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60)
“바깥에 아무도 없느냐! 베스! 카나!”
카론은 늘 자신의 곁을 지키는 충직한 두 기사를 불렀다.
“베스! 카나!”
카론은 다시 한 번 소리치며 문 쪽을 쳐다보았고, 기대대로 문이 열렸다.
“누구냐!”
하지만 문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의 기사가 아닌 서른 정도의 젊은 사내였다.
카론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검을 고쳐 잡았다.
지금이야 이 황량한 영지에 갇혀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만, 그는 원래 군부 출신의 장수.
욘 베스타인이란 이름이 그가 어떤 장수인지 짐작이 가능케 할 것이다.
전대 베스타인 공작으로부터 성을 물려받은 장수가 바로 카론이었으니까.
“이놈들! 단단히 준비를 했구나!”
카론은 분기탱천하며 소리쳤다.
“오냐! 너희가 감히 누구를 공격했는지 알게 해 주마!”
포스 마스터는 아니지만, 그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카론. 그가 포스를 잔뜩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경비병들을 모두 제압하지는 못했을 터! 단숨에 치고 나가야 한다.’
분기 가득한 가운데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은 카론. 그가 움직이려 할 때였다.
“카론 백작은 북부의 대영주이시며, 베스타인가의 수장인 로라스 린 베스타인의 명령을 받들라!”
문에서 들어온 이가 뭔가를 카론 쪽으로 뻗으며 크게 소리치는 순간, 카론의 몸이 멈췄다.
사내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 그 중앙에 찍힌 봉인의 문양은 네 마리의 사자.
베스타인 가문의 문양.
“이게 대체…….”
카론이 혼란스러워할 때 사내가 말했다.
“카론 백작, 의심하지 마십시오. 베스타인 가문의 문양이 마법으로 보호받는 것쯤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법이라 하나, 위조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 매지스터 헤르메스만 한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니니!”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한 의심. 카론 욘 베스타인. 에렌의 여덟 번째 기사. 시크릿 코드는 아이언 월(iron wall).”
“…….”
“확인하십시오. 나머지 코드 역시 쓰여 있을 것입니다.”
사내는 두루마리를 내밀었고, 카론은 경계하며 그걸 받아 급히 문양을 확인했다.
네 마리의 사자. 그 사자의 눈에 쓰여 있는 여덟 개의 비밀 숫자.
잘 쓰이지 않지만 중요한 숫자였다.
명령서의 위조가 의심될 때 그리고 도저히 이해 못하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숫자였으니까.
각 귀족들은 고유의 숫자가 있었으며 그걸 아는 이는 가주와 당사자밖에 없다. 그것도 한 번 써먹은 번호는 고유의 법칙에 의해 바뀐다.
여하간 그 숫자를 확인한 카론은 슬쩍 눈앞의 사내 둘을 확인하고는 두루마리를 열었다.
두 눈동자가 흔들리는 카론.
“믿을 수 없어…….”
그리고 중얼거림에 두루마리를 건넨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백작의 충성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내용이기에.”
“그대는 누군가?”
“처음으로 인사드리는군요. 린델 수 요르하.”
“요르하? 그렇다면?”
“맞습니다. 부친께서 그랑데일이란 이름을 쓰셨습니다. 닮지 않았습니까?”
카론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많이 닮았다.
자신이 아직 하급 귀족이었을 때, 베스타인의 성을 받지 못했을 때 따랐던 대장군을 말이다.
린델은 입을 열지 못하는 카론을 보며 말했다.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정체를 밝히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 사내가 내게 한 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카론이 처음 자신과 이야기를 했던 사내를 향해 하는 물음에, 사내는 씩 웃으며 말했다.
“목 날아갈 뻔했습니다, 백작님. 단단히 준비를 했음에도 말입니다. 백작님의 명성이 헛된 건 아니군요.”
사내는 그러고는 다시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남작, 오리시암이라고 합니다. 백작님을 시험해야 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역할은 저도 원치 않는데, 제 적성에 맞다고.”
“대답부터 하라.”
옆에서 린델이 대답했다.
“오리시암 남작의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추측입니다. 아큘라스 공작이 황제와 함께 서서 북부 공략을 준비하고 있고, 골드맨스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
“백작님께 했던 제안은 사실이면서 추측. 확인된 케이스는 두 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대체…….”
카론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명령서를 올리며 말했다.
“이건? 대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핀론드의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니 그게 무슨 뜻이냔 말일세. 정말 남부에서 북부로 올라온다면 이곳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길목이야!”
핀론드가 황무지라 하나 길목이 낮은 평야. 게다가 에렌까지 거의 직선으로 길도 잘 놓여 있다.
북과 남이 대립한다면 반드시 틀어막아야 할 곳이 자신의 영지다. 그런데 길을 내주라는 건, 카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순간 카론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혹시…… 나보고 첩자가 되라는 뜻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얻을 게 많지 않아. 아니, 많아도 이 지역만큼 중할 게 뭐가 있나?”
린델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게다가 백작님이 저쪽 편을 들어 주는 척해도, 백 프로 신뢰는 얻지 못하실 테고요.”
“그러니까 왜?”
“백작님.”
“말하게.”
“만약에 말입니다. 이 명령이 지금의 가주님이 아닌, 전대 가주의 명령이었다면 어찌 받아들이셨겠습니까?”
“뭐라?”
“말 그대로입니다. 이리 물으셨겠습니까?”
카론은 당연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차마 입을 열진 못했다.
전대 가주께서 그리 명령하셨다면 그리 따랐을 것이 분명하기에.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카론의 말에 린델은 위로하듯 말했다.
“백작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영주님께서도 그걸 아시고, 제게 이 문제를 해결할 전략 구상을 지시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어찌할 생각인가?”
“그들의 편이 되는 척하십시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난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어.”
카론이 정색을 하자 지켜보고 있던 오리시암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제가 온 것 아니겠습니까. 백작님은 그냥 무게만 잡아 주십시오. 제가 그들의 명령을 따르는 척, 도와주는 척 모든 것을 옆에서 하겠습니다.”
린델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곳은 북부와 남부를 잇는 공간. 적에게도 군사가 있다면 반드시 이곳을 병참 기지로 삼을 터. 백작님께서는 그들이 그럴 수 있도록 협조하십시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그래. 적의 후방에 심어 둔 칼. 써먹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칼. 그게 바로 내 임무라는 것. 하지만 말이야.”
카론의 몸에 은연중에 포스가 일어났다.
“가주께서도 날 너무 가볍게 보시는 게 아닐까? 지금이야 이 빌어먹을 땅에서 어떻게 하면 식량 좀 얻어 낼 수 있을지 발버둥 치고 있지만 말이야!”
카론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외치듯 말했다.
“전장에서 난 철벽이라 불렸던 사내. 그 철권 에르페유 경과 함께 전장을 휩쓸었지. 그런 날! 후방에 숨겨 둔 칼로 써먹으시겠다? 그건 내가 가진 능력이 필요 없다 하시는 거 아닌가!”
카론의 모습엔 사뭇 비장미까지 있었지만, 린델은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이번 작전은 모두 제 머리에서 나온 것. 영주님도 큰 틀만 아실 뿐 세부적인 사안은 아직 모르십니다.”
“그리고!”
카론은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백작님을 숨겨 둔 칼로 쓸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칼은 다른 사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보검을 내가 써야지, 어찌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그럼?”
“절 믿고 그냥 그렇게 기다려 주십시오. 절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 아버님을 믿어 주십시오.”
“…….”
“반드시 가지신 그 능력을 쓰시게 될 겁니다.”
카론은 린델을 처음 봤다. 하지만 그 말에 믿음이 갔다. 게다가 그는 그랑데일까지 거론하지 않았는가?
“좋아! 그리하지.”
카론의 대답에 린델은 오리시암을 보며 말했다.
“오리시암 남작이 곁에서 도울 겁니다. 영주님께서 곁에 두실 정도의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의견에 따르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카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황을 어찌 끌고 나갈지는 모르겠으나, 믿고 기다리겠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으리라 약속드리겠습니다. 저에게도 이번이 처음으로 영주님께 제 능력을 증명할 무대이니까요.”
1군단의 군사가 아닌, 로라스의 군사로서 처음 데뷔하는 무대.
린델은 절대 실패할 생각이 없었다.
* * *
“허억허억!”
거친 숨소리와 함께 산길을 마구 달리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와일드.
얼굴은 분명 고작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지만, 와일드는 헌터다. 그것도 락의 헌터.
헌터가 뭐 다를 거냐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일반적인 헌터와 락의 헌터는 달랐다. 그것도 매우 많이 달랐다.
헌터는 그냥 짐승을 잡는 직업이지만, 락의 헌터는 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내를 칭한다.
짐승보다 더 무서운 마물이 우글거리는 락의 산에서 말이다.
‘락의 산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
일반인들에게는 험준한 산이지만, 자신에게는 평지보다 조금 높은 산일 뿐이다.
그 덕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도망쳤음에도, 산에서 여러 달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말이다.
‘끈질긴 놈들.’
와일드는 이를 바득 갈았다.
고참들과 지휘관. 아니, 동네 아저씨, 형 들과 나섰던 토벌전.
열아홉인 그에게 있어 그건 첫 토벌전이었다. 그리고 그 첫 토벌전에서 절망을 맛보았다.
모두 죽었다.
그렇게 강해 보였던 토니 아저씨마저도.
-넌 살아 돌아가야 한다.
-당당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락의 사내로서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네가 그걸 알려야 해.
그날 이후로 매일이 악몽이었다.
도망가라고. 너만은 살아야 한다고.
적의 추적도 추적이지만, 그게 더 끔찍했다.
‘자기들도 살아야지. 왜 나만.’
와일드는 투덜거려 봤지만, 그들이 어떠한 심정으로 그랬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가슴만 더 답답했다.
‘반드시 살아 나간다.’
얼마 남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길을 좀 헤맸고 또 적의 추격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놈들의 정체 그리고 은거지까지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막판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저 앞의 산 하나만 넘으면 에렌의 접경 지역이다.
‘에렌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지만 길 잃을 염려는 없겠지.’
가장 큰 성을 찾으면 될 테니 말이다.
와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산을 올라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이제야 오네.”
“거봐! 결국 이리로 올 수밖에 없다니까.”
“저놈 잡으려고 얼마나 고생한 거야.”
“그러니까 진즉 내 말을 들었어야지. 락 놈들을 산에서 잡으려 하는 게 문제였어.”
십여 명의 사내들.
가벼운 가죽 갑옷 차림에 칼과 단창으로 무장된 사내들. 그중에는 석궁을 든 자들도 있었다.
‘젠장.’
와일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뭘 그리 봐? 살려 달라고 해 봐. 그럼 살려 줄지도.”
지키고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하는 말에, 와일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놈들의 숫자가 십여 명이라는 것.
‘석궁 든 놈만 어찌하면…….’
와일드는 이 빠진 칼을 들었다.
‘살아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