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5)
타이밍은 좋았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적의 퇴각병의 뒤를 잡은 상황이었다.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현명했다.
저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문을 열면 그대로 들이치면 되고, 열지 않으면 부대를 정비하고 공성전에 돌입하면 됐다.
“전군 정지.”
그것을 곧 확인할 수 있을 때 로라스의 명령이 떨어졌다.
테폴러 성의 반응을 확인하기도 전이다. 너무 이른 명령인 듯싶었다.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힘든 건 사실이나 들이쳐 봐야 합니다.”
간부들이 한마디씩 하는 걸 보며, 로라스는 담담히 말했다.
“힘이 있어야 싸우지. 뚫는 건 문제가 아니니 성문에 연연하지 마라.”
그 대답은 간부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친 건 사실이다.
정말 최소한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달렸으니까. 하지만 다음 전투가 공성전이란 걸 생각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들이쳐야 했다.
지쳤다 하나 문이 열린 성의 공략.
체력을 회복하고 문이 닫힌 성의 공략.
둘 중 하나라면 다 전자를 택했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들의 영주는 그리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성문이 열리지 않는군요.”
그리고 적의 퇴각군들이 성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번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예상하신 겁니까?”
“너희들도 예상한 거 아닌가?”
번천은 물론이고, 까미유 등을 비롯한 간부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력이 된다면 위험을 무릅쓸 각오를 하고 문을 열어 아군을 받아들였겠지만, 저들은 너무 소수다.
위험부담을 감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에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것뿐.
그때 로라스가 말했다.
“아군을 버리는 지휘관이라…… 마음에 들지 않아.”
“…….”
“움직이지 마라. 적의 기병대가 더 우왕좌왕하게 놔둬. 그럴수록 적의 사기는 떨어질 테니까.”
로라스의 부대에서 성문까지는 그야말로 애매한 거리.
하지만 애매하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성문을 열고 아군을 들이고, 문을 닫을 수 있는 가능성.
하지만 테폴러 성의 지휘관은 그 가능성을 믿지 않았나 보다.
우왕좌왕하던 기병들이 성벽을 따라 옆으로 빠져나갔다.
“추격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까미유의 물음에 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적의 기병들은 다른 곳으로 가 버릴 텐데. 버림받은 놈들이 목숨 걸고 공성 중에 우리 뒤를 칠 것 같아?”
까미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적 기병 입장에서는 충분히 시간이 있음에도 버림받았다 생각할 것이다.
“제 고향이라면 그래도 목숨 걸고 싸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병력 아닌가.”
로라스는 가슴을 톡톡 치며 말했다.
“우리와는 마음가짐이 달라. 그게 침략군과 수비군의 큰 차이점이기도 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을 믿고 밀어붙이는 주군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더한 믿음도 갔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 뚫으실 건지…….’
야전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수성전이다.
공성병기는커녕, 성벽을 넘을 사다리조차 없는 부대다.
그 불안함에 쉬고 있음에도 쉬는 게 아닌 게 되자, 번천이 모두를 대표하여 물었다.
“주군, 그런데 성의 공략은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로라스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다를 거 없다. 특별히 뭘 할 것도 없고. 그냥 따라오면 된다.”
그러다 간부들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본 로라스는 말들을 덧붙였다.
“저거 요새 아니다. 그리고 큰 성도 아니고. 수성을 위한 준비도 얼마나 됐을지 모르고.”
“그렇긴 하지만……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저희가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로라스는 부족한 설명을 더 해 줬지만, 번천을 비롯한 간부들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들은 정말 알고 싶었다.
* * *
“먹자!”
따로 보급을 받을 수 없기에 자신들의 식량은 각자 가지고 왔다.
로라스는 아낌없이 먹으라 지시했다.
내일 성을 공략하지 못하면 바로 굶을 판이었음에도, 로라스는 그런 명령을 내렸다.
모두 조금씩은 걱정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양껏 먹기 시작했다.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간단한 명령을 수행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으니까.
“경계병 세우지 마. 뭐 하러.”
“만의 하나라도…….”
“기습 따위 할 담력이 있었다면, 아군을 그렇게 허무하게 버리지도 않았겠지.”
로라스는 경계에 필요한 인원도 전부 휴식을 명했다. 물론 간부들은 불안하여 자신이라도 경계를 서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면 내가 알려 주지. 쉬어.”
스스로 경계를 설 테니 모두가 쉬라는 지엄(?)한 명령에 간부들도 따랐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후우우우!”
실제로 로라스는 군영을 벗어나 홀로 경계를 섰다.
“하아아아!”
정확히는 수련을 시작했지만, 정말 야습이라도 오면 모를 리 없었다.
‘어찌해야 확실하게 열 수 있으려나?’
로라스는 그 방법으로 마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성전이란 전쟁은 늘 그랬다.
문을 여느냐? 열지 못하느냐?
수성은 분명 유리하나, 문이 열리는 순간 전세는 뒤 바뀐다.
넓은 공간에서 밀고 들어가는 힘. 그리고 좁은 공간에서 그걸 막는 힘은 엄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래서 공성전은 늘 문 근처가 전장의 중심이 된다.
그런 공성전에 포스 마스터와 매지스터라는 새로운 무기가 등장했다.
그 새로운 무기는 별다른 공성 병기 없이 성문을 부수는 힘을 가졌다.
포스 마스터와 매지스터가 전략 무기라 불리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포스 마스터가 성문을 단독으로 부수는 시기는 극히 짧았다.
포스 마스터의 힘을 확인한 각 나라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금세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 대비책 중 하나가 바로 문을 통째로 강철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평상시에도 개폐가 엄청나게 힘든 건 둘째 치고, 엄청난 제작 비용이 들었다.
웬만한 성문 한 짝을 만드는 철이라면 천 단위의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다. 게다가 철이 있어도 그걸 성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철 철문이란 건 요새라 불릴 만한 요충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거대 도시에나 볼 수 있었다.
나머지 성은?
그래서 나온 게 마법이다.
다른 것 필요 없이, 오로지 포스와 마나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에 집중한 마법진과 마나석을 성문에 설치했다.
그래서 포스 마스터의 숫자가 늘어난 지금도 수성전을 수성전이라 할 수 있는 전투가 지속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테폴러 성이 마법으로 보호되는 문짝이라는 거지.’
지금이야 중요한 보급기지가 되었지만, 원래 테폴러는 중부에 흔한 도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연히 강철 문을 제작할 정도의 재정이 풍부한 곳도 아니었다.
‘뭐 상관없다만.’
물론 그랬다고 하더라도 문 열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없으니 수월해졌을 뿐.
‘그래도 쉽게 가는 게 좋지. 계속 달려야 할 테고.’
로라스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이 말로써 존재하기에는 반드시 그것이 이뤄져야 했고, 그는 단 한 번도 하지 못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로라스가 머릿속에 그림을 잡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깨부술까? 아니면 성벽을 넘어 안쪽에서 열어야 하나?’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미지 트레이닝과 동시에 운기조식을 하는 사이 날이 밝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야습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후우웁!”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병력들이 일어나는 걸 보며, 로라스는 호흡을 갈무리했다.
* * *
두렵다.
솔직한 심정이다.
공성전은 야전과는 전혀 다른 전투.
야전에서야 정말 주군의 뒤만 따르면 됐다지만, 공성전은 아니다.
성벽에 막힐 것이다.
두렵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생각할 것도 없다. 그저 따르면 된다.”
하지만 까미유는 자신의 대원들에겐 속내를 감췄다.
“언제 거짓을 말하시더냐. 오늘도 그러하실 거다.”
오히려 자신 있는 얼굴로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제 했던 로라스의 말이 떠올랐다.
―성문을 열 거야. 그러면 야전과 똑같아지잖아.
어떻게라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는 없었다.
묻고 싶었다.
―보는 것이 다르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시야가 다르다는 걸 인지 못하신다. 주군께 어떠한 일은 그냥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번천의 말도 떠올렸다.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서 주군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고, 악착같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여태 그 선택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아쉬웠다.
주군께서 만들어 줄 역사의 기록.
이대로라면 단순하게 이름만 남는다.
직접 동참하고 싶었다. 그 역사에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두려움과 동시에 설렘이 떠올랐다.
분명 뭔가를 하실 것이다.
그 순간 억울했다. 아니, 자신의 안일함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더 열심히 하지 않았나?
왜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는가?
더 열심히 그리고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 뭔가를 이뤘다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왜 안 먹어! 먹어야 싸우지.”
번천이 다가오며 하는 말에, 까미유는 자신의 울분을 토해 냈다.
“더 열심히 했어야 합니다. 그랬으면…….”
그렇게 울분과 자신의 무력함을 표했을 때, 번천이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더 열심히 하나?”
“네?”
“더 어떻게 열심히 하냐고. 여기에 모인 이들 중 열심히 안 한 사람 있나? 병사들마저도 한계에, 한계를 경험하면서 온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자의식이 강해. 다른 놈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게 나을 거다.”
번천에게 칭찬을 바란 건 아니지만, 탓하는 뉘앙스의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번천 경이 주군을 가장 오래 모셨지.’
그래서 까미유는 물었다.
“어떻게 견디신 겁니까?”
“뭘?”
“번천 경도 무인이지 않으십니까? 분명 노력하셨을 거 아닙니까?”
“으음.”
번천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승부욕은 같은 사람에게 발휘해야 한다? 뭐 그런 깨달음은 있었지.”
“같은 사람…….”
“정말 목숨 걸고 죽이고 싶을 정도의 원수가 있었다. 내 능력으로는 평생 노력해도 힘들 그런 원수…….”
까미유는 입을 닫았다.
부대 내에서 가장 입이 무거운 사람이 바로 번천. 그런 그가 사생활까지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주군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리 노력해도 못 잡을 그런 놈이었는데 말이지.”
“…….”
“그런 분이야. 그래서 억지로 쫓아가다가는 스스로 지쳐 쓰러질 테고. 난 그걸 원치 않아.”
번천은 그리 말하며, 슬쩍 까미유를 보며 물었다.
“대답이 됐나?”
“…….”
“뭐, 네가 곁에 모신 시간이 극히 적으니까. 네 뜻대로 전력을 다해 쫓아가 봐. 다만 오늘은 쫓아가는 데만 집중해. 네 그런 의지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그 생각은 잡념에 불과한 거니까.”
“알겠습니다.”
의지를 잡념이라 표현해 버리는 번천이 원망스러웠지만, 까미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하나 말하지 않았는가?
주군을 따르는 것에만 집중하지 못하면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주군께서 너희 형제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락에 있던 너희들을 지목해서 데려올 정도로.”
“……!”
“식사해.”
그렇게 돌아서는 번천을 보며 까미유는 크게 호흡을 했다.
“하아아아아!”
그 한 번의 호흡으로 까미유는 방금 전까지 품었던 모든 감정을 날렸다.
일단 기대에 화답을 해야 쫓아가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거였다.
‘내가 너무 건방졌던 거지!’
정신이 확 드는 까미유였다.
“전원 승마!”
그렇게 시간이 끝나고, 모두가 말에 올랐다.
“진군!”
테폴러 성을 향해 오백여 기의 기병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