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4)
“우하하하하하!”
한 사내가 웃었고.
“우훼훼훼훼훼훼!”
다른 사내가 웃음을 받았다.
모두가 미친 듯이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는 기묘한 상황.
하지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들이 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이게 자신들이 한 일이 맞는가?
스스로 계속 의심이 들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자신들은 이겼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그럼에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게 너무 말이 안 되니 입 밖으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역사다!”
“우리는 기록될 것이다!”
“그깟 게 뭐 중요하다고. 지금이 중요하지.”
“맞아. 논공할 때 우리가 일등이겠지?”
“당연하지. 우리가 뭘 해냈는데! 우리가 최고 전공이지.”
웃음 뒤에 나온 대화.
“주군께서는 후하신 분이다.”
“영주가 되시기 전에도 상벌이 명확하신 분이었지.”
“귀족이 된 병사도 있었어.”
“뭘 주실까?”
대화를 할수록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보다는 이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네.”
“오늘도 우리는 경계 임무에서 빼 주겠지?”
“당연하지. 우리가 제일 큰 공을 세웠는데.”
전투도 전투거니와 부상자를 수습하고, 전리품을 챙기느라 하루 종일 앉아 있질 못했다.
부대원들이 그리 달콤한 휴식을 꿈꾸는 걸 보며, 번천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간부들을 향해 말했다.
“잘했어. 계속 이렇게 하는 거다.”
“네, 번천 경.”
까미유를 포함한 간부들 역시 하나같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고, 번천이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이 마무리되면 생각하는 것 이상의 포상을 기대해도 좋다.”
“오오오!”
“부대원들에게도 그리 흘려, 살아만 남으라고. 그러면 떵떵거리지는 못해도 배 굶주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네, 알겠습니다.”
모두가 힘차게 대답하는 중에 간부 하나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더 행복하게 꿈이나 꾸게 슬쩍 언질이라도 주실 수 있으십니까? 포상이 어떤 종류인지 말입니다.”
“꿈이라…… 그 꿈을 그냥 꾸면 된다고 하고 싶군.”
자신의 대답에 헤벌쭉하는 간부들을 보며, 번천은 주의도 주었다.
“마음 풀어지지 말고. 이제 시작이야. 또 주군의 뒤만 따르면 되긴 하지만, 낙오되면 적진에 갇힌다. 그래선 안 되겠지?”
“그런 바보는 없을 겁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데. 억울해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너희들은 걱정 안 해. 병사들의 군기가 흐트러질까 봐 문제지. 풀어 주고 조여 주는 거 철저히 해.”
“네.”
간부들의 대답에 번천은 그제야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은 꿈을 꾸면 될 거야. 주군께서는 락에서부터 상벌이 너무나도 명확하신 분이었으니까. 그런 주군이 이제 부자이기도 하시니.”
모두가 그렇게 화기애애할 때였다.
“동작 그만. 충성!”
까미유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서며 하는 경례에, 간부들은 그대로 허리를 세우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모두 뭐 하고 있어?”
로라스가 다가오며 하는 말에 번천이 대답했다.
“이제 막 정비를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끝났어?”
“네.”
“그럼 출발해야지.”
로라스의 말에 간부들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말입니까?”
번천이 묻는 말에 로라스는 짧게 대답했다.
“테폴러.”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번천은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순간 드는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부대 정렬시킨다.”
짧은 명령에 간부들도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번 명령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번천의 눈빛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간부들이 모두 달려 나갔다. 그제야 로라스에게 묻는 번천.
“주군, 병사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번천.”
“네, 주군.”
“휴식을 할 만큼 내 전투가 힘들었나?”
로라스의 반문에 번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로라스를 따르는 전투가 힘들었는가?
오롯이 그냥 따르기만 하는 전투가 말이다.
번천은 그걸 고민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습니다.”
의외의 반응에 로라스는 웃으며 물었다.
“따라만 왔는데도?”
“따라갔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를 따라갔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누굴 따라갔냐라…….”
로라스는 잠시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이거 예상 밖의 대답이라……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어지는군.”
“혹시 주군께서는, 스스로 다 뚫으셨으니 힘들 것이 뭐가 있느냐, 그리 말씀하고 싶으셨습니까?”
공손하면서도 의미는 참 불충스러웠지만, 로라스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대화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번천이다.
“그러려고 했지.”
그래서 이 역시 가볍게 대답했고, 번천은 무겁게 다시 말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내보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을 다른 이들이 들었으면 사기가 떨어졌을 테니까요.”
“…….”
“한창 신이 나서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거기에 바람을 불어넣지는 못할망정, 찬물을 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로라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번천. 네가 이리 말을 잘하는 줄 몰랐다.”
“제가 뭘 할 수 있습니까? 그저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하는 것뿐. 말씀하신 대로 전투는 주군께서 다 하셨으니까요.”
“너무 훅 들어오니 민망해지는군.”
“죄송합니다, 주군. 속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 그럼 더 민망해지잖아. 그래. 굳이 내가 내 사람들의 사기를 깎을 필요는 없지.”
로라스는 잠시 궁리하다 말했다.
“하지만 이동은 필요해. 적에게 시간을 주면 피해를 입을 확률이 올라가니까. 싸우기 전에는 충분히 시간을 주지.”
“감사합니다, 주군.”
“내가 더 고맙다. 정신이 확 들었어. 내가 너무 흥분하고 있었어. 그나저나 정말 이제 네 자리를 찾았구나. 부관으로 너만 한 인물이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군.”
정말 큰마음…… 아니, 엄청난 각오까지 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주군의 반응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그저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테니까요.”
전쟁이 결정되었을 때 번천이 들은 조언이 있었다.
“앞만 보실 겁니다. 생각한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을,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적 없고, 가지지 못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경험이 없으세요.”
대체 어찌 그렇게 잘 아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조언에 거침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아요.”
“네? 그게 무슨…….”
아델리나는 번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분이 번천 경을 그리 귀애하시는지 알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주군을 모시는 사람 중에 제 재주가 제일 모자르니……. 혹시 제대로 모시지 못할까 봐 걱정입니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시면 결과야 어찌 됐든 늘 중하게 쓰실 거예요.”
“…….”
“특히 그분께 늘 솔직하세요. 그거면 됩니다.”
늘 솔직하라.
그 단순한 조언에 용기를 내었던 걸까?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계속 그렇게 해. 가끔 나도 잊는다. 내가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그 순간 번천은 머리에 번개가 꽂히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시야가 다르다.
맞는 말 아닌가?
감히 누가 있어 주군과 같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그 말은, 주군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시야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 없음을 대신하는 역할.
“다른 이들에게는 제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주군.”
번천의 대답에는 힘이 어렸고, 로라스는 그가 성장했다는 생각에 기꺼워했다.
* * *
테폴러의 영주인 상제르 남작은 분노 어린 표정으로 외쳤다.
“그걸 나보고 믿으란 소리냐!”
그러고는 눈앞의 형편없는 몰골의 병사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다시 소리쳤다.
“네놈들 혹시 탈영병 아니냐!”
“아닙니다, 영주님!”
“믿어 주십시오! 아군이 궤멸하여 도망친 것뿐입니다!”
기겁을 하며 병사들은 급히 항변했다.
“확인해 보십시오.”
“맞습니다. 확인하시면 소인들의 말이 참말이라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상제르 남작은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해야 했다.
‘정말인 건 아니겠지?’
바르샤바와 일만의 병력이다.
그 병력들마저도 징집병보다 정규병이 훨씬 더 많은 그런 군대다운 군대.
‘그 때문에 마음을 바꿨거늘!’
상제르는 입이 마름을 느꼈다.
모두가 율타산맥까지는 별다른 저항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적은 선봉을 내세워 플라이스 평야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걸 보고 마음이 좋지 않음과 동시에, 그래도 잘 선택했다고도 느꼈다.
물론 단숨에 어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세 좋게 적군의 사기를 꺾고, 아군은 사기를 올리며 율타산맥까지 진격할 거란 건 당연지사라 생각했다.
그런데 궤멸?
그것도 적에게 별 피해도 주지 못하고 대부분 포로로 잡혀? 거기에 에렌의 영주가 바르샤바를 단숨에 갈라? 그것도 본군을 뚫고 달려온 몇백의 무리에?
믿고 싶어도, 믿기 싫은 말들만 한다.
하지만 말이다.
시간을 두고 삼삼오오 성으로 귀환하는 병사들. 그들 역시 처음 퇴각군과 같은 소리를 했을 때, 상제르 남작은 급히 병력을 소집했다.
문제는 이들은 정예라 할 만한 병력이 아니었다.
보급 부대도 전장에 참여했으나, 실제로 그들의 적은 몬스터, 혹은 마적단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특별히 정예병이 필요 없다. 그래서 정예를 선봉부대에 딸려 보냈고, 남은 이들은 징집병, 그마저도 나이가 많거나 적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숫자마저도 천이 되지 않는다.
상제르 남작은 ‘어! 어어!’ 하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한 귀족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군부에 참여한 경험도 있고 말이다.
‘일단 사실 확인부터!’
그는 쉰도 되지 않는 기병대에 급히 플라이스로 가 확인하라 전했다.
그러고는 수성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없는 병력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날밤을 새웠을 때였다.
뿌우우우우웅!
성벽의 나팔수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뭔 소리냐!”
“일 무리의 기마부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상제르 남작이 바깥으로 나올 때, 그 무리의 정체가 밝혀졌다.
“아군입니다. 오후에 정찰 나갔던.”
“정찰부대가 왜 지금?”
뿌우우우우웅!
그때 다시 들리는 나팔 소리.
“또 뭐야!”
답답한 마음에 상제르 남작은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성벽으로 달려 나갔다.
“이 무슨…….”
앞쪽에서 오는 정찰부대.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또 다른 기병들.
“적입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지만, 상제르 남작에게는 불필요했다. 그도 성벽 위에서 보고 있었으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자신의 정찰대의 뒤를 쫓는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상제르 남작은 가슴이 확 조임을 느꼈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저 사자 머리가 수놓아진 깃발을 모를 수가 없다.
“모두 준비하라! 궁병! 궁병들 빨리 자리 잡아라!”
상제르 남작의 외침에 주변인들도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주님. 아군은 어떡합니까? 성문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신호를 보내. 이쪽으로 다가오지 말라고!”
성문 담당인 간부가 급히 제 위치로 달려갔고, 상제르 남작은 초조한 눈빛으로 전면을 쳐다보았다.
‘대체 뭔 수작을 부린 거지…….’
“모두들 서둘러!”
상제르 남작은 그리 소리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항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항복을 할 수도 없고…….’
원래 북부의 귀족이었으나 남부로 갈아탄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