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8)
아큘라스의 말에 골드맨은 입을 열었다.
“인사드린 지도 오래되었고, 얼마 전에 제 수하 놈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소리에 부랴부랴 찾아왔습니다.”
“무례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 독촉하는 게 무례라고 하기는 무리지.”
“제 수하가 정말 큰 실수를 했군요.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대가 직접 이 성에 행차한 진짜 목적이 뭔가?”
“인사도 드릴 겸, 이번에 공작 각하께서 큰 사업을 진행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말입니다.”
순간 아큘라스는 흠칫했다.
방금까지 골드맨스에 북부 장악을 위한 자금 조달을 요청하려 했고, 그들이 이 일에 대해서 어찌 계산하는지 알아보려 한 것도 사실.
하지만 골드맨이 이리 먼저 제안을 해 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알았지?’
아큘라스는 속내와는 달리 시치미를 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사업?”
“노여움을 푸시고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시지요.”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계속 시치미를 떼는 아큘라스를 보며 골드맨은 생각했다.
‘영감탱이가 황제의 밀서를 받고 속이 달았을 텐데.’
아큘라스가 황제의 밀서를 받고 북부를 공략하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캐슬.
이번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오베른 황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는 정보를 하나 주었다.
황제가 북부, 정확히는 에렌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선봉으로 아큘라스 공작을 세울 거라는 것까지.
아큘라스가 황제의 밀서를 받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황궁에도 저희 쪽 사람이 있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말 저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십니까?”
골드맨이 직접적으로 말하고 나서야 아큘라스는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군.”
“외람되지만 황궁에서도 저희 골드맨스를 이용하니까요.”
“하긴. 그 사치…… 품위 유지를 하려면 필요성이 있긴 할 테지.”
“어떠십니까? 생각은 결정되신 겁니까?”
“아직. 너무 급작스런 제안 아닌가. 게다가 뚜렷한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그 어린 녀석을 상대로 내가 나서기도 무리가 있지 않겠나?”
골드맨은 그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명분이 뭐가 걱정입니까? 황제 폐하의 명령이 곧 명분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공작 각하의 무게감은 가지고 계셔야 사람들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리 직접 상의하기 위해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아큘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이 되려니 가만히 있어도 골드맨스의 주인이 먼저 찾아오더니 같이 북부를 요리하자는 제안을 한다.
계산 정확한 그가 이럴 정도면 이번 일은 무조건 된다고 봐도 맞는 게 아닐까?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답게 아큘라스는 확답을 피한 채 물었다.
“만약 내가 움직인다면 어떤 지원을 할 생각인가?”
“전부를 지원할 겁니다.”
“전부?”
“재물과 인력. 그리고 외부 세력의 조력까지 전부를 말합니다.”
“그 정도로 확신이 있단 말이지?”
“공작 각하께서 전면에 나서 주시면 필승이라 자신하고 있습니다.”
아큘라스는 고민하는 척하다 말했다.
“말로 하는 약속은 믿지 않네만.”
골드맨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마치 이렇게 될 거라 알고 있었다는 듯이 품에서 양피지로 만든 문서 하나를 꺼냈다.
“이걸 제 믿음의 증거로 하지요.”
“이건!”
아큘라스는 깜짝 놀라며 시선을 들어 골드맨을 쳐다봤다.
그가 건넨 건 자신이 골드맨스에게 빚진 차용증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내부에서 흔들고, 공작께서 외부에서 흔들면 에렌의 애송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으음. 이 정도로까지 한다면 원하는 게 있을 텐데. 이후 뭘 원하는가?”
“땅도 필요 없고, 저희야 늘 한 가지뿐이지요. 골드 아니겠습니까?”
아큘라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군.”
“각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는 그런 문제입니다. 중요한 건 저희가 확실하게 공작 각하를 지원할 거라는 점이고, 저희는 공작님의 영역에는 조금도 침범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지요.”
아큘라스 입장에서는 더 미룰 것이 없었다.
“그럼 어디 서로 패를 맞춰 볼까? 게임도 손발이 맞아야 할 테니.”
“물론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대한 게임의 판을 짜기 시작했다.
* * *
“죄송합니다.”
“네가 뭘 잘못했다고.”
에듀가 착잡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로라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더 주의 깊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아야 했는데.”
“갚으면 될 일. 토니도 그걸 더 바랄 것이다.”
“네. 그리될 겁니다.”
“어쩔 생각이냐?”
“거둬 내야지요. 하지만 당분간 토벌전은 멈춰 주셨으면 합니다. 에렌이 정리될 때까지만요.”
“휴우! 그건 쉽지 않아.”
에듀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다시 로라스를 물끄러미 보다 그를 불렀다.
“가주.”
“아버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로라스가 깜짝 놀라 묻는 말에 에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렌 바깥을 둘러본 적 있으십니까?”
“그런 말투 불편합니다, 아버님.”
“북부의 영주로서, 가문의 가신으로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로라스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지금은 에렌을 벗어나면 안 되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감히 아버님을 이리로 모신 것이고요.”
“가주, 바깥은 전장터입니다. 다른 곳보다 낫다고 하나, 여전히 마물에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고는 받고 있습니다. 빠르게 진정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에펠리온 교단과 저희의 토벌대를 보며 희망을 품습니다.”
“…….”
“분명 가주께서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겠으나, 그것을 완성하기 전까지 여전히 사람들은 죽고, 그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히 청하건대.”
에듀는 로라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토벌의 임무는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버님!”
로라스는 급히 에듀에게 달려갔다.
‘대인이다, 내 아버지는.’
이런 분이라 좋았다. 덕분에 로라스로서 살 수 있었고, 평생을 존경하며 고독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말대로 가주로서 그런 당신을 막을 수는 없다.
로라스는 에듀를 일으키며 말했다.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조심하셔야 한다는 의미였을 뿐입니다. 토벌? 해야지요. 에렌과 와카디아는 지척에 있으니 영지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에듀는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고, 말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널 이용해 내 욕심을 채우는구나.”
“그게 어찌 욕심이 됩니까? 어찌 됐든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객 따위가 아버님을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이냐?”
“곧 해결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마물 토벌에 계속 집중하마.”
“혹시 무슨 변수가 생기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알았다.”
로라스는 에듀를 성문 앞까지 배웅하고, 집무실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선후를 정리해야겠다. 이것저것 다 집중하다가 상황이 겹겹이 겹치기라도 하면 죽도 밥도 안 될 터이니.’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는 로라스였다.
* * *
“다녀왔습니다, 영주님.”
기다렸던 린델이 돌아왔다.
“갔던 일은 잘된 것 같더군.”
“네?”
“벌써 손을 쓰기 시작했거든.”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자, 그의 표정이 굳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요.”
“그래. 그리고 대범하지.”
“골드맨스는 제가 예상 못한 일입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린델.
“그리고 분명 서로 손을 잡으려 할 것입니다.”
“황제 쪽과?”
“그들은 웬만한 영주보다 더한 힘이 있으니까요.”
“누가 황제 쪽 칼이 될 것 같은가?”
“북부에 그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는 아큘라스 공작뿐입니다.”
“남부에서 치고 올라오겠다?”
“일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진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골드맨스까지 끼었다면, 우리 쪽 사람들이 더 흔들릴 것입니다.”
일이 빨리 진행된다는 건 그리고 흔들린다는 건! 그만큼 내가 얕보였다는 뜻일 터.
“결국 우리가 원했던 그림 아닌가?”
일부러 상황을 혼돈스럽게 만들어 옥석을 구분하는 작업을 하려 했다. 게이트에 대처하려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그 전에 완벽하게 내 것을 만들어야 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내 돈을 남들이 나눠 보관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어떤 놈이 내 돈을 떼어먹을지, 아니면 돌려줄지 가리는 것이다
“속도 조절은 어느 정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분명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올 텐데. 현재 전력상 그것을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알고 있다면?”
“네?”
“그들이 어찌 움직일지 대충 알 수 있다면?”
린델의 눈빛이 달라진다.
“큰 움직임만 알 수 있다면, 골드맨과 공작 그리고 북부의 반역 세력이 동시에 움직여도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사람을 소개할 테니 도움을 받고, 준비를 시작하지.”
“영주님, 그렇다 하더라도 속도 조절은 필요합니다. 효율을 따지면…….”
“필요 없다.”
“영주님!”
“린델,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그러니 판을 까는 데 집중해.”
반신반의하는 린델. 하긴 그는 군사이니 확신이 서기 전에 주저하는 게 많을 터.
린델에게 물었다.
“제일 걱정되는 게 뭐야?”
“역시 북부의 분열입니다. 지방 영주들에게도 여지를 주셔야 합니다. 겉보기만으로는 아직 영주님께서 그만한 힘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겉으로 보여 주면 되나?”
“네?”
“여지…… 난 기회주의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확실한 게 좋다. 그러니 여지 대신 그들에게 보여 주지. 노선을 어디에 잡아야 하는지.”
눈동자가 좌로 그리고 우로 굴러가는 게 보인다.
어쩌면 린델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한 것 같다.
“귀족들. 특히 황궁과 남부에 내가 너무 얕보이는 게 너의 가장 큰 걱정 아닌가?”
“그게 아니라…….”
“말 돌릴 필요 없어. 그러니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 줄 판을 마련해. 큰 판을 짤 필요도 없어. 우리가 먼저 움직여도 나쁠 것 없고.”
“그건 아직!”
“상황에 맞추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자고 했던 건 너다. 네 걱정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상황을 만들어. 내가 너의 장기짝이 될 것이니.”
움찔하는 린델.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들면…… 정말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넌 운이 좋아.”
내 대답에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뜬금없다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해답을 바로 주었다.
“넌 무조건 이기는 장기짝을 가졌으니까. 넌 상대보다 퀸 몇 개를 더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는 거야.”
“…….”
“네 생각보다, 아니 그 어떤 걸 상상해도 난 그 이상의 것을 보여 줄 거야. 그러니 게임을 시작해도 좋다.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 될 테니까.”
내 기운이 전파된 것일까?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믿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믿어야지.
천왕성 초기 내가 어떤 무인이었는지 똑똑히 보여 줄 테니까.
이번엔 어렵게 보여 주지도 않을 것이다.
압도적인 폭력.
그렇게 연출하여 혼을 빼놓아 줄 것이다.
상대가 그 누구든 말이다.
정말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