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80)
‘이런 걸 입을 줄 몰랐는데 말이지.’
오색찬란한 갑주.
언제, 어느 장소든 눈에 대번에 뜨일 만큼 휘황찬란하다. 그리고 난 이런 갑주를 내가 입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참으로 거시기하게 레인보우라는 이름까지 지닌 이 갑주는 정말 비싼 물건이다.
마법에 의해 일정한 물리력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흠집 하나 내지 못하는 물리 방어력은 물론이고, 마법 저항력까지 기본 장착된 물건이니까.
이거 지금 못 만든다.
현 시대 마법으로는 물론이고, 그 마도시대 때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는 유물이니까.
굳이 이런 물건을 급히 공수하고 착용한 이유는 당연히 있었다.
내가 나라는 걸.
적에게 에렌의 영주가 어디에 서 있는지 확실하게 인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갑주는 육체를 전쟁용 육체로 만든 것처럼, 머리도 전쟁용 두뇌로 바꿔서 나온 결과.
내가 제거해야 할 놈은 셋.
한 놈은 무공 광에 한 놈은 제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 했고, 마지막 하나는 돈에 환장한 놈이라 했다.
다행이지 않는가?
세 놈을 동시에 엮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말이다.
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아갔다.
대군 속에서 내가 봐야 할 자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참으로 돋보이는 놈들이 아닌가?
입술을 일자로 곧게 다물고 내 눈을 쳐다보는 놈은 무공 광일 것이고.
탐욕스럽게 이 갑주를 보는 놈은 돈에 환장한 놈일 것이고.
마지막으로 제 능력을 보여 권력을 가지려는 탐욕까지.
‘다만 저놈들은.’
그 셋보다는 못하지만 강한 놈들이 몇 있었다. 특히 저 황금 갑주를 두른 놈들.
‘야휘와 번천을 믿고 가야 한다.’
여하간 보았으니, 이제 보여 줄 차례.
보라!
창을 들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기운을 품지 않았다.
알아나 보겠는가?
이 나를?
당연하게도 놈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때부터 존재감을 끌어 올렸다.
의외였다.
그러자마자 흠칫하며 반응을 보이는 놈이 있었다.
‘슈베츠였지?’
무공에 미쳤다던 놈.
예상외로 그는 빠른 반응을 보였다. 그건 놈이 저 셋 중 가장 강한 자라는 것.
더 존재감을 끌어 올렸다. 꽤나 올렸다 싶었을 때쯤 돈에 미친 놈이 반응을 보였다.
거기까지다.
더 이상 존재감을 끌어 올릴 이유가 없다. 여태까지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면 허울 좋은 포스 마스터일 뿐이니까.
보여 줬으니 묻는다.
내가 너희 셋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
그 욕망이! 나라는 미끼를 덥석 물을 만하냔 말이다.
* * *
“역시,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메린 백작은 중얼거리며 전방을 쳐다봤다.
약간 등 떠밀려 나오기는 했으나, 사실 더 늦출 수 없었으니 나왔을 터다.
그리고 결과는?
수차례 척후를 확인한 자신이 바보같이 보일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적들은 멍청하게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지 않은 것이다.
그 대가로 당황했을 것이고,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앞으로는 일만이 넘는 기병대에 다섯 개의 기사단, 뒤로는 수배 많은 병력의 아홉 개의 용병대.
그런데 말이다.
‘이쪽이 더 만만했단 말이지? 숫자 때문인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도 방향을 틀지 않고 움직이는 걸 보면 말이다.
메린 백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적의 기병은 기껏해야 이천.
저 숫자로 아군과 상대하겠다는 것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기병 병력의 차이는 보병 병력에서 차이가 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공간에서 계속 싸우는 것과는 달리, 기병의 공간은 여러 공간, 더 많은 부딪침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숫자 부족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뭣보다!’
적의 중갑보병들의 숫자가 많은 걸 감안할 필요가 없다. 자신들은 굳이 저 보병들 사이로 뛰어들지 않아도 되니까. 게다가 이틀이면 본대까지 합류하는 상황.
시간마저 자신들의 편 아닌가?
메린 백작은 슬쩍 슈베츠와 골든나이트를 흘겨보았다.
‘어차피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인데.’
결국 공을 세우려면 저 미끼를 누가 성공적으로 먹을 수 있느냐일 터.
지나가던 애도 알 수 있다.
에렌의 영주가 대범하게, 아니 멍청하게 미끼를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이다.
‘아마도 어떻게든 유인하여 중갑보병들과 처리하고 싶겠지?’
중갑보병. 거대 방패와 강철 방패는 무시할 게 못 됐다.
거기에 저 멍청한 에렌의 영주와는 달리, 저 보병 집단의 수장은 야휘 후작일 터.
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틸 것이고, 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저 기병들이 살아 있어야 가능한 법.
‘다행히도 내게 지휘권이 있으니.’
공을 뺏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렇게 메린 백작이 온전히 저 미끼를 어떻게 먹을지 고민할 때였다.
“하아아앗!”
누군가 미끼를 향해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다.
“슈베츠 남작!”
그 사람은 바로 슈베츠.
메린 백작은 급히 그를 뒤따르며 소리쳤다.
“슈베츠 남작! 명령이다! 멈춰라!”
그의 말에도 슈베츠 남작은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갈 뿐이었다.
* * *
‘고수! 다시 못 볼!’
슈베츠 남작은 가슴이 뛰었다.
언제였을까?
경지에 오른 적이 있었다.
우물 밖을 벗어난 개구리처럼 그렇게 좋아 날뛰던 적이 있었다.
태산 같던, 그래서 감히 오를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그런 산을 넘었을 때였다.
포스의 끝을 보았다 생각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으니,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지에도 신경을 쓰고, 중앙 정치라는 것에도 신경 쓰려 했었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능히 고위 귀족으로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리했었다.
그때 봤다. 보고 나서 다시 우물 안으로, 아니 새로운 우물이 생긴 경험을 했다.
초월자. 공작 베스타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벽을 몇 개나 넘었으리라는 것을.
영광스럽게도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 관심의 이유는 그리 좋지 못했다.
―애쓰지 마라.
그 단 한마디.
대체 뭘 애쓰지 말라고 했던 걸까?
그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경이라 생각했는데…… 감히 따라갈 엄두조차 못 낼 사람이라…… 동경만 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어느새 새로운 산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되고 싶었다. 격이 다른 그곳에 올라가, 맛이라도 보고 싶었다.
단순한 그 열망은 어느새 욕망이 되었다.
영지? 정치? 예전보다 더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고, 미칠 듯한 욕망만을 좇았다.
그럴수록 애쓰지 말라는 그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악착같이 좇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밟을 정도가 되었다 여겼을 때, 에렌의 영주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극심한 상실감에 빠져든 건 그걸 인지했을 때였고 말이다.
웃기는 일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엄청난 시련을 준 자 아니던가?
상실감 뒤로 온 건 고독감이었다.
이뤘는데 그것을 확인해 줄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그것을 확인하고 알아줄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호출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 보았다.
자신을 확인해 줄 사람을.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게 해 줄 사람을.
북부와 남부의 전쟁? 권력 다툼?
그런 하찮은 것들은 중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지 않은가?
자신의 모든 욕망, 희망이 말이다.
그 결과가 절망이 되더라도…….
자신은 반드시 그에게 달려가 확인해야 했다.
* * *
“부대 정렬!”
슈베츠를 쫓던 메린 백작은 추격을 멈췄다.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슈베츠 남작은 분명 강하다.
같은 포스 마스터라 하나 그 차이쯤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가 뭔 소용이란 말인가?
무공만 아는 미치광이.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놈과 놈의 부대가 한차례 로라스의 힘을 빼 주면 그것대로 좋은 거니까.
그런데 말이다.
‘왜 그리로 가는 건데?’
로라스가 적군을 향한 다른 공터로 빠지고 있었다. 중갑보병과 합류하여 방어하는 게 아니다.
‘저 미친놈!’
정말 천도 안 되는 기병들로 자신들을 상대하려 한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슈베츠보다 더 미친놈 아닌가?
메린 백작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골든나이트도 자신을 보고 있었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 공적은 필요 없습니다만.”
메린 백작은 대번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군인이 아닌 골드맨의 사적인 기사.
“백작께서는 전공이 필요하시고, 전 그저 도우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만 전리품은…….”
메린 백작은 확인 사살하듯 제 속내를 보이는 그를 보며 말했다.
“이 전투의 전리품은 모두 그대의 몫이 될 것이오.”
골든나이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심하고 잡아 오시지요. 두 개의 연대 병력만 주시면 남은 것들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메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꼬리를 잡히지 마라!”
번천 대신 부관으로 오른 까미유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외침은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에도 용케 부대원들에게 전달되었고, 병력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작정 도망칠 수도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미끼라는 것을. 도망은 치되 추격할 여지를 줘야 한다는 것을.
그 어려운 걸 그들은 훌륭하게 해내었다.
사실 어렵지 않았다.
그저 로라스의 등만 보고 쫓아가면 되는 거니까.
‘얼마나 쫓아오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 적의 규모조차 예상을 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게 더 속이 편했다.
애초에 적이 자신들의 배에 가까운 병력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걸 눈으로 보면 속만 시끄러워질 테니까.
쌔애애애애앵!
이 속도에서도 용케 화살을 날리는 적이 생겨났다. 그만큼 거리가 좁아졌다는 뜻일 터.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정면, 로라스의 등뿐이었다.
얼마만큼 달렸을까?
마침내 부대원들의 시야에 로라스의 등 대신, 얼굴이 보였다.
결전 지역에 도착한 것이다.
“회전!”
기병들이 크게 돌기 시작함과 동시에 로라스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까미유를 불렀다.
“까미유!”
“네, 주군!”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진입하지 말라.”
“어찌…….”
까미유는 위험하다 말하려 했으나, 진기가 충만해짐에 로라스는 철봉을 높게 치켜들었다.
“하아아앗!
절로 터져 나오는 기합.
“오랏!”
그리고 호통과 함께 로라스의 봉이 길게 누워졌다.
화르르르르르.
봉 전체로 백염이 휘둘러짐에 그런 소리까지 나는 듯했다.
‘배려를 베풀고 싶으나!’
인정과 사정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만한 심력이 있다면, 그걸 이용하여 적을 더 빠르게 제거하는 편을 선택해야 할 터.
“하아아아아앗!”
길게 누워 있던 창이 그대로 앞을 향했다. 봉 끝의 목표는 하나.
“흐앗!”
적의 선두에 선 장수, 슈베츠.
쌔애애애애앵.
그리고 그 적장은 놀랍게도, 그의 창에 로라스와 같은 백염을 띄우고 있었다.
타아아아아아아아앙!
강렬한 철음과 함께 첫 격돌이 일어났고.
‘이것 봐라?’
충돌의 여파로 자신의 엉덩이가 안장에서 살짝 뜨는 것을 느끼며, 로라스는 눈앞의 적장이 포스만 수련한 그런 멍청이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무공 광이라 하더라도, 제 실력에 맞는 상대와 겨뤄 보지 않았을 텐데?’
슈베츠가 이 세계에서 몇 없을 고수란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경험 부족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과 비슷한 적수와 싸워 본 경험. 그게 없다면 무작정 자신의 힘만 내세우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는 노련하게 자신의 힘을 흘림과 동시에 밀어붙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근압정萬斤押釘!
하지만 로라스는 개의치 않고 내력을 쏟아부으며, 봉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눌렀다.
부으으으으으으으응!
두 개의 백염은 순식간에 뒤엉키며, 철음을 미친 듯이 발산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로라스는 힘으로 조금도 밀리지 않는 슈베츠를 보며 의아해했다.
무공에 미친 것과 무공이 능숙한 건 별개의 문제.
‘타고난 천재란 건가?’
로라스는 알지 못했다.
분명 슈베츠는 자신에 걸맞은 적수와 손을 겨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좇은 그림자, 발자국의 주인이 베스타인 공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만을 좇았기에 그는 경험이 풍부했다. 슈베츠는 오로지 베스타인 공작만을 가상의 상대로 싸워 왔으니까.
타아앙! 타아앙! 타아아아앙!
쉴 틈 없는 공방이 펼쳐졌고, 로라스도 슈베츠에게서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았을 때.
“아쉽구나.”
로라스의 입이 열렸다.
“그대, 좇지 말아야 할 허상을 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