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8)
에렌군이 파죽지세로 남으로 밀고 내려간다는 소식에 황도의 민심은 흉흉했다.
“그거 하나 시원하게 못 미나?”
하나 황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그 사실이 탐탁지 않을 뿐.
“전쟁은 늘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큰 전투에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법. 너무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야지. 하지만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황제는 뭔가 궁리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많이 줬잖아. 이겨도 남는 게 없을 거야. 골드맨스 놈들…… 감히…….”
“작은 투자라 생각하십시오. 결국 사채업자일 뿐인 놈들. 북부를 통합하고 주변국들을 전부 제압한 이후.”
후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골드맨스를 손보면 됩니다. 놈들을 잡을 명분은 수십 개도 넘으니까요.”
“쉬운 놈들은 아니야.”
“이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폐하께서는 심려치 마시고, 그저 큰일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황제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짐에게 어찌 그대 같은 사람이 있는지. 아주 기쁘단 말이지.”
“폐하의 신민으로 그저 충성을 바칠 뿐. 폐하의 치세에 제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 그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정말 마음이 편안해진단 말이지.”
후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의 영광입니다. 태자의 교육까지 맡겨 주시니, 폐하의 믿음에 부응하고 또 부응할 뿐입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태자의 교육은? 어떤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매우 영민하시어 하나를 알려 주면 두 개를 아십니다.”
“그래. 태자에게도 자네가 신경을 써 줘. 자네가 스승 아닌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자네와의 대화는 늘 즐겁지만, 바쁜 사람 오래 잡아 두는 것 같군.”
“송구합니다.”
“그만 일보게. 뭔 변화가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나는 그 참선이라는 걸 할 테니.”
후드는 슬쩍 황제를 보며 물었다.
“어떠십니까? 효과는 느껴지십니까?”
“아닐 말인가. 하루하루가 달라. 짐도 포스를 쌓고 싶었지만 알다시피 좀 바쁜가. 게다가 포스를 쌓는 과정이 짐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아 있고 말이야.”
“효과가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너무 급격히 복용하지 마시고 조금씩, 천천히 하셔야 합니다.”
“감질난단 말이지. 한 번에 확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후드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답했다.
“뭐든 과하면 독이 됩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십시오.”
“알겠네. 천천히, 주의하도록 하지.”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후드는 밖으로 나왔다.
‘예상보다 에렌의 전력이 더 강했던가?’
확실히 예상 밖이었다.
‘내가 안일했던 건지도.’
후계 싸움을 이용했을 때 그리고 그 싸움이 너무 손 쉽게 정리됐을 때 좀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이러다 전충錢蟲 영감도 당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칠 인의 좌중 세 명이 나선 상황이다. 에렌이 무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후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이놈들도 잡아먹긴 해야 하는데.’
사실 칠 인의 좌라고 같이 묶여 있기는 하지만, 어딜 감히 자신과 동격을 이루려 하는가.
‘일단 황제부터 제거한 후에 좀 더 세세하게 고민해 봐야겠어.’
오늘 황제의 눈을 보니 확실하게 중독되었다.
‘재밌지? 배교 따위의 잡술을 이런 곳에서는 너무 잘 써먹을 수 있으니.’
이쪽 세상은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제 선천지기를 당겨쓰는 약물과 심법에 감격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며 후드가 거처로 돌아왔을 때.
“주인을 뵙습니다!”
“주인, 급히 보고를 드릴 게 있습니다.”
몇 수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중요한 세작들을 관리하는 수하들.
“락에 투입되었던…….”
“에렌으로 잠입했던…….”
그들의 보고가 시작되었고, 후드의 표정은 살짝 굳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라고 해도, 분명 쓸 만한 능력이 있던 놈들.
템테이션과 다크니스가 죽었다.
그것도 별 힘도 못 써 보고,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말이다.
‘이건…… 좀 아닌데…….’
이게 사실이면 말이다.
‘전충 그 영감도…….’
후드는 처음으로 제대로 고민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 * *
‘하아.’
야휘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입 밖에 토해 낼 뻔했다.
아쉬움의 또는 부정적인 그런 한숨이 아니었다.
연이은 압도적인 승리가 너무 믿기지 않아서 생기는 그런, 긍정적인 어이없음의 표현.
“계속 밀고 나가도 되었는데.”
하지만 이 황당하고, 믿기지 않는 승리를 거둔 장본인은 오히려 아쉬워하고 있었다.
“굳이 멈추라 하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로라스가 자신을 보며 하는 말에, 야휘는 잠시 대답할 내용을 찾기 위해 생각이란 걸 해야 했다.
―그럼 오천의 병력으로 오만 이상의 대군을 상대하려 하셨습니까!
원래라면 이렇게 핀잔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전투를 줄곧 이겨 온 주군에게는 말이다.
“적 본대가 오만이 넘습니다. 게다가 급격히 내려온 관계로 정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만? 숫자가 늘었군.”
“숫자뿐만 아니라 주의해야 할 병력입니다.”
“계속해.”
“황금 기사단이 나타났습니다.”
“골드맨스?”
“네. 그 전엔 남부군의 세 명의 장수만 조심했으면 됐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야휘는 옆의 부관에게 눈짓했다.
잠시 후 탁자에는 커다란 전도가 펼쳐졌고, 야휘는 그 위로 장기짝 몇 개를 올려 두며 말했다.
“전선을 내린 것에는 달성했으니, 이제 수비 라인을 구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과부적입니다.”
“으음.”
로라스가 내는 소리에 야휘는 다급해졌다.
―원하는 것만 말해!
혹시라도 또 이런 말을 들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으니까
“물론 주군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병력과의 싸움에서 소수의 집단이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지휘관을 베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
자신이 걱정했던 쪽으로 결론이 날까 봐 야휘는 옆의 린델에게 눈짓했다. 린델이라면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 믿었으니까.
“적의 선봉이나 다른 성을 함락했을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선봉대에서 쓸 만한 자는 바르샤바뿐이었으나 아큘라스 본대는 지휘관이 많습니다.”
옳거니!
“주군이라면 반드시 본진을 뚫고 적장들의 수급을 취하시겠으나, 동시에 모든 지휘관들을 그리 잡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역시 린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어 참 쉽게도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럼으로 정비는 필요합니다.”
덕분에 야휘가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핀론드 진격은 그때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응?’
“이번에 본대를 궤멸시키면, 황도까지 가는 데 아무런 저항이 없을 것입니다.”
“군사,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야휘가 당황하여 하는 말에, 린델은 오히려 반문했다.
“군을 어찌 재배치하시려고 하십니까? 적의 숫자가 많으니 분명 넓게 포진하려고 할 터. 그러면…….”
린델은 뭐라 중얼거렸지만 야휘는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지금 린델은 수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전면전.
적의 숫자가 수배 많음을 알면서도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적의 병력이, 그것도 노련한 용병대로 늘어났다는 보고는 받은 것인가? 분명 전달되었을 터인데.”
“전달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야휘는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린델이 다른 것을 보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래서였다.
혼란이 오히려 사라졌다.
린델이라면 자신이 보지 못했던 다른 것을 분명 보았을 터. 하지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다.
야휘는 로라스를 보며 물었다.
“주군. 핀론드, 거기에 수비선을 구축할 생각이십니까?”
“거길 넘어서면 우리 쪽 보급선이 길어질 테니까. 그리고 내 땅은 거기까지다. 그 이후는…… 나중에 생각해 보지.”
“핀론드는 일반 성이 아닌 요새에 가깝습니다. 현재 병력으로는…… 하지만 주군께서는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로라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린델하고 이야기하지. 우리 군사가 준비를 끝내 뒀으니.”
야휘는 고개를 돌려 린델을 보았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결정하셨다면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병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 피해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피해를 줄이려면…….”
그때 로라스가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거 기다리면서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로라스가 입을 열었고, 그것을 듣는 야휘와 린델은 물론이고 간부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충분히…… 아니, 아주 가능성은 높은 전술.
물론 그 전술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따랐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전제 조건이라면 자신들의 주군은 이미 그 능력을 증명했으니 말이다.
―단독 부대 간의 전투에서 절대 패하지 않을 것. 아니,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
바로 이 전제 조건 말이다.
북부군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하하하핫!”
아큘라스는 뭐가 좋은지 소리 내어 웃었고, 마주 앉은 골드맨 역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의 앞에는 세 명의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아큘라스는 제일 처음으로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장년의 사내를 쳐다봤다.
메린 백작.
고집이 세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성격이라, 친하게 지내는 귀족이나 기사가 거의 없는 기사.
하나 그런 단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포스 마스터이면서도 군대 경험까지 많아 통솔력까지 갖췄으니, 능히 일군을 맡기기에는 충분하니까.
아큘라스의 시선이 그 옆으로 돌아갔다.
세상사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앞에서까지 별 공경을 보이지 않고 있는 중년의 사내.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한 영지의 영주이면서도 대리인에게 전권을 위임해 버리고, 황도로는 단 한 번도 발길을 주지 않아 인맥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사내.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수들이 즐비한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최강의 무인 중 하나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금 빛 갑주를 입은 중년의 거한.
그에 대해 아는 건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골든나이트.
황금 기사단의 단장이면서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무인이 바로 그니까 말이다.
아큘라스는 슬쩍 골드맨을 쳐다봤다.
완벽히 신뢰가 갔다.
황금 기사단이 그리고 골든나이트가 대륙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진심으로 이 전쟁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고약한 놈을 이제 제거할 수 있겠군요.”
골드맨의 말에 아큘라스는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이제 끝이겠지. 이리 훌륭한 기사들이 있는데.”
“사흘 거리이지요?”
“고마운 일이지. 성에 처박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면전을 하겠다고 다가와 주니 말이야.”
“그간의 승리에 취해, 앞 뒤 분간을 하지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말아야 해. 상황이 여기까지 올 줄은 아무도 예측 못했으니.”
아큘라스의 말에 골드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방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크니스와 템테이션이 당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 탓에 락과 에렌을 공략하면서 로라스의 후방을 교란시키려 했던 계획이 깡그리 날아갔다.
또 그 덕분에 더 신중해졌다. 그래서였다.
골든나이트와 기사단까지 소집한 것도 모자라, 가용 가능한 용병대까지 모병한 이유는 말이다.
‘끝내야지. 이번엔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
골드맨은 이미 이다음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수장을 잃은 다크니스와 템테이션의 조직을 먹어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로라스! 그놈만 잡으면 그간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골드맨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