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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76화 (27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6)

꿀꺽.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종종 마른침 삼키는 소리만이 들리는 공간.

두두두두두두.

그리고 적이 보이기 전에 소리부터 들려왔을 때.

병사들은 잔뜩 긴장했다.

사실 정신이 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이 전장에 나서게 될 거라 생각했던 병사들은 없었다.

나이도 많았고 힘도 없었으며, 무기란 걸 지팡이 대신으로 써 왔던 게 익숙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후방에 남아 보급 임무에 투입된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실제로 적을 상대한다 하니,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우린 기사들이 많으니까.’

그나마 믿을 건 지휘관들과 기사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믿고 있는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자신들보다 별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중이떠중이라는 표현이 과할 정도의 형편없는 기사들과 간부들.

당연했다.

그들 대부분은 귀족.

전쟁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는 싶은데, 또 죽는 건 싫었다. 그래서 후방에 있으면서 적당히 기회를 봐서 나설 작정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가장 큰 전공을 세울 거라 예상되는 바르샤바의 부대였다.

그게 이 성에 기사들과 간부들이 많은 이유였다.

물론 급조된 기사단과 많은 간부들의 존재 이유가 이 때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우아아아아!

말발굽 소리에 이어 적의 함성이 들렸을 때 그들은 움찔했다.

“뭣들 하느냐! 궁수들 눈이 없어! 겨냥해!”

그나마 지휘관다운 구실을 하는 간부의 호통에, 궁수들은 활시위를 당겼고, 병사들은 창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미친 거 아냐!”

적의 부대 중에서 단독으로 치고 달려오는 기마가 하나 있었다.

혼자 달려오는 기마를 보며 명령을 내린 간부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 마스터가 홀로 성문을 격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의심. 홀로 달려오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발사해!”

명령에 삼십여 명의 궁병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쑤우우웅!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화살은 맹렬한 기세와 정확한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분명 그랬는데 말이다.

떨어진다.

달려오는 기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화살의 궤적은 분명 그를 향해 날아갔음에도, 뭔가에 막힌 듯이 그대로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쏴! 쏘란 말이야!”

화살은 계속 날아갔지만 그 어떤 화살도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투석병! 준비해!”

그래도 나름 공성 준비를 한 덕에, 뭐라도 할 수 있는 수비 병력들.

하지만 말이다.

‘이쪽이 아니야?’

기마가 달려오는 방향은 문 쪽이 아니었다.

‘뭘 어쩌려고?’

모두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기마는 어느새 성벽 아래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눈을 치켜떴다.

사람이…….

날아오고 있었다.

* * *

“속도 줄이고 삼백을 센 후 속도를 올린다.”

“네.”

번천의 힘찬 대답.

“흑아야! 네 차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아가 달렸다.

순간 쭉 뻗어 나가는 감각.

정말 말로서 최고의 녀석이다. 기대는 했지만, 내가 경공으로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와 비슷한 속도였으니까.

그렇게 달리며 성을 쳐다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형편없는 오합지졸들이라는 건.

무슨 기운을 알아볼 필요도 없다.

서너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저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봐도 말이다.

‘이거 너무 형편이 없으니.’

스스로가 좀 없어 보인다.

닭 모가지 자르고자, 거도 들고 칼춤 추는 꼴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그 닭들은 분명 거대한 닭장의 보호를 받고 있는 건 사실이니.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눈먼 화살이 무섭지, 멀지 않은 화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순수한 속도의 힘만을 가진 건 그냥 강기만 뿌림으로 떨어트릴 수 있으니까.

‘백오십쯤 됐으려나?’

삼백을 세고 속도를 높이라 했으니. 남은 시간은 백 오십.

그리고 성벽이 눈앞에 다가왔다.

크르르르응!

흑아의 목덜미를 살짝 쳐 내며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달렸다.

하나…… 둘…… 셋…….

뛰어올라 성벽을 밟았다.

낮다.

이 장이 갓 넘을 듯한 성벽의 높이는 분명 그러했다.

한 발, 두 발…….

다섯 발자국 때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병사들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늙은이. 앳되어 보이는 청년들.

마찬가지다. 이들은 적이 아닌 내가 품어 줄 사람들. 정확히는 원래 내 밑에서 평안하게 일상을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내 창에 죽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남부군으로 배신한 이곳의 영주뿐.

바닥에 발바닥이 닿았다. 엉거주춤 창을 겨누는 병사들에게 철봉을 휘두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희의 죄가 아니다! 물러나랏!”

살기를 피우고, 소리로 살기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게 만들고, 전의 따위는 하늘 위로 날려 버릴 수 있는데.

이백.

당당하게 걸었다.

길은 알아서 열렸다.

그 누구 하나 가까이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성문으로 걸었다.

“뭣들 하느냐!”

“막아!”

인파의 뒤로 숨어 스스로는 절대 나서지 못하면서! 애꿎은 병사들에게 뭐라 하는 놈들이 있긴 했다.

“입만 나불대지 말고 네가 막아 봐.”

방향을 틀어 그런 놈들 앞에 서서 한마디 했고, 역시 달려드는 놈은 없었다.

굳이 그런 놈들에게까지 시간을 들인 이유는 화가 나서였다. 제 수하들을 아끼지 못하는 놈들이 무슨 지휘관인가.

그러다 정말 죽자 살자 달려드는 순진한 병사가 있으면 내 기분만 더러워질 테니까.

손을 들었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게 몇 놈을 죽인 이후로는 더더욱 앞을 막는 이가 없었다.

이래서 시작은 늘 중요하다.

분위기.

죽자 살자 싸우는 분위기였으면 달려들었을 테지만, 덤비면 죽는다는 걸 확실히 인지시켜 주고, 먼저 달려들길 주저하게 만들면 이미 끝난 거다.

삼백.

성문을 보호하는 마법. 파괴하는 건 너무 쉽다.

무효화시키고, 철봉을 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몇 번의 봉질만으로도 문은 부수어졌고.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번천이 가장 먼저 안으로 진입했다.

“투항하라!”

“무기를 버리는 자! 죽지 않는다!”

반항하는 이들은 없었다. 심지어는 기사랍시고, 간부랍시고, 거들먹거렸던 게 분명했을 놈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그들은 별걱정 안 했을 것이다.

병사들은 포로로서 가치가 없지만, 자신들은 몸값의 가치가 있으니까.

늘 그렇듯 피해를 보는 건 아무것도 없는 자들.

수하들이 그런 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난 번천 등을 데리고 이미 영주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군사도 아닌 자들이 영주성 앞을 가로막고 있다.

몸을 떨고 있는 자, 눈을 감고 있는 자.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보고 있는 자, 가지각색이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는 것. 그냥 일반 영지민들이라는 것 말이다.

“저희 영주님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인 이들 중 한 사람의 외침.

“외부 놈들의 압박에 못 이겨 영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에 솔직히 당황했다.

‘이것 봐라?’

지금 이들이 영주를 변호하기 위해 모였다는 건가?

이 제국에서, 아니 북부에서마저도 이런 영지는 없다. 이 정도면 거의 락과 아버님의 관계인데 말이다.

“길을 열어라.”

간부 몇몇이 나섰지만,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문 앞을 막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연극이 아니라 진짜다.

“물러나지 않으면…….”

번천의 외침을 가로막았다.

“재판은 약속하지.”

“…….”

“난 에렌의 영주인 로라스 린 베스타인이다. 재판을 약속했다. 물러나라.”

북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고, 그 무게를 모르는 자도 없다.

그제야 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건 혈향. 그리고 보이는 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와 그 주변의 시체들이었다.

“테폴러의 영주, 상제르! 북부의 지배자이시자 에렌의 영명한 지도자이시고 최강의 무인인 로라스 린 베스타인 백작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소리치는 그를 보며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판이었다.

‘뭐지, 이건?’

사실 테폴러 성이 지금이야 남부군의 보급기지로 쓰여 의미가 생겼지, 원래는 특별할 것 없는 영지였다.

하지만 그는 린델이 내린 총소집령을 거부했고, 남부군에 줄을 댄 배신자다.

그런데 그를 보니, 그런 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 아닌가?

“뭔가? 지금 이건.”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고.

“저희 자트라 가문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며, 이후에도 베스타인 가문에 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지?”

“린델 백작의 소집령은 너무 가혹했으니까요.”

“어떠한 이유도 듣지 않겠다 했다. 소집에 응했어야 했다.”

“충성한 가주이기 전에 저는 테폴러의 영주입니다. 영지민들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흥미로운 항변이다. 이런 귀족은 절대 흔하지 않았기에 더 호감도 갔다.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하다.

이미 선을 갈랐다.

내 편과 적 편을. 거기서 예외가 있어선 안 된다.

“죄가 없다?”

“영지민을 버리고 가는 영주는 없습니다. 저희 일가가 병력을 끌고 에렌으로 갔다면, 이곳의 영지민은 누가 책임집니까?”

항변을 계속 들어 주었다. 그의 영지민에게 약속한 것이니.

“그래서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뿐입니다.”

솔직히 아깝다. 뭔가 더 필요하다.

“약하다. 더 필요해.”

그에게 힌트를 주었고 그는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지켰으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여기 쓰러진 놈들, 성에 비축한 군량을 불태우려 했고, 전 막았습니다. 북부군에 중히 쓰일 군량이기에!”

상제르 남작은 다시 말했다.

“그럼으로 저는 다시 기회를 얻을 거라 자신합니다.”

신념을 기반으로 한 뻔뻔함. 마음에 들었다.

“재판이 있을 것이다. 네가 행한 죄 또한 행한 공. 모두 정당히 판단을 받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이는 그를 보니, 한 사람이 절로 떠올랐다.

‘오리시암. 뭐 하고 있으려나.’

* * *

핀론드.

북부와 남부를 잇는 중요한 요충지.

그런 이유로 아큘라스 공작이 본대와 함께 떠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핀론드에는 꽤 많은 남부의 귀족들과 병력이 남아 있었다.

“카론 백작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지.”

그리고 현재 책임자인 볼륨 백작의 말에, 사내는 비굴한 미소, 거의 직각으로 허리를 엎드리며 대답했다.

“뭘 영향까지야. 저는 그저 황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당연히 따라야 할 길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하하하. 자네랑 있으면 늘 유쾌하단 말이지.”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백작님과 이야기를 하는 건 제 짧은 식견을 크게 넓혀 주니, 늘 감사하니까요.”

“말도 참 잘해.”

볼륨 백작은 웃고 있다가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카론 백작이 자네처럼 좀 유연하면 얼마나 좋아. 결국에는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치지 않았나?”

사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영주님이 꽉 막힌 데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큘라스 공작님 입장에서 찝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찝찝하다?”

“영주님이 결국 옳은 길을 선택하시긴 하셨지만, 원래는 북부에서도 소문난…….”

“충신이긴 하지. 충성의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네, 바로 그겁니다. 아무래도 함께 출전하면…….”

사내가 다시 하는 말에 볼륨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말이지.”

“어차피 잘 나오지 않으시고, 병권도 백작님과 제게 있으니, 만의 하나! 정말 있어서는 안 되지만! 이리 퇴로를 확보하고 있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식견도 있었군. 정말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자넬 보면서 깨달았네.”

볼륨 백작이 했던 말에 이리 대답하고 싶었다.

병신 새끼. 멍청한데 눈치까지 없고, 식견이라고는 우리 집 강아지보다 못하다고 말이다.

사내, 오리시암은 정말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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