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69)
“후우우우!”
하나의 호흡 소리.
전황 판은커녕 흔한 탁자 하나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막사 안은 로라스의 호흡 하나로 이미 터져 나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플라이스가 코앞입니다.”
그런 압박을 참으며 린델은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적은?”
“척후의 보고로는 그쪽도 사흘 후면 도착할 거라 합니다.”
“때가 딱 맞군.”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감겨 있던 로라스의 눈이 뜨였고, 린델이 말했다.
“야전을 선택한 이상 반드시 적의 중군을 갈라 주셨으면 합니다.”
누군가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요구라 생각했을 것이다.
중군은 본군이란 뜻이고, 아군의 숫자가 적의 반도 안 되는 상황에서 중군을 갈라 달라는 말은 군략을 모르는 아이들도 하지 않을 말.
하지만…….
“가르시고, 뒤를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전력을 다하지 않게.”
린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이 정도는 해 주셔야지!’
그리고 그 말에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율타를 포기하고 평야에서 야전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이길 것이다.
로라스의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린델은 그 정도의 요구는 당연히 할 수 있다 여겼고, 또한 로라스가 반드시 그것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루뭉술해, 린델.”
“네?”
“가르고 뒤를 잡는다. 그리고 뭐?”
“…….”
“확실하게! 원하는 바를 말해.”
그런 린델의 말에 어처구니없게도, 로라스는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이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였다.
“적의 선봉대장은 바르샤바 백작입니다. 자이언트 스네이크라 불리는 자로 제국 십대기사에 손꼽히는 자이기도 합니다.”
“보고했었다.”
스스로도 이렇게 말해도 되나 의문스러울 정도의 요구를 한 건 말이다.
“중앙을 갈라 그를 죽여 주시면 됩니다. 반드시 압도적인 차이로 죽여 주십시오. 아쉬운 장수이나…… 적의 전의를 완벽하게 꺾을 수 있을 테고, 아군의 피해는 줄어들 테니까요.”
하지만 말이다.
“알았다. 그리하지.”
마치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하나 꺼내는 문제인 거라도 된 것처럼, 로라스는 그렇게 대답했고.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무대 연출은 마음에 드시는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그 탓에 병사들만 개고생했고.”
“이번 전투가 끝나면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을 것입니다.”
린델은 진심이었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대화가 현실이 된다면, 더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생각도 없이 몰아칠 것이다. 그 정도의 준비는 해 놓았다.
“알았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이들은 사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에서 열외시켜.”
“네.”
그걸로 끝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저찌저찌할 거라는 작전 회의 같은 건 없었다.
중군을 갈라서 적의 선봉장을 잡고, 전의를 상실시켜 쉽게 승리를 가져갈 것이다. 이게 끝이다.
그렇게 이틀 후 에렌의 선봉 오천의 병력은 프라이스 평야로 진출했다.
* * *
“어매! 아까운 것!”
탁시는 이 부대에서 드문 농부 출신이다.
부대 대부분은 헌터, 용병 등으로 칼을 휘둘러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곡괭이와 삽 그리고 낫을 들고 살아왔다.
그런 탁시가 이 부대에 남을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체력 때문이었고, 말을 곧잘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락에 처음으로 정착하던 시절.
당시 락은 이주민들에게 메타린 평야를 개척한 땅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몇 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정책을 펼쳤었다.
그때 탁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척했고, 마을에서 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될 정도였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부모님 그리고 처와 자식들이 매일 세끼를 배부르게 먹는다.
그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탁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먹고살 만한 그가 군부에 지원한 이유는 하나였다.
고마워서, 감사해서.
이 순박한 사내는 그런 기회를 준 락에 은혜를 갚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락이 징집을 하지 않으면서도 늘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스스로 주인이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그런 자부심.
여하간 탁시는 그렇게 군부에 입대했다.
오 년.
한 번 입대하면 의무 기간인 그 시간을 그는 훌륭하게 락의 병사로 지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오 년을 연장했다.
의외로 군부 생활이 너무나도 잘 맞았던 것이다.
군에 입대한 지 이 년 만에 소대장을 달았고, 석 달 전 제대를 연장하며 중대장을 달았다.
물론 현재 부대에서는 중대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만은 없었다.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주변 전우들은 모두 자신 못지않았고, 몇몇은 정말 괴물이라 생각될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소대원들을 보며, 자격이 있나 고민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그 덕분인지 소대원들은 잘 따라 주었다. 이만한 사내들이 따라 주니 탁시는 더 기뻐서 열심히 했고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샜다.
그는 드디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땅에 섰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건 저 수많은 적군보다,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었다.
추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들판.
농부였던, 그리고 한때 굶주리는 일상을 가졌던 탁시에게 그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뭐가 그리 아깝습니까?”
옆에서 부소대장인 블린의 말에 탁시는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곡식. 추수도 제대로 하지 못했잖아…….”
“아이고, 대장! 지금 그게 눈에 들어옵니까? 저 앞에 있는 놈들이 안 보입니까?”
블린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답하자, 탁시는 슬쩍 앞을 쳐다봤다.
“저건 저거고, 이건 이거지.”
그리고 내놓은 대답에 블린은 어이가 없음에 웃음만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안 아깝냐?”
하지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탁시의 물음에 블린은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하긴 미친놈이 탁시 대장뿐인가.’
블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도한 훈련에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보이던 전우들은 어느새 살이 통통하게 올라왔다.
훈련이 끝난 후 부대원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 거라고는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것뿐.
오죽하면 그게 더 걱정이 되어 병사 스스로도 우려했을까?
―증명했잖아. 한 번 증명한 거, 두 번 못할까?
그런 우려에 영주님의 답변은 그리도 간단했다.
―죽을 듯이 훈련했는데, 실전은 그보다 수월해야지. 그래야 살아남지. 스스로 둔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이면 된다.
대담함인지 자신감인지…… 아니면 무모함인지, 정말 정신 나간 듯한 답변 아닌가?
문제는 자신들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탁시가 덜 추수한 작물을 걱정하듯이, 다른 전우들도 각자의 뭔가에 꽂혀 있었다.
모두 미쳤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나도 정상은 아니잖아.’
적군을 눈앞에 두면서도 자신이 생각한 건, 고향에 두고 온 정혼자 세미와 어디서 살 것인가였으니까.
자신이 없지 않은가?
도저히 죽을 자신이 말이다!
뿌우우우우!
뿔피리 소리에도 멍하니 서 있는 블린을 마킨이 툭 쳤다.
“정신 차려!”
“아!”
“중대장님이 깃발 들었다. 집중해.”
“어! 그래.”
블린의 대답에 마킨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
자신의 부대에 떠도는 기묘한 이 분위기.
나름 분석이란 거를 해 본 마킨이었다. 아니, 사실 분석이랄 것도 없다. 자신도 알고, 블린도 알고, 주변의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자신들은 그때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따라만 오면 된다.
고민했다.
왜 자신들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왜 자신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답을 찾지는 못했다.
뿌우우우우우!
그때 뿔나팔 소리가 다시 들림에 마킨은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제 곧 만들어질 것이다.
“가자.”
낮은 음성. 하지만 귓속에 꽂히는 영주님의 목소리.
“우아아아아아아아!”
자신이 제일 먼저 기세 좋게 소리칠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소리치고 있었다.
‘귀청 떨어지겠네.’
자신도 소리치고 있음에도 픽업은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놓고, 귀를 막을 뻔했다.
하지만 픽업은 그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어리바리한 신병 같은 놈이었다면, 감히 영주님의 말…… 몬스터를 돌볼 영광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다른 간부들을 제치고 로라스의 바로 뒤편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사실 자신은 말에 대해서 잘 모른다.
목장의 주인은 아버지였고, 자신은 목장 일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다.
하지만 목장 주인집 아들내미라는 이유로 영주님의 말…… 자꾸 말이란다. 그렇다고 몬스터는 입에 붙지 않고.
그래, 영주님의 탈것을 돌보는 당번병으로 꼽혔다.
다행스럽게 그 탈것의 습성은 말과 비슷했고, 아버지 어깨너머로 본 지식만으로도 별 탈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근데 문제는 말이다.
‘저놈의 꼬리가 무기가 될까?’
탈것의 꼬리는 말의 꼬리와는 전혀 다르다.
뭐랄까?
갑각류를 만지는 기분에 더 가까울 것이다. 가끔 그 꼬리가 곤두서는데, 마치 거친 철 막대를 만지는 기분도 들었다.
픽업은 저게 무기가 될 수 있는 게 궁금했다.
그걸 알아봤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냥 궁금했다.
그래서였다.
지금 영주님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시선은 영주님이 아닌 저 탈것의 꼬리만 보고 있는 이유는 말이다.
“우아아아아아!”
함성이 들리며 타고 있는 말의 속도가 올라가고 있는 걸 알고 있지만, 여전히 픽업의 시선은 탈것의 엉덩이만 보고 있었다.
흔들흔들.
좌우로 흔들리는 탈것의 꼬리.
보면 볼수록, 뭔가에 홀린 듯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야아압!”
“죽어랏!”
주변을 스치는 적군.
픽업은 기계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시선은 여전히 영주님의 탈것의 엉덩이.
“크아아악!”
시야 외부로 들어오는, 발 아래쪽에서 세차게 굴러가는 적군.
픽업의 집중력은 깨지지 않았다.
놀랍다. 전장의 한복판인 것 같은데, 시선은 절대적으로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상태.
“커허억!”
히야아아아아앙!
비명과 묘한 말울음 소리.
‘그냥 죽는 게 안 아플 텐데.’
발밑으로 굴러가고 있는 적군과 그를 태우고 있는 말들.
새로운 경험이다.
눈은 저기에 꽂혀 있는데, 들리는 것만으로도 어찌 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걸 보면.
‘귀로 볼 수 있는 게 이런 것인가?’
그나저나 저 꼬리는?
탈것은 무지막지했다.
놈과 부딪쳐서 정상으로 버티는 말이 없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접촉은 일어나는데,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는 어느 것과도 접촉이 없었다.
그때였다.
‘응?’
좌우로 흔들리던 탈것의 꼬리가, 뱀이 위협하는 것처럼 발딱 섰다. 정말 발딱 섰다.
“흐엇!”
그리고 그것이 눈앞에서 급격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픽업은 급히 말고삐를 당겨야 했다.
간신히! 정말 낙마할 뻔할 정도로 간신히 멈춘 픽업은 그제야 말 꼬리에서 눈을 떼었고.
“……?!”
“병신아! 뒤로 물러나!”
상황을 깨닫는 순간 뒤에서 욕이 날아왔다.
픽업은 급히 뒤로 물러서야 했다.
영주님의 앞을 가로막은 자. 정확히는 가로막게 된 것 같은 사람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가 입고 있는 모든 부위를 완벽하게 커버하고 있는 갑주. 보는 것만으로 베이는 기분이 듯한 보검.
어쩌면 영주님의 탈것과 한번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 거대하면서도 잘 빠진 명마.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위의 모든 것을 지닌 이가 적군의 지휘관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탈것의 꼬리로 가 있었다.
‘확인 못했다…….’
선봉 부대 중의 선봉.
로라스의 병력은…… 정말 모두 정신병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