“그냥 두면 귀찮아진다!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적장의 목을 따라!”
그렇게 골든 나이트가 번천을 향해 달려갔다.
전장의 상황이 급변한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작은 폭우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