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9)
‘마음에 들지 않아.’
메린 백작은 좌우를 흘려 보며 생각했다.
‘애초에 날 보냈어야지.’
바르샤바가 아닌 자신이 선봉을 섰다면 이런 귀찮음은 없었을 것이다.
‘바르샤바 따위가 나보다 더한 명성을 가진 것부터가 잘못된 게지.’
메린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기준에서는 검만 아는 멍청이에 불과한 슈베츠 남작에, 격 떨어지게 황금으로 치장한 골든나이트까지.
이런 이들과 자신을 같은 자리에 세운 건, 그야말로 자신을 낮게 보고 있다는 증거일 터.
“남작과 사바이 경은 명령이 있기 전까진 절대 나서지 마시오.”
그나마 다행인 건 군의 지휘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이 이끄는 기사단은 독립 작전권을 지닌 반쪽짜리 지휘권이나, 그거면 어떤가?
결국 이 전쟁이 끝난 후 명성을 떨친 건, 이 두 사람이 아닌 자신일 것이다.
‘후우우!’
이제 곧 적군을 볼 수 있을 터.
흥분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적이 뒤로 물러났다 합니다.”
적의 위치와 진형을 파악하기 보낸 척후의 보고는 그의 두근거림을 앗아 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전선을 뒤로 물리려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앞으로 나온 것인데!”
전령이 그 답을 알 리 없다는 건 메린 백작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뜬금없는 상황에 말이 그리 튀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요격을 하려 했다가 안 될 거라 생각하고 물러난 것인가?’
메린 배작은 자문자답을 동시에 했지만, 잔뜩 끌어 올린 전의가 사그라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 기세 좋게 나와서 뭔가 있나 싶었건만, 결국 공성전으로 승부를 결할 셈인가?’
아니 될 말이다.
북부의 무식한 것들이 여기까지 나왔는데, 그걸 잡지 못하면 전쟁은 길어지고, 길어지면 변수가 생겨난다.
“진군 속도를 올린다.”
그러한 이유로, 메린 백작은 속도를 올렸다.
* * *
“진즉 안에서 지켰으면 좋지 않았나?”
“괜히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군에서 은근 불평불만이 튀어 나왔다.
사실 불평불만을 가질 일은 아니었다.
남부군에 비해 병력이 많이 부족한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그 탓에 은근 걱정과 두려움을 많이들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힘들게 달려 전선을 구축했는데, 싸울 만하면 계속 뒤로만 물러나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 두려움은 더 몰려들고 말이다.
그나마 연전연승해 왔기에, 사기는 충만했기에, 그럭저럭 통제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의외로 참을성이 좋군.”
또다시 하루 거리를 물러난 후,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참을성이 좋다기보다, 멍청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따라만 오다니요.”
야휘 후작의 말을 린델이 받았다.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메린 백작이 성격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뛰어난 지휘관이니까요. 분명 기회를 잡으려 할 겁니다.”
“그 기회라는 걸 주고 싶지는 않은데. 아무리 준비되었다지만 정말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아군의 피해가 커져.”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각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듣고만 있던 로라스가 물었다.
“도발이라도 해 볼까?”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린델과 야휘가 동시에 소리쳤다.
“안 됩니다!”
“아니하는 편이 좋습니다!”
의외로 강력한 발언에 로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또 아나? 그러다가 그 삼대기사 중 한 놈의 목이라도 자를지.”
린델이 말했다.
“전투는 이길지 모르나, 전쟁은 끝나지 않게 됩니다.”
“몰라야 적이 덤벼듭니다. 적이 신중하면 겨울이 오기 전까지 전쟁은 지속될 겁니다.”
이어지는 야휘의 대답.
로라스는 바로 수긍했다.
애초에 이 작전을 쓰자고 한 사람은 로라스였다.
중과부적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병력의 차이가 큰 상황이나, 이 전쟁에서 패배라는 단어는 전혀 고려치 않는 그였다.
하지만 아군의 피해마저 제로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한 명, 한 명 아까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입안한 작전이 지금처럼 계속 싸울 듯, 말 듯 뒤로 물러나며 적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개격파를 노리는 것. 정확히는 적의 기병을 잡아먹는 작전이었다.
일반적이라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기병대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병종이 잘 갖춰진 적과 상대할 때는 그 위력이 제한적이 된다.
하지만 야휘와 린델이 로라스의 작전에 동의한 건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적의 기병이 아군의 총병력과 비슷한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계속 뒤로 물러나 적의 기병을 유인하는 책략을 선택한 이유는.
기병만 따로 움직이면 월등한 기동성을 보일 것이고, 한번 기병들로만 돌격을 하거나 아니면 아군의 뒤를 돌아 후방을 차단할 수도 있으니까.
에렌은 전투를 거기서부터 시작하려 했다.
그 따로 떨어진 기병을 로라스를 내세워 잡아먹은 이후 말이다.
그런데 로라스가 도발하여 그리고 그 도발이 기대 이상이 되어 그 위력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망가진다.
그것이 야휘와 린델이 반대하는 이유.
린델이 말했다.
“적도 시간을 끌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신중하다 하나 결국 미끼를 물 터. 주군께서는 그때 나서 주십시오. 그리고 확실하게 잡아 주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무작정 물러나다가 점령한 성들까지 내주게 돼도 문제가 되지 않나?”
로라스의 물음에 야휘가 대답했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적의 보급로가 또 길어질 테고, 그때는 우리가 뒤를 끊어야지요!”
“지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적은 반드시 미끼를 뭅니다. 안 물면 물게 만들어야지요.”
그리고 린델이 자신 있게 하는 말과 함께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 * *
‘분명 뭔가 있어!’
계속되는 후퇴.
메린 백작은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나 잡아먹으라고 유혹을 하는데, 그만한 이유를 모르는 이상 무작정 나설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시간이 아군의 편은 아니기도 했다.
뭔 생각인지 모르지만, 에렌과 그들의 주력은 군단을 동원하지 않았다.
‘아! 그럼 혹시?’
메린 백작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군단을 동원하지 않은 걸 보여 줬다가, 마지막에 그들을 동원하여 자신들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술수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계속 병력의 우세만을 생각했지만, 까놓고 이야기하면 에렌이 열세에 처할 이유가 없었다.
메린 백작은 회의장에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의문과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한 일이 일어났다.
자신은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있는데, 아큘라스 공작은 현 상황을 못 견뎌 하고 있었다.
‘멍청한!’
메린 백작은 욕이 절로 나왔다.
적을 알고 싸우면 지지 않는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걸지를 마라.
아큘라스 그 영감은 그런 말도 듣지 못한 듯했다.
‘하긴, 아는 것만 지킬 수 있으면 개나 소나 다 지휘관이지.’
뭐,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물러나다 성으로 숨어들기라도 하면 전쟁은 길어질 테니까. 그래서 상대가 준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상황을 내가 주도하지 못하면, 그 전쟁은 피하라 했다.’
일이야 어찌 됐든 현재 상황은 에렌군이 만든 판이지, 자신의 판은 아니었다.
‘뒤집긴 해야 하는데…….’
메린 백작은 고민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소리쳤다.
“부관! 이곳 지리를 아는 이들을 불러 모아!”
* * *
“넘어오겠지?”
“우리나 저들에게나 마지막 남은 기회입니다.”
“넘어오지 않으면?”
“그들이 이용하지 않으면 저희는 그냥 싸우든가, 아니면 전략을 바꿔 수성전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린델의 대답에 로라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뭔가 아쉬운 것이다.
야휘가 옆에서 말했다.
“제가 아는 메린 백작이라면 나올 것입니다. 그의 심성이 조금 뒤틀렸다 하나 그는 지휘관으로서 훌륭합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병사들은?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 같은데.”
“바로바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불만은 잘 쌓아 둬야 합니다. 일부러 혹독하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래야 싸울 때 두려움도 없을 테니까요.”
야휘의 대답에 로라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군율은 바로 설수록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군율이 설수록 병사들은 생활이 힘들다. 그 탓에 병사들의 불만은 모두 야휘가 가져가고 있었다. 계획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왔음에도 말이다.
‘마음이 좋지 않아.’
대규모의 전투에서 로라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 된다. 그저 희생이 적길 바랄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다시 한 번 회군을 준비할 때였다.
“적 기병대가 사라졌습니다.”
로라스는 물론이고 곁에 있던 간부들은 절로 몸에 힘을 주었다.
적이 마침내 미끼를 물었다.
* * *
“번천, 네가 남아 있어 줘야겠다.”
처음 주군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애써 부정했지만 중군이 압박을 가장 많이 받을 테니까.”
무척이나 기뻤다.
“웃을 일이 아니다. 애써…… 아니 의식적으로 부정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저리 굳은 표정으로 해야 할 일을 내게 맡기신다는 건, 전적으로 나를 신뢰한다는 증거.
“전쟁은 반드시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가장 많이 죽는 건 네가 있어야 할 중군이 될 테니까.”
“맡겨 주시면 죽기를 각오하고 임무를 완수할 것입니다.”
“난 그것을 원치 않는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전쟁은 원래 제정신 박힌 놈들의 짓거리가 아니야. 또한 모순된 짓거리의 결정판이도 해.”
내게 주군의 믿음 한 조각. 그거 하나면 충분한데, 당신께서는 충분치 않으신 것 같았다.
“그래서 죽도록 이기고 싶은 것이다. 기왕이면 아군은 적게, 적군은 많게. 그러면 면죄부라도 주어진 것처럼 착각할 수 있거든.”
계속해서 저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주군은 다른 간부들을 보면서도 말하셨다.
“효율적이라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뭐 그 어떤 명분을 가져다 써도 된다. 하지만 그런 이름하에 우리가 어떤 이들을 사지에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잊어선 안 된다.”
“…….”
“물론 보니 그걸 모르는 이가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좋지 않다. 같이 사지로 들어가고자 하는 지원자들이 이리 많은 걸 보면 말이지.”
“…….”
“좀 뻔뻔해지고 싶을 텐데. 죽고 싶을 정도로 비겁해지고 싶을 텐데도 말이야.”
나의 무식함이 이리 한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주군께서 뭘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원망하는 사람은 없나?”
“…….”
“더 유리한 상황에서, 아니 최소한 동등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음에도 내 고집대로 한 것 때문에.”
야휘 후작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군단을 동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해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군.”
“빼면 양민들의 피해가 더 클 테니까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십니다.”
그리고 간부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큰 전투가 될 거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합니다. 여태 주군께서 혼자 다 처리하셨으니.”
“이제 저희 차례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사 린델이 입을 열었다.
“기왕 미친 거, 반드시 이기고, 적게 피를 흘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뻔뻔함. 책임은 저희 몫입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그리고 약속하건대.”
주군께서 그렇게 두 가지를 약속하였다.
기다리라고. 악착같이 살아 자신을 기다리라고.
그리고 모두가 죽더라도, 그 책임을 져야 할 놈의 머리를 모조리 떨어트린다 하셨다.
이미 목숨 걸고 나온 전장이다.
그런 곳에서 그 약속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야휘.”
“네, 주군.”
“번천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포스 마스터 간의 전투에서는 아직 부족한 점이 있으나, 일반 병력의 상대로는 그 어떤 마스터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주군은 그리고 날 보셨다.
“번천, 긴말 않는다. 네가 중군의 칼이자 방패가 된다.”
죽어도 여한이…… 아니, 그렇게 존재하고 반드시 다시 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