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63)
“형님?”
대답 없는 테라를 보며, 와일드가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아! 당연하지.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 알아낸 것이 많아. 그걸 이용해 놈들을 처단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누워.”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몸을 눕히는 와일드를 보며, 테라는 심난해졌다.
어찌 말할 수 있나?
와일드가 목숨을 걸고 알아낸 그들의 근거지란 게, 골드맨스의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실제로는 도움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중요한 건 여기에 그 녀석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 일은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군도 그리 말하며 신신당부했다. 엄청 도움이 되었다고. 큰일을 했다고. 꼭 그리 믿게 하라고.
“쉬어. 절대 무리하지 말고.”
“네, 형님.”
테라는 나오면서 로라스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토니 아저씨가 그래도 사람은 남겼네.
남기긴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만 치는 데도 바빴을 테지만, 와일드는 그러지 않았다.
저 나이에 목숨 걸고 사지에 들어갈 정도의 대범한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테라는 입맛이 썼다.
* * *
에렌은 매우 조심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서도 활기찼다.
남부의 북부 침략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불안해했다. 하지만 또 그로 인해 영주들과 그 산하 병력들이 에렌으로 모이니 사람들로 북적일 수밖에 없었다.
북부는 크게 16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한 개의 지역에 적게는 십여 개, 많게는 수십여 개의 작은 영지들로 이뤄져 있었다.
로라스는 와카디아, 동부 항구도시 멘토스 등 병력이 반드시 주둔해야 할 4개의 지역을 제외한 대영주들을 소집하였다.
“우아. 블랙버드 기사단이다.”
“할라완 백작님이시다.”
그리고 오늘 에렌으로 들어오는 병력은 베스키왈 영지의 대영주인 할라완과 그의 기사단.
그게 마지막이었다.
와야 할 열두 명의 대영주들 중 에렌으로 들어온 일곱 번째 대영주.
그래서인지 그날 밤 대영주 회의에 참석한 인원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열둘 중의 일곱이면 반이 간신히 넘은 수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의 이탈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모른다.
핀론드의 대영주인 카론 백작은 린델과의 협의하에 오지 않았음을.
여하간 그들 중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한 채로,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덜컥.
그리고 그때 회의장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린델 수 요르하. 대영주님들께 인사드립니다.”
나타난 이는 린델이었다.
린델의 인지도보다는 요르하 가문. 그의 선친인 그랑데일의 이름 때문에 대영주들은 눈짓이나 손을 들어 올림으로 아는 체를 했다.
린델은 준비된 상석 옆자리에 서며 말했다.
“주군께서는 잠시 후에 오실 것입니다.”
“…….”
“주군을 대신하여 모여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현재 상황은 제가 굳이 말 안 해도 아시겠지만,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려 보고 싶습니다.”
그때 모인 대영주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이, 야휘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백작님.”
“다섯이나 참석하지 않았어. 어찌 된 건가?”
린델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차칼릿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걸 꼭 집어 물어보셔서 분위기를 더 안 좋게 만드시려 하십니까?”
“일단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나?”
차칼릿 백작은 턱의 기다란 흉터를 긁으며 말했다.
“확실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감히 대영주 회의 소집령을 거부하고 오지 않았는데. 배신자들입니다. 그냥 처죽여야 할 배신자!”
“허허. 꼭 그렇게 선을 그어야 할 필요가 있나. 대부분 남부와 경계를 맞댄 이들이야.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않겠나?”
“대리인이라도 보내야지요. 저기 앉아 있는 칸티뉴 백작의 장자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모인 이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젊은 사내는 자신의 부친이 거론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부친께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신 것에 대해 여러 대영주님들께 이해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부친께서는 핀론드의 대영주께서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하셨습니다.”
“…….”
“아시다시피 핀론드가 아큘라스 공작 쪽에 섰다면, 최전선은 바로 저희 지역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에 자리를 비우실 수가 없었습니다.”
칸티뉴의 장자, 베스놈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군에 대한 충성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장자이자 독자인 제가 이곳에 온 것이 그 증명이라 생각합니다.”
뭔가 비장한 느낌마저 풍기는 그의 말에, 린델이 말을 받았다.
“칸티뉴 백작의 충성심을 모를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네. 베스놈 남작은 조금의 걱정도 할 것 없어. 이미 주군께서도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셨으니까.”
“감사합니다.”
베스놈이 자리에 앉자, 린델은 다시 야휘 후작을 보며 말했다.
“야휘 후작님.”
“왜 그러시는가?”
“아까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말씀하시게.”
린델은 대영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선을 확실히 긋고자 하시는 게 주군의 뜻입니다.”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 때 린델이 말을 이었다.
“여기에 계신 분들. 그리고 사전에 통보하고, 주군의 허락을 득하고 참석하지 않은 분들을 제외한 다른 대영주들은 지금 이 시간부로 적으로 규정합니다. 기간은 그들이 북부에서 축출될 때까지!”
“…….”
“충분히 시간을 주었음에도 그릇된 선택을 하였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터!”
너무나도 단호한 말에, 야휘 후작은 급히 말했다.
“잠깐! 굳이 그렇게 단정 지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정이란 것이 있어! 언제든 우리 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일체이심一體二心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주군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린델의 간단한 대답에 야휘는 순간 말이 막혔다.
몇몇 대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치는 그리고 상황은 사람이 만들어 내기에 살아 움직이는 것. 굳이 그렇게 미리 선을 긋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이 부족해서 그러시는 거야.’
‘조급하신 거다. 압박이 심하니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욕구인 거지.’
마치 돈을 많이 잃은 겜블러들이 올인을 하는 그런 심리.
도 아니면 모.
새로운 주군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만들까 걱정했던 것도 사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대영주들이 있는 반면, 좋아하는 대영주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차칼릿 백작이었다.
“시원하시군! 그러셔야지! 배신자 따위의 눈치를 봐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지.”
차칼릿 백작은 다른 영주들을 보면서도 말했다.
“뭔 고민을 그리 하십니까? 이미 다 모인 마당에!”
“…….”
“우리가 꿀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병력에, 에렌의 군단이 있는데! 명예도 모르고 충성 맹세를 저버린 박쥐같은 것들을 박멸합시다.”
침묵하던 대영주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백작,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에렌 주변 지역은 안정화되었다지만, 우리 지방은 여전히 몬스터들이 많아. 전력을 투입할 여력이 안 된단 말일세.”
“게다가 군단을 빼면 국경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야. 야만인들과 타국에서 그 기회를 가만히 둘까?”
다른 대영주도 옆에서 거들자, 차칼릿은 소리치듯 말했다.
“그게 어디 우리뿐만의 문제입니까! 남부 놈들은? 그놈들은 몬스터뿐만 아니라, 왕국들과 전쟁 중이란 말입니다.”
차칼릿은 제 말에 흥분하며 욕설까지 뱉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런 상황에서 영지전? 황제도, 아큘라스 공작도 대가리에 볼트를 처맞은 게 분명합니다.”
“말이 지나치네.”
야휘 후작의 말에 차칼릿이 말했다.
“뭐가 그리 겁나십니까? 다른 이도 아닌 후작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뭔가 뜻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다른 사람이 그리 말했으면 그 속을 의심했을 겁니다.”
야휘가 지금 계속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모인 이들은 안다.
전장에서의 야휘는 사신이라 불릴 정도로 적에게 냉혹하다는 것을.
그래서 적을 규정하는 데 저리 신중한 것이다.
“겁나는 게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내 나이에 죽을 자리 만나는 것도 복이지.”
야휘 후작은 그리 말하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휴우! 하지만 지금 나라가 혼란해. 전쟁도 전쟁이거니와 게이트까지 생겨서 그것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거기에 내전까지?”
“…….”
“감히 북부를 공략하겠다는 남부의 의도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네.”
모두가 무거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린델이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한 전쟁입니다. 북부는 그리고 에렌은 그 어느 곳보다 몬스터 토벌에 앞장섰습니다. 주군께서는 잡다한 것부터 정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하셨을 뿐입니다.”
“잡다하다 했나?”
“주군 입장에서는 그게 맞습니다.”
내전을 잡다하다고 표현한 건 분명 무책임하다 생각되었지만, 린델의 표정을 보면 그 말에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에렌을 그리고 주군을 더 믿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
“에렌의 군사로서 확신합니다. 필요한 분들은 모두 모이셨습니다. 저도 더 믿어 주십시오. 아버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테니까요.”
대영주들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리 이야기하는 것인가?
차칼릿 백작 말대로 해볼 만한 전력인 건 사실이나, 말 그대로 해볼 만하다는 거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린 주군처럼 군사도 어려서 저리 오만한 것일까?
“주군께서는 언제 오시는가?”
야휘 후작이 묻는 순간이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모든 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입을 딱 벌렸다.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옷차림이 이상했다.
아니, 차림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의 상체에는 실오라기 한 올 걸쳐 있지 않았으니까.
천하제일의 미녀를 봐도 이리 시선을 뺏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시선을 뺏겼다.
숨을 쉬고 있었다. 움직이고 있었다. 작고, 크게. 마치 하나하나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제각기.
뭔 소리냐고?
상체가 그냥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영주들 대부분은 한가락 하는 무인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저런 근육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가져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꿈은 꿔 본 적 있다.
신체 강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중독성이 있기에 부분 하나하나를 강화하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저 근육은 그 성취감의 끝이라 봐도 좋았다.
처벅. 처벅.
그가 천천히 들어오면서 발소리가 났다.
하지만 회의실 바닥에는 고급 양탄자가 깔려 있다. 소리 따위가 들릴 이유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분명 귓가에 들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기운에 눈이 소리를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천천히 상석으로 가더니 스윽 좌중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차칼릿 백작처럼 포스 마스터는 아니나 그래도 경지에 이르렀는데, 어찌 눈빛만으로 이리 움츠러들 수 있단 말인가?
마치 맹수 앞의 초식동물처럼 말이다.
오기가 생겼다.
아무리 주군이라지만 자신들을 이리 취급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도 무인들이다.
파아아아앙!
커다란 대회의장에 알 수 없는 폭음이 들린 것은 그 때였다.
맹수의 압도적인 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나는 너에게 잡힐 사냥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아니,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분명 그래야 했는데 말이다.
맹수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