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7)
‘뭐 그럴수록 일은 편하지.’
상황에 따라 속내와 말은 전혀 달라도 된다.
오리시암은 여태 그렇게 살아왔고, 그걸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욕을 할지언정 표정은 헤벌쭉, 입술에는 침을 잔뜩 바르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근래 백작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 같은 놈도 조금은 현명해진 것 같습니다.”
볼륨 백작은 크게 기꺼워했다.
꿀처럼 달콤하고 버터처럼 부드러운 말을 듣는데, 기분이 아니 좋을 수 있겠는가?
“병사들의 훈련도 책임져 주니 그대 덕에 내가 아주 편해. 내 자네의 공은 절대 잊지 않지.”
“어이쿠! 그게 어찌 저의 공입니까? 그저 잘 지도해 주신 백작님 덕분이지요.”
“하하하하하. 그리 말해 주니 기분이 좋구먼.”
그렇게 화기애애한 술자리도 어느새 파할 시간이 되었다.
“내일 또 오게.”
“박대만 안 하시면 매일 오고 싶습니다. 제겐 큰 기쁨이니까요.”
“하하하하. 이 사람, 끝까지. 여하간 조심히 가게.”
오리시암은 넙죽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실실 웃던 그의 입꼬리는 일자로 다물어지고, 히죽히죽 바보처럼 보이던 그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던 것도 그때였다.
‘뭐, 걱정할 건 크게 없고.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인데.’
오리시암은 걷는 속도를 올렸다.
그가 향한 곳은 영주성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민가였다.
그곳은 제 성을 내준, 아니 뺏긴 카론 백작이 있는 곳이었다.
“왔나?”
늦은 밤, 상의를 탈의한 채 들숨과 날숨을 크게 쉬는 카론.
“이 밤에 뭘 하십니까?”
“지금 할 수 있는 거.”
“…….”
“기회가 있을 거라 약속했으니까. 그때를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라네.”
담담한 카론의 목소리에 오리시암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나?”
“주군께서 백작님을 참으로 좋아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몇 년 전 딱 한 번 뵈었을 뿐이네.”
“장담합니다. 주군께서는 백작님을 좋아하실 겁니다.”
카론도 옅은 미소와 함께 물었다.
“더 참으라는 뜻인가?”
“그냥 해야 할 일을 하시면 될 뿐입니다.”
카론은 물끄러미 오리시암을 보며 말했다.
“사실 말이지. 난 자네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지.”
“제 매력을 아시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지요.”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더군. 왜 군사 린델이 자네를 내 옆에 붙여 놨는지 알겠어.”
“하하하. 린델 군사는 제 매력을 아는 거지요.”
“사과하네.”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멸했거든, 자네를.”
“…….”
“가벼운 언행들. 앞뒤를 재지 않고 대의 따위는 찾아 볼 수 없고, 눈앞의 득만을 좇는 그런…….”
카론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멍청한 거지. 대의를 위해서 숙이는 것인데.”
“…….”
“대단한 용기란 걸 알았지. 난 그 용기 없음을 자존심이라 포장했는데, 결국 도움이 된 건 내가 아니라 오리시암! 그대 아닌가?”
뜻밖의 상황.
다른 사람이라면 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오리시암은 오리시암.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리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좀 대범하기도 하지요.”
전혀 부끄러움 없이 자찬을 하는 오리시암.
‘꿈보다 해몽이 좋을 때도 종종 있는 법이잖아.’
누가 좋게 봐 주는데 그게 아니라고, 스스로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리시암은 말했다.
“공을 세우실 때 절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엄청나게 도와 드렸다고 한 말씀 해 주시면.”
“하하하하! 자네는 정말 유연하게 상황을 대처하는군. 내가 배울 게 많아.”
오리시암의 진심을 나름 겸양이라 착각하는 카론 백작이었다.
* * *
플라이스에서 대승을 거둔 지도 이십여 일이 지났다.
그리고 야휘 후작은 테폴러 성에 입성했다.
“하아아!”
한숨이…… 아니, 이건 한숨이 아니었다.
뭐랄까?
자신이 믿어 왔던 상식이 깨지면서 생기는 불신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보급이란 원래 적의 것을 뺏어서 하는 거라고?’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해내니,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나저나.’
야휘 후작은 슬쩍 옆에서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상제르 남작을 쳐다봤다.
‘배신한 놈을 그대로 영주에 재임하게 만드셨다는 건…….’
이건 따로 린델의 보고를 받긴 했다.
‘재판을 치렀다고 해도…… 이건…… 너무 파격적이지 않은가.’
최소한 귀족의 작위를 거두고 능력이 있어 다시 중임을 하고 싶다면, 종군케 하여 공을 세우게 만드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
하지만 로라스는 상제르에게 그대로 테폴러를 맡기는 한편, 기존 영지병들로 포로들까지 관리하게 만들었다.
막말로 그가 다시 배신을 하면 린델의 부대는 후방이 차단되는 것 아니겠냔 말이다.
‘이건 너무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됐다면 당장이라도 로라스를 회군시키고, 주군이라 하나 총지휘관의 자격으로 뭐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때 배신자였던 상제르는 세상모를 충성파 귀족이 되어 있었다.
상세한 전황 설명은 물론이고, 보급을 위한 준비까지 이미 완벽하게 브리핑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도 하는 법.
병권을 뺏고, 영지에 대한 영향력을 어찌 뺏어야 할지 절로 머리에서 생각하고 있을 때, 상제르가 말했다.
“제가 할 일은 다 했으니, 부탁드립니다. 오늘 병권을 내놓고 물러나겠습니다.”
혹시 모를 전투를 방지하여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야휘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이었다.
“재판을 통하여 죄와 공을 상쇄하여 용서 받았으나 스스로의 죄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영지민들은 더 이상의 징집은 필요 없을 거라 판단합니다.”
이어지는 상제르의 말에 야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내가 총지휘관이라 하나, 주군께서 내린 권한을 쉽게 회수할 수는 없는 법. 그냥 하던 일 하라.”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야휘는 생각했다.
‘이것도 믿고 가야 하는가. 아냐, 그래도 내 병력은 좀 남겨야겠지?’
고민이 깊어지는 야휘였다.
* * *
전쟁에 선봉은 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진짜 전쟁의 결과는 본대라 불리는 부대와의 전투에서 결정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그러지 않았다.
질주.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봉대는 파죽지세로 작은 성들을 함락하고, 영지들을 점령해 나갔다.
사실 견제를 해야 하는 적 부대가 없는 이상 당연하다 할 결과이기도 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덕분에 본대는 선봉을 따라잡기에 바빴다.
신의 부대.
그리고 제국의 중부에는 그런 부대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성문 짝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버린다더라.
―성벽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던데. 하늘을 날아서 넘어오는데,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더군.
―몬스터와의 혼혈도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렇게 강한 거라고.
소문이란 늘 작게 시작하여 크게 퍼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 소문은 애초에 크게 시작하여, 커지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트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런데 웃긴 게 있었다.
―헛소리하고들 있네.
―그걸 믿냐?
그런 소문을 믿는 사람이 있던 것처럼,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봤다.
―날도 없는 봉을 휘두르는데, 문이 그냥 박살 나더군.
―하늘을 왜 못 날아? 마법사들도 있는데. 아! 정확히 난 건 아니었지. 성벽을 그냥 밟기도 했으니까.
뭐 했다 카더라! 옆집 아저씨가 봤다더라! 친구네 형의 팔촌이 봤다더라!
소문은 늘 그런 말이 전제되지만, 이번 소문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카더라가 아닌 소문은 정보가 된다.
―그게 어디 한두 번이야!
―잊었나 본데, 그분은 신이 보낸 기사야. 성기사라고!
그리고 옛 정보가 규합하였을 때, 소문은 완벽하게 정보가 되어 폭발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에렌의 반대편에 선 귀족들은 뒤늦게 성벽과 성문에 보수공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알고 있다. 이 속도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
그나마 몇몇 귀족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다. 아큘라스 본대가 거의 도착했기 때문이다.
* * *
“여론이 문제입니다.”
“로라스 백작을 신격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부대까지 말입니다.”
귀족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에펠리온 교단을 손봐야 합니다. 각 신전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니.”
“에펠리온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현재 각지에서…….”
그리고 어느 한 귀족이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뒷말이 뭔지 모를 사람들은 드물었다.
몬스터의 증가.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적인 현상.
그걸 유일하게 완벽히 통제하는 곳이 제국의 북부, 에렌이었다.
그런 곳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몬스터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에렌의 막강한 군단을 움직이지도 않고 전쟁 중이다.
제 영지의 치안도 안 좋은데, 병력을 바리바리 끌고 온 자신들과는 다른 것이다.
당연히 민심은 북부를 향했고, 몇몇 곳은 영지를 탈주하여 북으로 향하는 이재민들까지 생겼다.
특히 중앙군의 영역에서 벗어난 외곽 영지들의 탈주 상태는 심각했다. 어차피 가만히 앉아서 몬스터에 죽을 바에 북으로 가 살길을 도모하겠다고 한다.
가진 명분이라고는 황제의 명령뿐. 그 외에는 모두 에렌에 뒤지고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는 상황.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더 민심을 잃다가는…….”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백성의 참다못한 절규를 폭동이라 여기는 귀족들도 낯짝이라는 게 존재했고, 제 목숨을 소중이 여기는 건 당연하기에 그들은 아큘라스 공작을 재촉했다.
귀족들의 표정에 아큘라스 공작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바르샤바가 패하여 어이가 없긴 했으나, 승패는 병가지상사. 그리 안달할 것 없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지만, 어디 그게 보통 패배였는가?
어이가 없으면 손으로라도 돌리겠으나, 이건 아예 맷돌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속도를 늦춘 것도 이유가 있지.”
하지만 아큘라스는 그런 귀족들을 개의치 않고 한껏 여유를 뿜으며 말했다.
“곧 도착할 거야. 그러면 우리도 완벽하게 준비되었으니, 이제 우리 차례지.”
“…….”
“로라스가 제 무게도 모르고 직접 나왔다지. 다음 대회의는 에렌에서 하겠군.”
모두가 의문을 품었다.
아직 자신들의 병력이 많다고 해도 기세는 완전히 에렌이 가져간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여유를 보일 수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 답은 곧 밝혀졌다.
아큘라스 공작이 곧 도착할 거라는 말. 정말 도착했기 때문이다.
“우아아아아아!”
성내까지 들리는 커다란 함성.
“왔나 보군.”
아큘라스는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귀족들은 우르르 그를 따라나섰고, 보았다.
“우아아아아! 메린 백작님이시다!”
“슈베츠 남작님도 오셨다.”
바르샤바와 함께 아큘라스 군의 3대기사라 칭해졌던 두 사람이 드디어 본진에 합류한 것이다.
귀족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합류는 분명 큰 힘이긴 하나, 그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자원. 새로울 게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메린 백작과 슈베츠 남작 부대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소수의 무리가 있었다.
눈이 부신 무리.
막연하게 그리 보이는 게 아닌 정말 빛을 발하는 기마.
그들의 갑주는 금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탄 말 역시 금빛 마갑을 입고 있었다.
“황금 기사단!”
“정말 황금 기사단인 거야?”
“그들이 왜?”
황금 기사단.
그들은 그냥 보기에만 멋진, 돈 많은 권력자의 취미와 같은 게 아니었다.
저 삼십여 명의 황금 기사들은 최소 포스 유저였으며, 상위 세 명의 기사는 포스 마스터라 소문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골드맨스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들.
골드맨스가 수많은 권력자들과 금전 거래를 하면서도 늘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었던 원천적인 힘은 바로 이들에게서 나왔다.
그들의 돈과 황금 기사단. 그리고 따로 키우는 병력이라면 웬만한 권력자 정도는 짓밟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우아아아아아!”
그러한 이들이었기에 아큘라스 공작은 여유로울 수 있었으며, 남부의 군사들은 크게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