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62)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강호에서 오랫동안 굴렀더니 하나는 안다.
여자와 아이가 늘 핍박받는 편이 아니라는 것이고, 다수에 둘러싸인 소수가 늘 정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아는가?
범죄자를 추격하는 어떤 무인 집단일지 말이다. 실제로 청년은 봉두난발에 행색이 아주 불량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다.
청년의 기운이 낯설지가 않았다.
여하간 사내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이내 내가 혼자인 걸 확인하고는 여유롭게 물어 왔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뭐라 답해 줄까?
“이 산 주인.”
거짓이 아닌 짧은 대답에 사내들이 지들끼리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뭐?”
“하하하하. 미친놈인가?”
그러든가 말든가, 저 버르장머리는 곧 고쳐 줄 수 있으니 난 관심사인 청년을 쳐다봤다.
그리고…….
“소영주?”
청년의 말에 귀가 확 열렸다.
소영주.
이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소리인가.
지금의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한 부류밖에 없다.
바로 락의 원주민들.
백작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영지민들은 날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했다.
“락 출신인가?”
“네…… 소영주님.”
억눌러 왔던 뭔가가 터진 것인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온다.
무슨 사정일까?
“귀족이었어?”
“어이쿠. 높으신 분을 몰라봤네.”
옆에서 시시덕거리는 놈들.
이번에도 무시하고 청년에게 물었다.
“이름은?”
“와일드…… 와일드입니다, 소영주님.”
“락 출신이지?”
“네! 그렇습니다.”
“그래, 와일드. 그런데 왜 그리 울상이지? 복색은 그게 뭐고? 락의 헌터라면 장비 관리가 최우선일 텐데, 그걸론 강아지 이빨도 못 막을 것 같은데.”
왜 락의 어린 헌터가 여기서 이런 모양새일까?
그게 궁금했지만 와일드가 뭐라 말하기 전에 끼어드는 놈들이 있었다.
“얘네들 뭐 하는 거냐?”
“거기, 귀족 양반. 우린 귀족에 대한 대우 그런 거 몰라.”
“상황 파악 못하는 게 귀족이란 것들의 특징이지.”
그들을 향해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입술에 붙였다.
* * *
꿈만 같았다
이제 끝났다고,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거짓말처럼 소영주님이 나타났다.
자신의 어렸을 때 기억과 똑같은 모습.
반가워서일까? 아니면 안도감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두 눈이 뜨거워졌다.
쏟아 내고 싶었다.
왜 지금 이런 모양새가 되었는지.
창피하긴 하지만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이르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건.
“상황 파악 못하는 게 귀족이란 것들의 특징이지.”
저 잡것들 때문이었고, 그런 그들을 향해 소영주는 입술에 검지를 갖다 붙였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조용히 시키는 것처럼.
하지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껄렁대며 다가왔을 때 소영주님이 날 보며 물으셨다.
“날 대신해 저것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줘야 하지 않겠느냐?”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리 반문할 수밖에 없었고.
“헌터에, 토벌대까지 참여했으면. 최소 기본 훈련 받았지?”
“그렇습니다, 소영주님.”
“그거면 충분하다. 저것들을 입 닥치게 해.”
순간 ‘내가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질 뻔했다.
‘바보 같은 놈!’
그리고 스스로에게 욕을 했다. 지금 내가 뭘 두려워하는가?
저 잡것들은 모르고 있으나, 나는 알고 있다.
락의 사내들에게 전수되는 포스가 누구에게서부터 전해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전수한 이가 어떤 사람인지, 어르신과 선배 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지 않았는가.
입 닥치게 만들라 명령했으면 그리하면 됐다.
뭐가 걱정인가?
검을 들고 잡것들의 앞으로 나섰다.
“뭐야! 이 병신은?”
“나름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건가?”
희희낙락하는 놈들을 보며 검을 고쳐 잡았다.
입 닥치게 할 것이다. 평생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앗!”
알지만 두려움이 완벽하게 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믿음이 컸다.
그대로 검을 찔러 들어갔다. 잡것이 옆으로 쳐 냄에 손에서 큰 저항이 느껴졌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밀고 나갔다. 궤적이 살짝 바뀌긴 했지만 어깻죽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잡것이 옆으로 피했고, 피한 방향으로 검을 움직였다. 원래라면 다른 잡것들의 공격 때문에 연계시키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의 이 잡것을 잡을 것이다.
“이 새끼가!”
깜짝 놀라 하는 잡것의 외침과 함께, 놈의 검이 내 손목을 노려 왔다. 검날에서 느껴지는 허연 기운.
포스 유저다. 재능 뛰어난 선배들이 보였던, 아직은 내가 가지지 못한 그 힘.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본 훈련 받았지?
소영주는 분명 그렇게 물었다. 그건 내가 가진 기본 훈련만으로도 놈을 이길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놈의 검과 충돌했을 때, 손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락에서 선배들과 싸운 경험을 통해서, 힘을 주지 않으면 짜릿하니 검병을 놓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터어어어엉!
하지만 긴장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야 할 검이, 내가 힘을 주는 방향으로 밀어 나갔다.
“……!”
그리고 보았다.
꿈에서나 그려 봤던 그 푸른 기운이 자신의 검에 실려 있었다.
“하아앗!”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하늘이 포스를 준 것도 아닐 터이니, 지금 누가 마법을 부리고 있는지는 당연한 거 아닌가!
내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넣은 그 강력한 힘.
이게 포스 유저구나!
간신히 검을 보호할 정도의 무늬만 포스 유저가 아니다.
찌르면 찔러지고, 베면 베어졌다.
이거야말로 무소불위의 그런 힘 아닌가?
그간 억눌러 왔던 분노 때문이었을까?
“으아! 그냥 다 죽어!”
“네놈들의 살과 뼈를 분리해 갈아 마셔 버릴 것이다! 분명 그리할 것이다!”
무아지경으로 그저 눈앞의 적을 공격한 이유가, 뭐라 소리가 들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눈앞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베어 낸 이유가 말이다.
그리고 대체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 * *
대체 무슨 한을 지녔던 것일까?
살면서 저만한 살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놈은 몇 보지 못했다.
광인狂人도 눈앞의 와일드에 비교하면 순한 갓난아기처럼 보일 것이다.
그만큼 녀석을 포위했던 상황 파악 못하는 것들은 개박살이 나고 있었다.
혹시 몰라 그리고 연유를 알아보기에 위해 적절히 손을 써, 살려는 두고 있지만 말이다.
“으아! 그냥 다 죽어!”
그사이 와일드는 점점 더 미쳐 가는 것 같았다.
내력을 실어 주고는 있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녀석의 신체가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만.”
그렇게 와일드를 진정시키려 했다.
“네놈들의 살과 뼈를 분리해 갈아 마셔 버릴 것이다! 분명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와일드의 의식은 이미 반쯤 떠난 걸로 보였다. 제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를 것이다.
결국 직접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때.
“이 개새끼들. 내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토니 아저씨를 대신해! 루에다, 마크 형을 대신해 찢어 죽일 것이란 말이다!”
“……!”
그제야 깨달았다.
왜 락의 어린 헌터가 이곳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말이다.
모든 걸 이해했다.
그가 가진 한이 어디서 왔는지까지.
“으아아아아!”
폭발하는 와일드에게 다가가 수혈을 짚었다. 쓰러지는 그를 부축한 채로, 이미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놈들을 쳐다보았다.
“죽이진 않을 것이다. 너희가 감히 내 사람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격을 가지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의 일.”
사실대로 털어놓기만 하면 그럴 것이다.
이깟 놈들에게 분노를 보이기에는 계산이 맞지 않으니.
“자, 이제 말해라. 네놈들의 모든 것에 대해서.”
* * *
“으으으으…….”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이라 와일드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서야 와일드는 슬며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러고는 천장이 하늘 끝에 있는 것처럼 매우 높은 것을 보고는 그제야 현실을 인식했다.
“으으윽!”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시 통증이 몰려옴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었다.
“그냥 누워 있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와일드는 간신히 고개를 돌렸고.
“……테라 형님.”
“알아보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되겠구나.”
“제가 어떻게…… 으으윽!”
“부상도 부상이거니와, 나흘이나 꼼짝 없이 누워 있었으니 몸이 비명을 지를 거야. 억지로 움직일 필요 없다.”
“그래도…… 이렇게…….”
“일단 상처가 아물면 재활 훈련을 할 거야. 그때를 위해 힘을 아껴.”
와일드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흘요? 제가 말입니까?”
“놀랐냐?”
대답하지 못하는 와일드를 보며 테라는 말을 이었다.
“아마 긴장 때문에 네 스스로를 속였던 것 같다. 치명상들은 아니지만 작은 상처들이 너무 많았다. 근골 역시 많이 상해 주군께서 특별히 주의하라 하셨다.”
와일드는 그제야 마지막으로 의식이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소영주님! 소영주님은…….”
“일 보시고 계시지.”
“제가 정신을 잃기 전에…….”
와일드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나는 분명…….’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 봐.
그때 테라가 그의 곁에 다가와 헝클어진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주군께서 널 업고 오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소영주님께서 절 업고 오셨단 말입니까?”
“와일드. 락에서는 주군을 그리 불러도 되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에렌의 영주님이니까.”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도 락의 사람인데, 우리끼린 괜찮아. 하지만 타인이 있을 땐 조심해야 해. 요새 분위기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거든.”
테라는 그렇게 주의를 주고는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 널 업고 오시고는, 성내의 잘나가는 의원을 모두 불렀다. 그뿐인 줄 아냐? 신전의 대사제까지 다녀갔지. 반드시 멀쩡하게 일으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저 같은 놈에게…….”
“넌 그럴 자격이 있어.”
“…….”
“네가 아니면 그 누가 자격이 있을까? 토니 아저씨 토벌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네가 아니라면 말이다.”
“…….”
와일드는 가슴이 요동침을 느꼈다.
이게 인정받는 기분인 건가? 아니면…….
여하간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 그것도 또래 대부분의 롤모델인 테라가 그리 말하니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그 탓에 이제야 생각났다. 자신이 꼭 할 말이 있었다는 것을.
와일드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는 외치듯 말했다.
“테라 형님.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개새끼들! 개새끼들이 있는 곳을 압니다.”
복수심에 몸이 아픈지도 몰랐다. 나흘이나 누워 있으니 놈들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도 있었다.
“그 새끼들 잡아야 합니다. 싹 다 잡아 죽여야 합니다!”
테라는 대번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치는 와일드를 진정시켰다.
“안다. 모두 아니까 진정해.”
“아신다고요?”
“그래. 그리고 이미 놈들의 근거지는 작살냈다. 그 일도 주군이 직접 나서셨다.”
“어찌 아시고…….”
“그건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그저 몸조리만 잘해. 복귀해야지?”
와일드는 결의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물었다.
“놈들의 정체가 뭐였습니까?”
“일단 몸조리부터. 흥분하면 회복이 늦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원한을 갚아 줄 놈은 아직 우글우글하니까.”
“제 손으로 다 죽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알아낸 것이 도움은 된 거겠지요?”
순간 테라는 표정이 굳었다.
와일드는 묻지 않았으면 하는 걸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