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7)
할아버지가 어떤 곳에 있더라도, 에렌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보고받을 수 있었던 이유.
에렌 성내에 있으면서도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었던 이유.
‘눈과 귀라…….’
모두 이들 때문이었다.
“애스.”
그때 섀도가 한 여자를 불렀다.
풍성한 빨간 머리카락을 지녔으나, 전체적인 외형은 말랐고 주눅이 든 분위기를 보이는 여자였다.
나이는 스물이나 넘었을까?
“제 후계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살짝 놀라고 있을 때, 섀도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지금 이후로 이제 네가 섀도다.”
“스승님!”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준비하지 않았느냐?”
시선이 마주쳤다.
“주군을 뵙습니다. 앞으로 주군의 그림자로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이쯤 되면 나도 좀 당황스럽다.
옆에서 섀도…… 이제 전대 섀도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어리지만 그림자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안배된 거였다면 다른 말 하지 않겠다. 애스라 했나?”
“그림자 전의 이름. 이제 섀도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분위기였는데, 지금 그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전대 섀도에게로부터 인수인계가 늦어져 올려야 할 보고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어떤 보고를 말하는 거지?”
“몇몇 영지에 외부 세력이 들어왔습니다. 그중 주목할 만한 곳은 골드맨스. 이들은…….”
“잠깐만.”
“네?”
“골드맨스? 거기도 세력이 있나? 고리대금업도 세력으로 칭하나?”
그녀가 당황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차분히 말했다.
“골드맨스가 돈을 다루는 조직은 맞으나, 영토와 따로 병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그곳에 목줄이 걸린 개인과 세력이 많습니다. 그들이 고리대금업자라고 한다면…….”
그녀가 눈치를 살필 때, 섀도가 옆에서 조언하듯 말했다.
“그림자는 사실에 관해 주군에게 가릴 말은 없어야 한다.”
“주군. 그 비유는 마치 지방의 대영주들을 영토 한 조각 없는 몰락 귀족이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정도였던가? 그 고리대금업자 놈들이?
페컴에게 큰 세력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지금 비유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군이 잘 모르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들은 대륙에 손꼽히는 조직이지만, 제국의 북부. 특히 에렌에서는 감히 그들이 활동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할아버지가 막으셨는가?”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것들 그리고 앞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들어 둬야 할 것 같다.
“눈과 귀라…….”
바짝 긴장한 새로운 섀도와 조직원들.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난 참으로 큰 눈과 귀를 얻게 됐군.”
그제야 옅은 미소로 안심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새로운 눈과 귀에 적응해야지. 여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 지금 듣지.”
* * *
섀도. 정확히는 이제 내 섀도의 첫 보고.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조직의 규모도 규모지만, 조직의 탄탄함과 세밀함이 천왕성의 정보 조직이었던 천지견과 대등하다.
그래서 안타깝다.
“왜 진즉 날 찾지 않았지?”
“섀도와 그 조직원들은 끝까지 한 사람만의 것이어야 합니다. 전대 섀도가 제게 조직을 넘기기 전까지, 제겐 아무 권한도 없었습니다.”
“아쉽군. 진즉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사실 나도 정보 조직을 구축하고 있었거든. 나름 성과도 있었고.”
“고스트와 나이트 플라워 등이 만든 그 조직 말입니까?”
“알고 있었나?”
“물론입니다. 도움도 드렸지요. 저희 조직원들 삼십여 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대단하군.”
“히든아이를 제대로 활용하셨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들은 능력이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활용은 하고 있어. 다만 그들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새로 만들고 싶었지. 내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섀도는 살짝 움찔하며 말했다.
“섀도는 주군의 것입니다. 밀어내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상한 걱정을 하게 만들었군. 걱정하지 마. 이제 알았으니 현재 구축돼 가고 있는 조직도 통합시키지.”
“굳이 애쓸 필요 없습니다. 사실 이미 하부 조직으로 이용 중입니다.”
“허…….”
“정국이 혼란하여 세를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고스트를 주축으로 한 조직은 훌륭한 발판이 돼 가고 있었습니다.”
“거침없었군.”
“전대 섀도의 안배였습니다. 그분은 전대 가주를 위해서만 움직였으니까요.”
“나쁘지 않아. 너는 나를 위해만 움직인다는 뜻일 테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조직의 특성상 선조치 후보고가 필요한 상황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믿었으면 끝까지 가야지.”
“감사합니다.”
섀도라는 조직을 알았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
“얼마 전 용납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
와카디아와 렌을 향한 의문의 습격 등을 이야기해 주고는 물었다.
“그들이 골드맨스인가?”
“정보란 일반적인 수집과 목적성을 가진 수집이 다릅니다. 알았으니 조사하여 확실한 사실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 당하고만 있으면 계속 공격해 들어올 터. 정체를 알아야 확실하게 대비할 수 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병력을 일으켰다면 흔적이 많이 남았을 테니까요.”
“확실한가?”
“한 달 내로 결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고민했던 게 약간은 허무해질 정도의 간단한 대답.
“그런데 주군.”
“응?”
“에펠리온의 교황과는 친분이 있으신 겁니까?”
“갑자기 그건 왜?”
“아무래도 그 횡보가 심상치 않아서 말입니다.”
“문제가 있나?”
“문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에렌에 그리고 주군에 엄청난 득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너무 큽니다. 이대로 가면 좋겠지만, 반대편에 설 때 타격이 너무 큽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걸 보니, 정말 시선을 주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리스크 관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주군의 최근 언행을 보면 그쪽에 힘을 실어 주고 계셔서, 더 조사해야 할 일이지만 감히 주군의 명령 없이…….”
“내 뒷조사는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아냐. 점점 믿음이 가는군. 하지만 에펠리온 교단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건 내가 보증하지.”
“그래서 여쭙니다. 따로 그들과 무슨 교섭을 하신 것인지 말입니다. 저희가 알아야…….”
“한 가족이다. 그걸로 대답이 되었나?”
깜짝 놀라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 생각보다 아주 오래된 관계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자리를 주선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쪽과?”
“네. 에펠리온 교단은 결속력은 약할지 모르나 그 자체만으로 봐서는 대륙 최대의 집합체.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무궁무진합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다.
“으음. 다 좋은데……. 식구야, 활용하고 말고 할 게 없는. 상부상조하는 방향으로 연구하는 게 좋을 거야. 에펠리온의 교황은 겉으로 보는 것과 매우 다르니까.”
“네? 그게 무슨…….”
알려 주지 못하겠다.
보아하니 정보 조직으로서 교단을 이용해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반대로 그쪽으로 흡수당할지도 모를 테니까.
천왕성의 정보 조직 천지견의 수장이 바로 곽아이지 않았던가.
섀도의 정체를 안다면 옳다구나 하며 역이용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내 입장에서야 누가 해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밑에서는 주도권 다툼이 일어날 것을 뻔히 아는데 두고 보기에는 좀 뭣한 일이다.
“일단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같은 식구라는 개념에서 접근하도록.”
“네. 특별하게 문제 생기지 않도록 그쪽과는 잘 협력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본인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지만, 이 정도까지 이야기해 놨으니 아델리나를 자극하지 않을 터.
‘어쩌면 제법 대등할지도 모르고.’
아직 내가 섀도에 관해서 많이 아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럼 한 달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빠르면 빨랐지, 그 시간을 넘기진 않겠습니다.”
확신에 찬 섀도의 대답.
그렇게 그녀를 보낸 후 자리에 앉았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토니 아저씨.’
그리될 것이다.
* * *
화려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규모 그리고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공간.
“으음.”
커다란 석좌에 앉아 소리를 내는 노인은 대륙의 단둘뿐인, 아닌 이제는 유일한 공작인 아큘라스 공작이었다.
‘기회이긴 한데.’
한 손에는 빵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쿠키를 쥔 아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얼마 전 황제가 밀사를 보내왔다.
굉장히 복잡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그건 바로 황제가 자신이 북부를 통제하길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사이가 틀어졌지? 아무 공적도 없는 로라스에게 백작위를 안겨 준 건 황제 아니었던가?’
그래서 자연스레 공작의 위를 주고, 북부의 병력이 내려와 이번 전쟁에 참여할 거라 생각했다.
이건 자신뿐만 아니라, 남부 모든 귀족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뭐 일이야 뒤틀어졌다 치더라도, 그런 걸 말하려면 진즉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지.’
에렌을, 북부를 장악한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놈의 전쟁 때문에 자신의 두 개의 군단 중 한 개는 이미 전장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긴 하다.
‘장자와 차자가 밀려난 건 둘째 치고, 손자를 후계로 하다니. 베스타인도 늙어 노망이 났던 게지.’
철저한 승계 준비를 해도 집권 초기에는 탈이 날 확률이 높은데, 이번 승계는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로라스라는 이름은 존재감이 없었는데, 에렌의 영주가 되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던가.
‘지금쯤이면 정신없을 것이다. 물려받은 것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척을 졌다.
수습되지 않은 많은 것들. 소위 콩고물이라는 것들이 후두둑 떨어질 터.
지금이야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아 조심들 하고 있겠지만 곧 소문은 퍼질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다른 대영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희망이 있는 것이다.
‘잘하면 내가 그걸 주도할 수 있지 않을까?’
당장 전력의 반이 빠진 상황이긴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치, 황제의 지원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
‘그래도 베스타인 그의 치밀함을 생각하면, 로라스라는 애송이가 마냥 애송이는 아닐 터.’
아큘라스는 노회한 정치인답게, 단순한 추측만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이투아!”
아큘라스는 자신의 집사를 부르며 명령했다.
“대영주들. 백작 이상의 귀족들을 성으로 소환하라.”
“네, 공작 각하.”
집사가 나가는 걸 보며 아큘라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적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아는 건 더 중요하지. 일단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그때 나갔던 집사가 다시 들어오며 말했다.
“공작 각하, 그들이 왔습니다.”
그들이라 칭했을 뿐이지만 아큘라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왜?”
“어찌할까요?”
아큘라스는 짜증 난 목소리와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들여보내.”
“네.”
아큘라스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그들도 집어넣는 게 좋겠어. 계산은 귀신같은 자들 아닌가? 그들이 투자를 하면 승산이 높다는 것이고, 아니라면 나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지.’
거머리 같은 놈들이지만, 이런 일에는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다.
그렇게 잠시 후 집무실로 한 사람이 들어왔고, 아큘라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사람이 직접 왔다고 이야기를 했어야지!’
빚을 독촉하기 위해 매번 찾아오던 놈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수장이 직접 찾아왔다.
그는 자신도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지고 있는 막대한 빚의 채권자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공작 각하.”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대가 직접 왔는가, 골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