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68)
경악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
로라스의 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온 번천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래도 로라스를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마저 입을 벌렸다.
로라스가 모든 움직임을 멈춘 뒤에도 모두가 석상이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그대들이 할 건 하나밖에 없다. 오와 열을 맞춰 따라오는 것. 할 수 있겠나?”
“…….”
방금 본 압도적인 광경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번천 홀로 우렁차게 대답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할 수 있습니다!”
로라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먹고, 자고, 쉰다. 그대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으니까. 번천.”
번천과 이미 논의가 되었는지, 그는 거침없이 소리쳤다.
“부대 정렬!”
로라스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열과 오를 정렬했다.
“이제 너희가 할 일은 먹는 것이다.”
번천은 그들을 통솔하여 움직이며 소리쳤다.
그렇게 병력이 움직인 곳은 아침을 먹었던 그 장소.
‘방금 밥 먹었는데.’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이내 소대별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고기도 아니고…… 술도 아니고…….”
은근히 기대했던 병사들은 눈앞의 풀뿌리를 보며 불만을 터트렸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곳에서는 경악하는 소리가 나왔다.
“드레고레?”
입대 전 약초꾼이었던 자, 아니면 평상시에 관심이 있던 자, 또는 원래 알고 있는 자들.
“그게 뭔데?”
“먹기 싫으면 나한테 팔아. 돈 받으면 다 줄게.”
“이걸? 대체 뭔데?”
곳곳의 소란을 보던 번천이 외쳤다.
“먹어랏! 돈이 궁한 자는 팔아도 된다. 후회는 각자의 몫이니.”
모르는 이들은 혼란스러웠다.
뿔 뿌리라 생각했던 것을, 누군가는 굉장히 귀하게 여기며 품속에 챙겨 넣고, 또한 조금씩 뜯어 먹는 자들도 있었다.
번천은 웃으며 말했다.
“주군께서 내리는 보상이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손이 크신 분이다.”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이들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것을 파는 자들도 있었지만, 드레고레가 어떤 것인지 알려지자 나중엔 돌려 달라는 싸움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똑똑한 이들은 이미 모두 복용한 상태인데 말이다.
* * *
“주군께서는?”
야휘 후작의 물음에 린델이 대답했다.
“참석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나아갈 방향만 결정되면 말씀해 달라 하셨습니다.”
“정말 참석하지 않으시겠다는 건가?”
“장기짝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효율적이라고도 하셨고요.”
야휘 후작은 정말 기가 막혔다.
로라스가 분명 그리 말하기는 했지만, 으레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정말 이만의 부대를 온전히 자신들에게 맡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
“에렌의 영주가 아닌 한 명의 무장이라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스스로 강력한 칼이니 제대로 휘두르라 하셨지요. 저는 그럴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만큼 저희를 신뢰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책임도 모두 가져가신다 하셨으니, 이기는 것만 고민하면 될 것 같습니다.”
린델의 말에 야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전쟁이다.
그만큼 부담은 컸지만, 그것마저 모두 가져가겠다는 로라스의 말은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적이 배에 가까운 숫자라는 걸 보고받았지만, 이상하게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일단 일만인가?”
“네. 스네이크가 끌고 온다고 하더군요.”
“몇 번 본 적이 있다. 훌륭한 기사이고, 지휘관이야.”
“그래서 더더욱 훌륭한 무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군께서 더욱 돋보이실 테니까요.”
린델의 확고한 믿음에 야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총지휘관.
늘 만약이라는 걸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하는 자리.
야휘는 자신이 선택한 전장에 대해 말했다.
“율타 산 쪽에 진을 구축하는 게 어떨까 싶네.”
“율타 쪽이라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 때문이지. 기왕 싸울 거 우리 안방에서 싸웠으면 하네. 거기서 일단 적의 예봉을 뭉그러트리고 기회를 엿보았으면 하는데.”
야휘가 율타를 전장으로 삼은 이유는 지극히 타당했다.
적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적을 길게 늘어트리고 병참을 늘리는 것. 게다가 산을 끼고 진을 구축하면 방어도 훨씬 용이하다. 당연히 북부 쪽에 유리한 전장이다.
“우리는 급할 것 없어. 급한 건 남부지. 사만이라는 대군을 언제까지 먹일 수 있을까?”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하지만…….”
린델은 잠시 말을 끊다가 이었다.
“주군께서 믿음을 보여 주신 것만큼, 저희도 보여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싸우면 이기겠다 하셨습니다. 붕괴시키겠다고 하셨지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요격을 하자는 건가?”
야휘의 물음에, 린델은 대답 대신 탁자 위에 놓인 상황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야휘가 놓은 장기짝 중 하나를 쭉 위로 올렸다.
그 장기짝이 위치한 곳은, 율타 산맥에서 한참 남으로 내려간 플라이스 평야.
“야전?”
야휘는 깜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본군을 거기까지 내리면 우리 쪽도 병참이 원활하지 않아. 게다가 뒤가 없으면 곤란해지는 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적의 선봉 규모가 일만이야. 그쪽으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오천이 채 되지 않아.”
“이기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알아. 그러니 비슷한 규모로 전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평지가 필요합니다.”
“주군의 막강함은 나도 아네. 하지만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그럴 수 있게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야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작전인가?
그는 린델은 모르지만 그랑데일은 잘 알고 있었다.
의심을 품었던 것도 열심히 싸우다 보면 어느새 승리했었던 경험을 수십 차례 안겨 줬던 천재 군사 말이다.
린델은 그런 그랑데일의 장자다. 그리고 요르하 가문의 가주다.
장자여서 그랑데일의 뒤를 이었다고 보는 건 어렵다.
그랑데일이 어떤 자인데, 단순히 장자라는 이유로 가문을 맡겼겠는가?
게다가 옛날 베스타인 공작이 어린 나이의 린델을 1군단의 군사로 임명했다는 건, 인정했다는 뜻일 터.
그럼에도 이리 나오는 이유는 주군에 대한 세뇌에 가까운, 맹목적인 믿음 때문일 터.
“오천이야. 그 이상은 안 돼.”
야휘는 결국 조금 양보했다.
오천.
적의 반 정도 되는 병력으로 전선을 모두 커버해야 하는 총지휘관으로서 보일 수 있는 믿음의 숫자.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린델 역시 그것을 잘 알았기에 더 이상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의 일에 대한 의견을 하나 내었을 뿐이다.
“적의 선봉을 격파하는 순간, 전선을 더 밑으로 내려주십시오.”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린델의 의견에, 야휘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스네이크 바르샤바는 아큘라스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장수. 그만 격파하면 병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나도 겁날 건 없으니!”
“그럼 내일 바로 진군하겠습니다.”
“건승을 비네.”
그렇게 막사를 나온 린델은 전투가 벌어질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야휘에게는 승리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솔직히 떨리는 건, 두려운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로라스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
지휘관으로 야휘가 끝없이 뒤를 준비한 것처럼, 자신도 끝없이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최소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건, 누군가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가장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시면 될 겁니다.
에렌을 떠나기 전 한 사람과의 만남.
―보셔도 의심하리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저는 보았습니다. 애초에 주군께서 전쟁을 마음먹은 이상…… 더 이상 주군은 북부만의 지배자는 아니게 되실 겁니다.
섀도의 조언에 물었다.
대체 뭘 보았냐고?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주군은 혼자도 가능하십니다. 그것만 고민하시면 됩니다.
혼자도 가능한 전쟁.
만부지적, 일인군단 등 말도 안 되는 장수들을 형용하는 단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건 그만한 위력이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혼자 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섀도가 그리 말했다는 건…….
그래서 고민했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알았다.
정확히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을 이번 초전에서 확인할 것이다.
린델은 두려움과 자신감, 우려와 기대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 * *
“흐암!”
사내는 크게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이곳이 이리 조용한 적이 있었나?”
에렌의 불야성.
돈만 쓰면 천국을 제공한다는 환락가.
이곳은 깊고 어두운 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그 명성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모든 불이 꺼져 있고, 쥐 새끼 몇 마리만 돌아다니는 황량한 거리가 되었다.
“뭐! 이것도 복이라면 복이지만.”
큰 전쟁이다.
많은 사내들이 전쟁에 참여했고, 그러지 못한 자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런 자들은 감히 나대지를 못했다.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질 것이 뻔했을 테니까.
여하간 사내는 지루했다.
조직원들도 모두 쉬고 있는 상황인데, 굳이 경계를 명령한 상관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내는 감히 태만할 수 없었다.
흑사회.
보통 흑사회 조직원이라 하면, 모두 날건달 같은 놈들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자신의 조직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보스가 군부 출신이라 조직의 체제는 상명하복이 확실했으면, 명령 불복종이란 건 곧 조직의 이탈을 뜻했다.
자신의 조직인 고스트는 그런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내는 흐트러지지 않고 경계 임무를 수행했고,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거리로 진입하고 있는 이들을 먼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본능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적!
특별한 살기를 느끼지는 못했으나, 그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내는 죽기 살기로 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것 때문이구나!’
근래 조직의 간부들이 왜 그리 날카로워져 있었는지 말이다. 자신은 몰랐어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또 한 번 놀랐다.
약속된 보고지에는 평상시에는 감히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할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뿐인가?
일 년 중 특별한 행사 때나 보았던 수장. 그것도 두 명이 모두 있었다. 거기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신비인들까지.
사내는 정체불명 무리의 접근을 보고했고, 그 순간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감히 어떤 조직이 있어서?’
에렌에는 수많은 조직이 있지만, 자신의 조직에 비하면 없는 거나 다름없는 규모.
여하간 사내도 잔뜩 긴장하며 허리춤에 찬 칼을 움켜잡았다.
“뭐 하냐, 너?”
하늘같던 상관이, 더 윗상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싸우는 거 아닙니까?”
“분위기 파악 안 돼? 뒈지고 싶은 거야?”
“…….”
“조용히 빠져 있어.”
사내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 같은 말단 조직원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내일 다시 볼 수 있게 기도나 하라고!”
그 순간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관은 사내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꼭 해 줘. 이번에 나도 살아남으면 종교라도 가져야지. 아! 살 떨리네.”
그리 말하면서 사람들의 뒤로 붙는 상관을 보며, 사내는 생각했다.
‘지금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사내는 무서운 상관을 내일 꼭 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