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64)
“후우우!”
자신들을 쳐다보며 단순하게 숨을 한번 내쉰 것뿐이었다.
환장할 것 같았다. 아니, 환장했다.
시선을 빼앗고, 청각을 빼앗더니, 이제는 호흡까지 빼앗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증명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허억! 허억!”
그저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텼다. 아니, 버티기를 바랐다.
‘그만하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호흡을 빼앗기고, 신경을 빼앗으니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
“믿음직하군.”
이 모든 것을 연출해 냈던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허어억!”
그리고 동시에 대영주들의 참아 왔던 숨을 토해 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로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가? 옛날 생각들이 나는가?”
“…….”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이 자리에 앉았던 분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떤 이가 그 자리를 이었는지.”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알았다 여겼다. 가끔 베스타인 공작이 로라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으니까.
-대단하지. 내 손자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칭찬에 인색한 그가 그 정도로 말한 건 매우 드문 일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손자에 대한 사랑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왜 몰랐을까?
자신들의 주군이었던 베스타인 공작은 일구이언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린델이 그러더군. 모른다고.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고 보여 주지 않으면 늘 우려가 뒤따를 것이라고.”
“…….”
“자! 이제 모두 이야기해 보지. 날 보니 어떤가? 그대들과 그대들의 가문에 운명을 걸어 봄 직한가?”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그 차칼릿마저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으니, 모두 느끼는 게 어떤 건지 짐작할 법도 했다.
린델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군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의했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딱 예상된 사람만 왔군.”
“반드시 얻어야 할 사람은 얻었고, 긴가민가한 사람은 시험했고, 쳐 내야 할 놈은 쳐 냈습니다.”
린델은 그리 말하며 그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야휘 후작은 북부의 기둥 중 하나. 에렌의 충실한 가신이었으며…….”
린델은 모인 대영주에 대해 세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현재 대영주의 업적 등 그 설명은 매우 길었지만, 로라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들었다.
물론 그것도 고도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억눌렀으니 풀어 줄 차례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너희들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며, 이후 그만한 대가도 치러 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린델의 모든 설명이 끝나자 로라스가 말했다.
“믿음은 중요하다. 충성심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
“난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
“과정과 결과에 대해 판단하고 상벌을 정하는 사람일 뿐.”
로라스는 스윽 그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상황의 끝에서 각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아니, 풀어 보면 뭔 말인지 짐작은 가능했다.
내전이 끝난 후 또는 내전과 몬스터 토벌까지 끝난 후 원하는 상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고 했으니, 뭔가 다른 게 있는 것인가?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건 시간이 필요할 터.
로라스는 야휘를 불렀다.
“야휘!”
“네, 주군.”
“수적으로 우리가 열세인데, 노련한 그대가 보기에 어떤가?”
“그 전에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일군단이 남부 전장에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회군하면 필승이며, 혹여 황제에게 이용이라도 당하면 매우 곤란해집니다.”
“군단장 나키아는 내 사람이다.”
로라스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현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에렌의, 아니 북부를 넘어선 제국의 제일 강력한 세력인 일군단의 거취 여부가 불분명한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필승입니다.”
야휘 후작은 자신 있게 말하며 부연 설명했다.
“일군단이 남부에서 북부로 그리고 우리는 남부로.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삼 군단의 전력을 모두 빼 올 수는 없겠지만 일정부분 빼 오고, 저희의 병력이라면.”
그때 로라스가 손을 들어 저지하고는 말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에렌의 군단은 내부의 적보다 외부의 적에 신경 써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외부에서 넘어오는 마물들까지 막고 있는 중이지.”
“…….”
“군단장인 레빙스턴과 서드에게도 그리 명령해 둔 상태다. 현 위치를 고수한다고.”
“군단의 여력은 고작 몬스터들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전부는 아니고 일부이옵니다, 주군.”
“남은 여력이 있다면 그 주변에 써야겠지. 내 땅에서 몬스터 따위가 날뛰게 둘 수 없지 않은가? 와카디아도 마찬가지. 하늘 산맥과 이민족들을 두고 이 전쟁에 참여하는 건 불가하다.”
야휘는 잠시 당황스러워했으나, 이내 원래대로 회복하며 말했다
“의중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여전히 승산은 충분합니다. 일군단이 북부로 진격하면, 남부도 이쪽으로 전력을 다할 수…….”
“미안하지만 일군단 역시 참여하지 않는다.”
“주군! 그게…….”
“제국을 파탄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우둔한 황제와 남부가 이런 일을 벌였다고, 우리까지 거기에 전력으로 응하면 제국은 반쪽이 되고 말 테니까.”
야휘는 다급하게 외쳤다.
“주군! 무엇보다 북부의 생존이 우선입니다.”
“제국의 생존도 필요하지. 하지만 큰 걱정은 말라. 일군단은 남부의 편도 아니니. 지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때가 될 때까지.”
“하지만 군단의 전력을 이용하지 못하면 손발이 묶인 상태로 싸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손과 발이라…….”
로라스는 그리 중얼거리듯 말하며, 야휘에게 물었다.
“그럼 그대는 무엇인가?”
“네?”
“군단이 손과 발이라면 그대들은 뭐가 되느냐 물었다.”
“그건…….”
“난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사람들을 불렀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그럴 주제가 못 된다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인가?”
“주군!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날 알아보는 이들이라 기대했는데 실망감이 드는군.”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하는가?”
“전쟁은 사람입니다.”
“주군의 위대함을 믿지만…… 그걸 받쳐 줄 수 있는 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른 대영주들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대부분 부정적인 말을 꺼낼 때, 베스놈이 손을 들며 말했다.
“부친의 대리로 참석했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칸티뉴의 장자. 말하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로라스의 반문에 베스놈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칸티뉴는 주군의 명령이라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군께서 지켜보고 판단하시니, 그저 명령만 하시면 될 일!”
“…….”
“명령하십시오. 따를 뿐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로라스가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그것도 답이지. 칸티뉴 백작은 아들을 정말 잘 뒀구나! 하하하하하.”
“따르라. 그것이 부친이 제게 전한 단 하나의 말.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계속 지켜만 보던 차칼릿도 입을 열었다.
“그냥 쓸어버리시지요. 못할 건 또 뭡니까? 제게 선봉을 맡겨 주십시오. 시원하게 길을 뚫을 테니, 주군께서는 마지막에 아큘라스! 그 빌어먹을 늙은이의 목만 자르십시오.”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승이셨던 에르페유 경이 그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 그대와 함께한 전투는 늘 시원하고 호쾌했다고. 지금 보니 그럴 것 같아.”
“감사합니다! 다만.”
차칼릿은 슬쩍 야휘 후작을 보며 말했다.
“야휘 후작 역시 백전의 용장으로, 오로지 주군을 위한 충언이었습니다. 신중하자는 의견일 뿐이오니, 주군께서는 그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알려진 차칼릿과 다른 발언에 로라스는 생각했다.
‘거침없어 보였어도 균형은 생각한다는 건가? 하긴 한 지방을 책임지는 이다. 어느 정도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럴 수 없었겠지.’
로라스는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가 본군의 총지휘관의 의견을 가볍게 생각할 리 있겠는가.”
그 발언에 사람들은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야휘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졌다.
대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아까는 실망했다는 발언까지 했으면서, 이번엔 야휘를 총지휘관으로 삼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로라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뭘 그리 놀란 표정들인가? 에렌에는 수많은 명장들이 있지만, 야휘 후작은 에렌의 군단장들과 함께 최고로 꼽히는 명장!”
“…….”
“가장 뛰어난 명장에게 총지휘관을 맡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로라스의 물음에 야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군의 총지휘관은 주군이십니다.”
“난 군의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지, 지휘관은 아니다. 야휘!”
“네! 주군!”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나?”
대체 뭐라 답해야 하나?
자신을 그리 높이 사 주는데 아니라고 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뭔가 핀트가 어긋나 있다.
다행히 로라스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군의 움직임은 그대와 군사 린델이 총괄한다. 이 전쟁의 모든 책임은 당연히 나의 몫이니, 그대는 마음껏 병력을 부리면 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결국 야휘는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로라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칼릿!”
이번에는 차칼릿을 부르는 로라스.
“네. 주군.”
“맹장인 그대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는 선봉에 서지 못한다.”
“주군! 제가 여러 능력은 특출하지 못하나, 그래도 싸움 하나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그래서 전대 각하께서도 에르페유와 함께 늘 절 선봉으로 세우셨습니다.”
“안다!”
차칼릿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평상시라면 모르겠지만, 현 상황에서 저 말고 다른 적임자가 있습니까?”
“내가 설 것이야.”
“그게 누구…… 네?”
로라스는 이를 드러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처음 봤던 야수의 기질이 다시 한 번 로라스에게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선봉은 늘 내 것이 될 것이다. 그게 내 유일한 고집.”
로라스는 야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야휘. 그대는 그것만 지켜 주면 된다.”
“주군…… 하지만…….”
“그게 내 유일한 고집이라 하였다. 나머지 군략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군.”
야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나는 이만 빠질 터이니, 전쟁에 관해서는 군사 린델과 함께 잘 의논해 보게.”
그리 말하며 벌떡 일어서 회의장 밖으로 나가는 로라스.
그런 그를 대영주들은 멍하니 지켜만 보았고, 이내 한 사람에게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이제 내 무대군.’
린델은 옅은 미소와 함께 대영주들에게 말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의논을 해 볼까요?”
하지만 대영주들은 대체 뭐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린델이 말했다.
“이 전쟁에서 제가 세운 전략은 간단합니다.”
“…….”
“싸워 부순다.”
대영주들은 더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