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71)
조용했다.
지금 뭔 일이 일어난 것이지?
앞의 적들만 아니었다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보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본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큰 충격에 머릿속의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왜 아니겠나?
자신들의 지휘관이자, 국내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들다는 무인이며, 이 큰 제국의 수많은 기사들 중 두 손에 꼽히는 기사.
그 모든 걸 가진 바르샤바가 단 한 번의 창질…… 아니, 몽둥이질에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내렸는데.
그게 끝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재빠르게 일어날 것이고,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포스 마스터들의 격돌을 지켜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낙마했을 때 들렸던 그 소리.
힘에 밀려, 균형이 깨져 떨어지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손 한 번 못 써 보고 그대로 철 몽둥이에 가격당했는데, 죽어 말에서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찰나의 인지.
그걸 굳이 생각하지 않았던 건, 그야말로 찰나였기도 했으며, 그리 당하기에는 바르샤바가 가진 힘이 너무나도 높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총지휘관인 바르샤바가 아무것도 못하고 저리 순식간에 죽었다면, 자신들은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존재 아닌가.
그래서 무시했는데, 자신들의 지휘관이 깨어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뭣들 해! 쓸어!”
그대로 기세등등한 적군을 맞이해야 했다.
정신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지위가 좀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군을 수습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다.
쿠우우우웅!
마상에서 그대로 그 거대한 철봉을 바닥으로 찍어 내리는 적장.
“살려 준다. 무기 버려.”
무기를 버리면 살려 준다는 게 아니라, 살려 줄 테니 무기를 버리라는 뜻인 걸까?
아니, 그 두 개는 같은 뜻이었던 건가?
도저히 두뇌 회전이 되지 않았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명령이다. 버려라!”
다시 한 번 외치는 소리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기세 좋게 다가오던 적들이 흠칫하며 무기를 그대로 놓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게 뭔 짓인가?
저건 분명 자신들을 향한 명령일 터인데, 아니, 명령이 아니다. 협박이지.
근데 적장의 그 말을 왜 명령이라 인식했을까?
투욱. 투욱.
하지만 아군 중에서도 무기를 놓치는…… 아니, 던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 멍청이들아! 너희들이 무기를 왜 버려!”
적군 중에서 무기를 쥔 자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죽어랏!”
“우아아아아아!”
그 와중에 아군 중 몇이 단숨에 죽이겠다는 의지의 기합을 지르며 적장에게 달려들었다.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하지.”
하지만 너무나도…… 가볍게 날아간다. 그리고 죽었다. 모기 한 마리 잡는 것도 이보다는 어려울 것이다.
“의지는 없고, 가진 뜻 또한 없구나. 미련한 짓을 하는 걸 보니.”
적장은 그리 가볍게 한마디 하며 전장을 둘러보았다.
그냥 스윽 한 번 본 것뿐인데, 왜 시선이 날 향하는 것일까?
아닌 걸 알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너희들의 힘은 따로 쓸 일이 없으니 더 이상 미련한 짓은 하지 말길.”
웅웅거리는 목소리.
더 이상 달려드는 아군은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적장이 자신이 만들어 온 길을 돌아보며 크게 숨을 쉰 것은 말이다.
* * *
우오오오오오오!
“죽엇!”
“방어를 두텁게 해!”
정신없는 전장.
우오오오오오오!
“너만 힘드냐, 이 새끼야! 창 똑바로 안 들어!”
버티려는 측과…….
“안 들어가!”
“이 병신들아! 우리 숫자가 훨씬 많아!”
“지금 못 밀면, 나중엔 우리가 밀려 당한다고!”
뚫으려는 측.
양측의 병력은 드넓은 평야에 두터운 선 하나를 그리며 대치하고 있었다.
우오오오오오!
‘기병들! 지원은 왜 안 오는데!’
바르샤바군의 3대대 2중대장인 뉴런은 목이 쉴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생각했다.
필승이라 생각했었다.
이 드넓은 평야에 아군의 숫자는 두 배나 많았다.
물론 전투는 숫자로만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건 질 수가 없다 생각했다.
징집병이 있긴 했으나 그 비율은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병종도 조합을 갖춘 상태다.
땡보병 일만이 아니다.
기병에 궁병, 거기에 중보병들까지.
물론 이런 모든 조합이 갖춰져도 불안한 전투가 없는 건 아니다.
지휘관이 상병신일 때.
뭣도 없는 것이, 뭣도 모르기까지 하는 그런 놈이, 혈통 하나만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우습게도 그런 병신 지휘관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바르샤바 백작이다.
자신이 남부 지휘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존경까지 하는 그런 지휘관.
물론 북부군도 만만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소 적 지휘관이 바르샤바만 한 능력자라고 가정까지 했고, 병사들의 질이 저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숫자에 이 병종이면 질 수가 없다.
전투의 시작은 예상대로였다.
저항이 상상 이상으로 탄탄했다. 하지만 아군 뒤에 있는 궁병과 기병 때문에 적은 역습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자신들은 그저 밀고, 밀면 된다.
하지만 기병의 지원이 늦고 있다. 늦어도 지금쯤이면 와야 했는데 말이다.
우오오오오오오!
‘일났다!’
아군의 사기가 높아서 적이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했기에 조금씩 밀고 있는 전선이나, 시간이 지나면 이쪽이 밀리게 되어 있다.
적은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전열을 계속 정비하며 버티고 있지만, 아군의 전열은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잖아!’
우오오오오오오오!
이러다가 적이 밀고 나오면, 밀고 나갔던 것 그 이상으로 흐트러지게 된다.
“밀어. 공간 확보해!”
불안했다. 하지만 자신은 지휘관.
자신의 불안은 수하들에게 바로 전염되기에, 뉴런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그것 이외에 다른 건 모두 배제시켜야 했다.
분명 그랬는데 말이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이 무슨 개 같은 함성이냐고!’
얼마 전부터 들리는 괴이한 소리.
처음에는 이명인 줄 알았다. 귀가 먹으면 가끔 소리가 지금처럼 희한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그런데 말이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이명은 점점 커지고, 울리던 음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어느 부대에서 만들어 낸 함성이 아닌, 개인이 만들어 낸 외침이라는 것을.
말이 되는가?
기합에, 비명에, 철음에, 서로 죽어라 악 지르는 소리까지. 소리만 따지면 피아가 구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개인의 목소리라고?
뉴런은 무시하려 했다. 무시해야 했다. 다시 집중하여 적을 뚫어야 했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북 바로 옆에 있을 때도, 소리가 귀를 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 리 밖 개미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 청력이라도 이처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소리는 분명 그러했고.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 와중에도 소리는 더 커지기 시작했다. 너무 커서 무기를 버리고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을 때, 그래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보았다.
바르샤바의 대장기가 있어야 할 곳에, 다른 깃발이 크게 펄럭이고 있는 것을.
네 마리의 사자가 마치 전장을 내려다보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뉴런은 저 문양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군부에 있는 자들 중 저 깃발을 모르는 이들이 몇이나 있을까?
저건 베스타인 가문의 것.
그런 깃발이 저 후방에서 펄럭이고 있다는 것은…….
뉴런은 이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도 깨달았다.
후방의 지원이 오지 않은 이유?
최전방의 자신이 저것을 인지했는데, 후방의 아군들이 인지 못했을까?
뉴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죽기 전에 하나만 알고 싶었다.
후방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는 정말 알고 싶었다.
* * *
이명이 아닌 것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의 죽음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쁨의 함성과 절망 어린 탄식.
거기에 대한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 전투는 이미 끝났다고 봐야 했다.
여전히 남부군의 숫자가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그것을 아우를 지휘관의 부재는 치명적이었으니.
“투항하라!”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북부군의 간부들이 필사적으로 소리치지 않았다면.
남부군의 전의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더욱 많은 피가 평야를 적셨을 터.
물론 전쟁이 만들어 낸 광기에 여전히 움직이는 자는 있었으나.
“북부의 무인은 무기를 들지 않은 자를 해하지 않는다.”
북부군의 귓가에…….
“너희들의 책임은 아닐지어니.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
남부군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는 로라스의 목소리가 전장 곳곳에 묻은 광기마저 잠재우니.
만이 넘는 대군. 그것도 평야라는 지역에서 치러진 야전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발생해야 했을 사상자의 숫자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적었다.
그렇게 전투는 끝이 났다.
“포로들에게도 물과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라.”
“포로들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말라.”
상부의 지시는 엄했지만, 전우를 잃은 북부군의 태도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까지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큰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간부들도 모른 척 넘어갔다.
몇몇 간부들이 군법을 내세워 일벌백계하려 했지만, 거기에 대해 로라스가 한마디 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지만, 그들은 민간인이 아닌 군인. 그 정도의 불합리함은 감수해야지. 전장이잖아.”
하지만 그 발언은 오히려 북부의 선봉군들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영주님의 명령이니…… 참아야지.”
“이놈들이 예뻐서 봐주자는 게 아니라, 이놈들을 이리 대하면 영주님의 면이 깎여.”
덕분에 전장은 금세 정리되었다.
“대승입니다.”
상급 간부들은 하나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지휘부에 모였으나, 린델의 표정이 좋지 못함을 알고 웃음기를 지워야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간부의 물음에도 린델은 침묵했다.
‘이런 거란 말이지.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
확신했지만 군사의 태생적인 한계, 약간의 의심은 있었다. 하지만 일말의 의심이 부끄러울 정도로, 로라스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자신이 원했던 것을 쟁취했다.
좋았다.
아군의 피해가 예상보다 훨씬 적은 것도 좋았다. 다만 문제는 적의 피해가 너무 적었다.
적 일만을 상대하여 포로만 팔천이다.
포로의 숫자가 아군보다 많은 기현상.
역사적으로 이런 전쟁이 있었다면 염두에 뒀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 그래서 생각해 두지 않았다.
‘병참이 길어진다.’
그렇다고 병력을 빼내어 포로와 함께 후방으로 빠질 수도 없는 노릇.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는가?’
린델의 고민이 계속될 때였다.
지휘 막사로 누가 들어왔다.
“차렷!”
누군가 급히 외쳤고, 이내 모두 부동자세를 취했다.
로라스.
말도 안 되는 전투를 치른 직후였지만, 그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그 엄청난 위력을 보였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는, 그 모습에 경외심까지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주군!”
“대승입니다. 남부군은 주군의 위엄에 벌벌 떨 것입니다.”
장수들이 한마디씩 했지만, 로라스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린델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명하실 일이라도…….”
빤히 보는 그 시선에 린델이 입을 열자, 로라스가 물었다.
“다음은?”
“네?”
“이제 시작 아닌가? 다음은 어디냔 말이야?”
혹시 지금 바로 군을 움직일 생각이신가?
장수들이 ‘설마?’ 하는 생각을 할 때 로라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음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
설마는 역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