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66)
“스으으으읍!”
긴 들숨과 함께 로라스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앞으로 내딛고, 다른 발을 뒤로 빼고,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는, 두 팔을 천천히 휘젓는다.
마치 노인이 달밤에 체조하듯 느릿느릿.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동작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육체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는 점점 짙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육체에서 땀이 흐르고, 햇볕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묘한 풍경이었다.
대낮에 그의 주변이 안개 끼듯 뿌옇고, 그 와중에 햇볕에 그의 육체가 반사되는 모습이 말이다.
“후우우!”
그리고 길게 뱉어지는 날숨.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로라스가 단 한 번의 호흡만 했다는 사실은 말이다.
‘완성한 건가?’
무공의 길은 끝이 없으니, 당연히 수련도 그 끝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로라스는 스스로 그렇게 평가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치를 끌어올렸다는 확신을 가졌으니까.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번천과 린델이 로라스의 혼잣말에 반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대단한 걸 본 것 같습니다.”
로라스는 번천이 주는 수건을 받아 들며 말했다.
“너는 타고난 몸이 좋아서 이 고생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린델을 보면서도 말을 이었다.
“너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좀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바쁠 텐데 이리 온 걸 보면 뭔가 변화가 있었나 보군.”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큘라스 공작의 군대가 모두 집결했습니다. 보름 내로 진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보다 늦었군.”
“나름 완벽을 기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단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또 이 기회에 한껏 제 세력을 키워 보자는 거겠지.”
“그런 것도 같습니다. 아직 선전포고도 안 했으니까요.”
“철판을 깔려면 제대로 깔든가. 너무 어중간하잖아.”
이미 남북부의 전쟁은 기정사실화되었는데, 선전포고는 아직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자신처럼 뭉그적대길 바라는 거라면 정말 바보인 거고.”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처음과 달리 자신감이 넘쳐 보이네.”
“영주님께서 개안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해도 너무 오래 걸려. 완벽한 때란 건 없어. 내가 만드는 거지.”
이 상황에서 남부가 전쟁 준비에 만반이란 건, 곧 북부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애초에 로라스는 단시간 내에 결판을 짓길 원했다.
그걸 아는 린델이 설명하듯 말했다.
“준비하면서 유리한 것이 계속 생겨서…… 대표적인 게 에펠리온 교단의 힘입니다. 그것도 거의 준비가 끝났다 했습니다.”
“교단의 힘이라면…….”
로라스는 굳이 묻지는 않았다.
에펠리온 교단이, 아니, 정확히는 아델리나가 무얼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작업.
분명 낯간지러운 일이긴 했지만, 그로 이해 더 결속력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조식은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외적이 생겼다.
아마 지금은.
‘상대를 쓰레기로 만들고 있겠지.’
민심은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확률은 적지만, 간적접인 영향력은 막대하다.
‘게다가 이번엔 억지, 날조가 아닌 좋은 명분도 있을 테고.’
로라스는 입을 열었다.
“누가 선공을 했느냐는 명분은 무시하지 않겠다…… 하지만 판을 짜는 데 너무 오래 걸려.”
린델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입니다. 남부가 곧 움직일 것이고, 에펠리온 교단의 선전 효과가 남부에서도 퍼져 있을 테니. 조만간 판 위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 * *
북부냐? 남부냐?
그것에 대해 논하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전 직전의 상황. 또 수많은 이들이 징집당했다 하나, 원래 내 일이 아니면 상관없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본성.
아니, 도박이란 자기 파괴란 본능에 충실한 법이기에,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마저도 거기에 대해 논하고, 돈을 거는 자들이 늘어났다.
어쩌면 도박이란 유흥으로 전쟁의 두려움을 잊으려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건 오베른 제국을 넘어서 대륙 전부를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났다.
―제국은 왜 그러는 것인가?
세계적으로 게이트가 늘어남에 하루하루가 몬스터와의 전쟁인 상황이다.
―황제가 미친 거 아냐?
그 와중에 타국을 침략했다.
그래도 거기까진 참을 만했다.
원래 전쟁이 그런 거니까. ‘설마 아군이 지겠어?’ 하는 생각도 있고 말이다.
―정말 미친 거야. 황제를 말려야 할 아큘라스 공작까지 왜 그러는 건데?
하지만 북부와의 전쟁은 아니다. 정말 아니었다.
몬스터와 왕국 연합이란 내적으로 남부는 이미 거의 피폐화된 상황.
북부를 부러워하는 남부인들도 생겨나는 상황에서, 이제 북부와도 전쟁을 치르겠다 한다.
이건 당연히 생겨야 할 여론. 민심이지만, 그동안 정신이 없어 그런 사실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큰 잘못입니다. 그분의 계명에서는 동족을 해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물로 인도하기는커녕 독연으로 인도하니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신전은 늘 열려 있습니다. 그분의 집은 그 어떤 순간에라도 안식처가 됩니다.
제국 곳곳에서 황권과 신권의 대립이 벌어지고 있었다.
징집을 당해, 또는 전쟁 거부를 외치는 에펠리온 신전으로 피신하는 사람들.
그들의 주장에는 명분이 확실했다.
―몬스터와는 당연히 싸울 수 있다.
―외적들도 마찬가지다. 내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왜 동족끼리! 내 나라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 하는가!
당연히 민심은 신전 쪽이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라고,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와중에 대륙 제일의 교단이 나서니, 여론은 급격히 팽배했다.
그리고 이내 교단을 강제적으로 폐쇄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민심은 분노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세를 끌어 모으고 자신의 영향력을 끝없이 높이려 했던 아큘라스가 출진을 서두르기 시작한 이유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획한 교황 아델리나는 각지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교단 차원에서 더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방법일 것 같습니다.”
“신도가 부지기수로 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대사제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내놓고 있었다.
대부분 이 기회에 교단이 전면에 나서자는 것.
에펠리온이 대륙 제일의 교세를 지닌 것은 맞지만, 대륙에는 수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그 탓에 상대적으로 제일 클 뿐이지, 절대적 세력으로는 큰 편이 아니다.
그래서 매년 재정적으로 충분치 못해, 신도인 귀족들에게 많은 기부금을 받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아델리나가 신녀였을 시절, 에렌을 비롯한 굵직한 세력을 돌아다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대사제들은 이번을 기회로 보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숫자를 늘리자는 것. 그래서 모든 부분에서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자는 그들의 주장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아델리나는 일축했다.
“얻는 게 많으면 잃는 것도 많습니다. 너무 과열되지 않게 신경 써 주셔야 합니다.”
“성전을 치르는 와중입니다. 신탁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많은 이들이 호응할 것입니다.”
한 대사제의 말에 아델리나가 말했다.
“그럴 수도요.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당연히 세는 확장될 것이에요. 에렌은 이미 우리를 공식적인 북부의 종교로 확정했으니까요.”
“그 전쟁에 교의 전부를 거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북부가 패하기라도 하면 우리 교단은 큰 위험에 처합니다. 바람이 불 때 영향력을 이용하여 다른 귀족들과도…….”
“그럴 일 없어요.”
아델리나는 늙은 대사제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분께서는 에렌의 영주가 모든 마물을 잠재울 것이라고 했어요. 이번 전쟁은 그분이 가는 길의 작은 시련 정도에 불과해요.”
“…….”
“여우처럼 행동할 필요 없어요. 다른 굴을 팔 여력으로 북부에 더 집중하는 게 나중에 이득이 크지요.”
“…….”
“불안해들 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을 합니다. 믿음은 늘 그렇게 힘들게 만들지요. 하지만 그래서 제가 있는 겁니다.”
아델리나는 모인 대사제들을 보며 말했다.
“믿음에는 이유가 없지만, 저는 그 증거를 여러 차례 보여 왔지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믿으세요. 못 믿는 분 계신가요?”
“믿습니다.”
“당연히 믿습니다.”
대사제들이 한마디씩 하자 아델리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두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생각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예요. 고된 길은 길지 않아요. 그리고 그 끝에는 영광만이 있을 뿐.”
“믿습니다.”
“종국에는 유일신인 그분의 가르침만이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받들어, 길 잃은 자들을 인도하는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믿습니다.”
어느새 아델리나가 말하면 믿는다는 복창이 따라 나왔다. 교황인 아델리나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나, 이번에는 뭔가 광기 어린 분위기가 있었다.
“모두 하시던 대로, 완급 조절에만 신경 쓰세요. 물러가세요.”
대사제들이 별다른 말 없이 그대로 물러가자, 아델리나는 신전 한편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신전에서 마법이라니요.”
아델리나의 시선이 닿은 곳, 아무도 없던 그곳에 희끗희끗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래 날 찾는 분들은 왜 이렇게 숨으려고들 하시는지요.”
“이해해 줘요. 불안해서 말이지요.”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낸 에르자일의 대답에, 아델리나가 물었다.
“천하의 매지스터께서 뭐가 그리 불안하십니까?”
“지금 눈으로 보니 더 불안해졌어요. 교황께서 구사하고 있는 그 힘은 파악이 되지 않으니.”
“…….”
“게다가 영향력도 너무 막대하지요. 이런 곳에 앉은 채로 남부를 갈가리 찢고 있지 않습니까?”
아델리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다 로라스 님을 위해서예요. 아시지 않나요?”
“그것도 불안해요. 교황의 모든 행동에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으니까요.”
“말씀해 보세요. 뭐가 빠져 있을까요?”
“이유!”
“…….”
“‘왜?’라는 이유가 빠져 있어요. 처음에는…… 그대가 로라스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델리나는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래서 말투도 달라지셨구요. 그분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요.”
“그분께 도움이 되는 건 맞지 않습니까? 그렇게만 되면 늘 환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48화 참고).
“잘 기억하네요. 하지만 그때는 본심이 보였거든요. 여자만이 알 수 있는.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보이지 않아요.”
“원하시는 거니까요.”
“네?”
아델리나는 아팠다. 하지만 이해했다.
에르자일은 능력이 있고 현명했으며, 무엇보다 어쩌면 사모라 불러야 하는 사람.
“절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의 말을 믿으세요. 저에 대해 분명 말씀하신 게 있으셨을 겁니다.”
“분명 그대를…… 에펠리온의 교황을 가족이라고……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요.”
아델리나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의혹은 늘 불신을 일으키지요. 답을 찾지 못하면 버리는 게 좋습니다.”
“…….”
대답 않는 에르자일을 보며 아델리나는 생각했다.
‘가족…… 맞지.’
그리고 다시 말했다.
“마탑도 전쟁 준비가 한창일 터. 에르자일 님께서도 참전하시나요?”
“에렌의 마탑은 제 스승님의 소관. 저는 와카디아로 합류합니다. 그 전에…….”
“확인해 보고 싶으셨군요.”
에르자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리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흠칫하는 그녀를 포옹하며 말했다.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시군요. 그분의 곁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
“진심이에요.”
아델리나는 그녀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며 다시 한 번 가슴의 상처를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