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1)
‘무슨 말인가!’
슈베츠는 진정 그렇게 묻고 싶었다.
가능했다면 그는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
단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자신의 창을 짓누르는 그의 봉이 단숨에 자신의 머리를 부숴 버릴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나는 이런데 너는 입을 열 수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겨우 베스타인 공작과 같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꼬락서니를 보라.
이런 모습은 십수 년 동안 무공 이외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던 자신을 부정하는 일.
“하아아앗!”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전력에 분노의 힘이 더하여, 슈베츠는 기어코 로라스의 봉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반격이다.
슈베츠가 올린 창을 그대로 사선으로 내리그으려는 순간이었다.
“이놈!”
하지만 슈베츠는 창을 내리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창을 받을, 받아야 할, 반드시 그리해 줘야 할 상대가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어디를 가느냐!”
슈베츠가 악을 지르는 사이, 로라스는 이미 말머리를 돌려 달리고 있었다.
“막아!”
“견뎌!”
양 떼에 뛰어든 늑대가 아닌 호랑이.
까아아앙! 터어어엉!
호랑이의 이빨은 무기를 부수고, 발톱은 갑주를 깨부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두 번이 없었다.
“네 상대는 나다!”
슈베츠는 다급해졌다.
자신이 아닌 그 누가 있어 저 무서운 공격을 막아 내겠는가?
그는 맹렬하게 그의 뒤를 쫓았고.
“놈! 이쪽이다!”
소리쳤다.
“이놈!”
로라스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기에, 그의 등이 무방비로 보였다. 하지만 차마 그의 등에 창을 밀어 넣지 못했다.
어떻게 만난 적인가?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으아아악!”
“막아! 밀어붙이란 말이다!”
비명과 아군이 무너지는 소리에, 미친놈이라 불리는 슈베츠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이건 네 탓이다!’
슈베츠가 창에 포스를 모았을 때, 로라스가 날아올랐다.
‘뭐지?’
날아오른다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말 그는 날아올랐다.
그리고 봉을 기묘하게 휘둘렀다. 그의 창에 깃든 백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그가 입고 있는 갑주처럼 오색찬란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그 순간이었다.
오색찬란한 빛 덩어리가 비산되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 * *
대륙 곳곳의 학자들은 마법사가 전쟁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관해서 수많은 연구를 해 왔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자들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전략 무기.
물론 전제 조건이 있었다.
6서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일정 수준 이상일 것.
스스로 사용하는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질 것.
이 모든 조건을 부합하는 자를 사람들은 매지스터라 부른다.
그 대응 방법에도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뭉쳐 있지 말 것.
뭉쳐 있다면 그 매지스터를 자유롭게 두지 말 것.
또는 마법이 완성되기 전 파훼할 수 있는, 같은 급의 매지스터 또는 포스 마스터가 상대하게 할 것.
그렇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라면 반드시 한 가지를 하라 했다. 그건…….
무조건 도망칠 것.
이유는 간단하다.
포스 마스터는 강력한 포스로 모든 것을 뚫을 힘이 있다고 하지만, 매지스터는 그와 다른 힘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일정 부분의 공간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불로 태워 버리든, 얼려 버리든, 아니면 모두 날려 버리든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광역 마법이라 부른다.
그리고 지금 그 광역 마법이 로라스의 창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철봉을 마법 지팡이 삼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속성이 물리력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떻게?’
갑작스러운 로라스의 변화에 슈베츠는 잠시 생각이 멈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떠올랐다.
그의 알려진 스승이 권신 에르페유 이외에도 한 명이 더 있다는 것을.
제국이 아닌 대륙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마법사. 역시 한 손에 꼽히는 마탑의 탑주인 헤르메스의 제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로라스가 실버스워드의 우승자이기도 하며, 보인 실력 중 마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사?’
슈베츠는 그런 사실조차 듣지 못했기에, 지금 로라스가 하려는 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
파아아아아앗!
로라스 주변으로 비산된 기운이 강렬한 압축음을 보였고.
퍼어어엉! 퍼어어엉!
바닥에 닿는 순간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리 큰 위력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굉장한 범위로, 수많은 오색의 기운들이 뿌려졌으니 위력은 강하지 않을 터.
덕분에 사람은 괜찮았다. 하지만 그들이 타고 있는 전마들은 아니었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다. 전마를 키우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기수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법에 대비한 훈련은 불가능하다.
히르르릉!
놀란 말의 울부짖음.
“으아악!”
그 탓에 수많은 기수들이 낙마를 하며 비명을 터트렸다.
로라스가 뭐 할 필요가 없었다.
놀란 아군의 말들이 낙마한 기수들을 밟기 시작했으니까.
‘안 돼!’
슈베츠는 자신에게도 날아오는 오색의 기운을 잘라 내며 달려 나갔다.
하지만 얄밉게도 로라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슈베츠는 급한 대로 들고 있던 창을 그대로 던졌다.
속도를 늦추기 위한 투창.
타아아앙!
그리고 그 창은 당연하게도 너무나 수월하게, 로라스의 봉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쳐 내는 로라스를 보며 슈베츠는 지체 없이 달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로라스의 앞에 아군들이 절로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앞은 아군이 막고 있었다.
열렸다 닫히는 꼴에 슈베츠는 소리를 질렀다.
“비켜랏! 뭐 하는 짓이냐!”
“그게…… 말이 통제에 따르지 않습니다.”
다급한 아군 병사의 목소리.
슈베츠는 포스를 뿌려 길을 열었으나, 다시 한 번 로라스와의 거리가 벌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로라스가 움직였고, 같은 상황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매지스터라는 걸 알아야 했다.’
사실 알았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마법사가 주문을 완성하기 전에 공략해야 했는데, 로라스는 포스 마스터이기도 하지 않은가?
알아도 막을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활개를 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 터.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오냐! 언제까지 포스와 마나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지 보자!’
슈베츠는 반드시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잡혀라!’
그 기회는 메린 백작이 합류하는 순간까지 오지 않았다.
* * *
“방패 들어!”
“멍하니 뒈지지 말고 들어 올리란 말이야. 밀리면 다 죽어!”
구멍 난 곳을 중년 병사가 메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찔러 넣어!”
“다 죽일 작정이야! 넘어트리지 않으면 그냥 기병의 밥이란 말이다!”
장창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간부들.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이 전투가 미친 짓거리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은폐, 엄폐가 불가능한 평야에서 기병들을 상대한다?
비록 중갑보병에 병종 특성이 우위라 하나, 그건 기병들이 뒷받침되어 줬을 때의 일.
움직임이 자유로운 적 기병에 반해 아군은 꼼짝 없이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수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간신히 진열을 유지하고, 장창병들이 기병들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려는 순간.
뿌우우우우우웅!
나팔 소리가 들리고, 적 기병들이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부상자를 뒤로 보내라. 진열을 가다듬어라.”
“일열! 뒤로 물러나 체력을 비축하라. 예비대 자리를 메워!”
“다시 들어올 것이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제 몸무게 정도는 나갈 만한 무게의 갑주에 방패 등을 가지고 움직이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해야 했다.
진열을 가다듬은 적 기병은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몰려올 것이다. 그 전에 준비를 끝내야 했다.
이미 두 번의 돌격을 경험한 보병들은 재빨리 위치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막을 만은 한데…….”
야휘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직 전력이 나서질 않았습니다.”
린델은 저 멀리 황금빛을 뿜어 대고 있는 기사단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황금 기사단.
대륙에서 그 위력을 보인 적은 몇 차례 없었다. 하지만 그 몇 차례에서 엄청난 능력을 보였던 기사단.
그들은 아직 전장에 나서지 않고 있었고, 린델은 그것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영악한 놈들이야……. 이쪽의 기운이 빠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막을 수 있을까요?”
“일정 시간이라면……. 약속된 시간만 버티면 돼. 그뿐이야. 그것만 생각해.”
로라스의 절대적인 신뢰. 그게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전투.
“그리고 번천 경을 믿을 수밖에.”
* * *
“슬슬 힘이 빠지지 않았겠나?”
메린 백작을 대신해 오천의 병력을 지휘하게 된 캄투 백작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두 차례나 돌격을 감행했음에도 적군의 진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물론 막대한 피해는 줬다. 또한 아군의 피해가 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
생각해 보면 패배에 가까운 전투였다.
그런 와중에도 황금 기사단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고작 서른네 명으로 구성된 기사단이었으나, 그 위력은 웬만한 기사단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다.
포스 마스터가 셋에, 남은 인원 전부가 숙달된 포스 유저들이다. 그들이 진즉 나섰더라면 전투는 훨씬 수월했을 터.
하지만 그들의 엉덩이는 너무 무거웠다. 지켜만 볼 뿐 나서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너무 뻔했다. 그래서 얄미웠다.
독립 작전권을 지닌 이들만 아니었다면, 당장 뛰쳐나가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선 이렇게 압박을 주는 것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들도 지치고 있네. 이번이 마지막 돌격이 될지도 모르네.”
캄투 백작의 말에 골든나이트, 에브라가 입을 열었다.
“걱정이 많으시군요. 제가 타이밍을 잡을 것입니다.”
캄투 백작은 다 죽고 난 뒤에 시작할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기병들의 전열이 다시 정렬되었다.
에브라는 감투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저희도 들어가겠습니다. 전열이 다소 무너지더라도 퇴각 명령을 내리지 마십시오. 그래야 저희가 중심부를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캄투 백작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걱정 말게. 이번엔 완벽하게 무너트리도록 하지. 이런 걸로 시간을 끄는 것도 웃긴 일 아닌가?”
에브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러고는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보며 외쳤다.
“전원 전투준비!”
늘어서 있던 기사단원들이 삼각형 모양으로 전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작하시지요.”
에브라의 말에 캄투 백작은 소리쳤다.
“전군 돌격!”
준비된 기병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가자!”
황금 기사단도 천천히 말을 몰았다.
‘최대한 힘을 빼낸 후에!’
에브라는 이 난전에서 자신의 단원들을 잃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주변을 돌다가 완벽한 기회를 잡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놈들은.’
에브라는 저 멀리 한 무리의 기병들을 보며 말했다.
자신들이 움직이지 않았듯, 에렌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부대가 있었다.
이백여 명의 기병부대 말이다.
‘우리를 대비하기 위해서인가?’
솔직히 꼴같잖았다.
자신들을 상대로 고작 이백?
에브라에게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