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56화 (25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6)

모임에서 한두 개의 자리가 비는 건 늘 있는 일. 하지만 오늘은 참석할 인원들이 다 모였다.

하지만 그 숫자는 다섯.

다 모였음에도 그 숫자라는 건.

“처음 있는 일이지요?”

칠 인의 좌 중 홍일점 템테이션이 입을 열었지만,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어 있는 두 자리를 채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신지. 모두 귀가 있으시니, 두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고 계시지 않나요? 오늘 모임도 그 때문에 긴급하게 열린 거고.”

그 말에 황금 장신구로 주렁주렁 치장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긴급할 것까지야.”

“그래도 모두 참석하신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흔한 일이 아니긴 하지. 그래서 모인 거고.”

듣고만 있던 장발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꽤 태평해 보이십니다, 골드. 알기로는 이번에 손해가 꽤 크다 들었는데.”

“손해는 무슨! 내 언제 빌려 주고 못 받은 적이 있었던가? 받기 전까진 손해는 손해가 아니지.”

골드라 불린 노인은 강하게 부정하고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하지만 이미 죽은 놈들에겐 어찌 받을꼬.”

“죽은 이요? 갑자기 그게…… 아! 두 사람에게도 돈을 빌려 주셨습니까?”

“빌려 줬지. 그것도 꽤 많은 돈을.”

템테이션이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죽더라도 빌린 돈은 받는 분 아니신가요? 두 사람이 남긴 것도 상당할 텐데요. 회수 못할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게 빌어먹을 일이란 말이지. 채무자. 그것도 거대 채무자 셋이 남은 게 없어.”

“남은 게 없다니요?”

골드는 자신의 귀에 달린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고약하게 됐지. 내가 가져가야 할 것을 애먼 놈이 가로챘으니까.”

“골드의 돈을 욕심내는 사람이 있다니, 그거 놀랍네요.”

“있어. 괘씸한 놈이. 오늘 그걸 논의하고자 하는데.”

골드의 대답에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에렌의 영주입니까? 골드의 돈을 훔친 자가?”

후드를 눌러쓰며 입을 여는 이는 캐슬.

“그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라진 두 사람이 그에게 당했는데.”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캐슬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그 젊은 영주 때문에 일 하나가 틀어졌는데 말입니다. 이번엔 골드 님도 당하신 것 같군요.”

“당한 것까지는 아니지. 아직 제대로 손을 쓰지 않았거든.”

골드는 미소까지 지어 가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굉장히 당황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대화라는 것을 시도했을 때 받았어야지.”

“벌써 손을 쓰셨습니까?”

“경고는 해야지.”

골드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협조하지 않겠나? 꽤 덩어리가 커. 제대로 요리만 하면 우리가 나눠 먹어도 배가 터질 것 같은데?”

남은 네 사람은 서로 시선을 나눴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내가 보장하지. 일이 잘못되면 그에 대한 손실은 내 돈으로 보상해 줄 거야. 물론 그런 계약이라면 나눠 먹는 몫은 줄어들겠지.”

골드는 그리 말하며 중년인을 향해 말했다.

“어둠을 지배하는 왕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나? 이번에 모자란 것을 채우는 게……?”

“내가 모자란 게 어디 있습니까?”

“에렌의 어둠은 자네 것이 없지 않은가?”

골드의 반문에 중년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있습니다……. 아니, 있었지요.”

“이런. 있었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것이고…… 자네가 자네 것을 내주지는 않았을 테고. 뺏겼겠군.”

“잠시 넘겨준 거지요. 워낙 복잡해서 다른 곳까지 타격이 올까 봐.”

“지금 에렌의 어둠을 장악한 조직이 고스트였던가? 의외야.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조직에 빼앗기다니.”

중년인은 버럭했다.

“멍청한 놈이 정치놀음을 하더니!”

에렌의 흑사회는 원래 그의 것.

에렌에 있는 깊고 어두운 밤은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인데 그것을 자신의 심복이 뺏겼다.

무덤에 가도 놈의 이름은 기억할 것이다.

미카이.

조직을 더 키워 보겠다고 귀족들, 특히 디존슨에게 줄을 댔다가 홀라당 뺏겼다.

“되찾아야지.”

그때 골드가 은근한 눈빛으로 하는 말에 중년인은 말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에렌에 빚이 있는 것 같긴 하군요. 하지만 골드의 도움 없이도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도 있으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우리 중 두 사람이 협력했는데도 당했어. 상대가 에렌이야. 초월자였던 베스타인 공작이 사라졌다지만, 그가 남긴 유산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지.”

“…….”

아무 대답 하지 않는 중년인을 보며 골드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잘 생각했어.”

“전 아무 대답도…….”

“장고 끝에 악수 나오는 거지.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마.”

골드는 다른 사람에게도 말했다.

“원금 보장까지 해 준다는 이런 조건이 어디 흔하게 있겠나? 참여하지.”

“골드와 나이트가 손을 잡는다면 저도 흥미가 돋는걸요.”

“옳지. 템테이션까지 나서 주면 거의 게임은 끝났지. 두 사람도 끼어야지.”

남은 건 캐슬과 여태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던 장년인.

“저는 일은 혼자 하는 게 효율이 좋아서.”

캐슬이 하는 말에 골드가 미간을 찡그릴 때였다.

“그리고 일을 하실 때 조심하십시오.”

“무슨 말인가?”

“에렌의 영주 말입니다. 대범하기 짝이 없어요. 아니,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

캐슬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베른 황제와 척을 지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에렌의 영주에게는 공작이라는 작위가 필요 없나 봅니다.”

캐슬의 말에 모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 * *

공작이라는 이름 따위는 필요 없었다.

공작이라는 작위.

황제를 빼면 최고 권력자의 상징.

그래서 오베른 제국에는 단 두 명의 공작밖에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 작위가 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 역시 내 한 사람이 더 중한 것을.’

감히 어떤 놈이 이런 일을 벌인지 찾아야 했다.

‘내가 너무 쉽게 수를 두었는가?’

자책 같은 걸 하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토니의 죽음은 그리고 와카디아 사람들의 죽음은 수백 번 자책해도 모자람이 있었다.

전장에서 죽었다면 이리 애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거대한 기운, 붕 뜨면서도 몸을 조이는 느낌.

얼마 만인가?

이런 분기(忿氣)가 가득 찬 건.

불행 중 다행인 건 렌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제 의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동시 다발적인 공격.

사람들을 불러 모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리 게릴라식으로 공격해 오면 누구든 무너질 수 있다. 그에 대한 경계심이 필요했다.

‘문제는 어떤 놈이냐는 것인데?’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황제다.

린델의 보고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지만, 약이 바짝 올랐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사라진 후 제국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내가 자신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하라면 하라는 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가장 강력한 용의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시간이 맞지 않는다.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황제가 미리 나를 공격할 준비를 해 놓았을 것 같지는 않다.

‘디존슨? 멘토라스?’

아니, 불가능하다.

디존슨의 세력은 뿌리 뽑았으며, 멘토라스는 당분간 숨죽여 지낼 정도로 공포를 심어 줬다.

‘그럼 대체 누가? 제삼의 세력?’

짐작할 만한 적이 없다.

외적에 대비하여 만든 정보 조직은 있지만, 아직은 에렌과 와카디아에 한정되어 있다. 자금을 퍼붓고 있지만, 정보 조직이란 건 원래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조직.

그렇게 고민할 때였다.

“누군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기척에 넘어갈 뻔했지만, 누군가 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모습을 드러내는, 갈색 옷을 입은 장년인.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대면하는 건 처음이군요.”

잘 벼린 칼날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음에도, 잘 품고 있어 표출이 되지 않는다.

내가 이리 느꼈다면 반박귀진의 수준을 넘어선 고수. 그리고 이런 기운을 가지고 날 찾아올 이는 단 한 사람.

“그대가 섀도인가?”

“이제야 인사드리는군요.”

그런데 이상하다. 섀도는 할아버지의 심복 중의 심복. 하지만 말투가 예상과는 다르다.

그런 속내를 알아본 듯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군께서 제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한 에렌에서는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을 권리를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종종 거론하셨지만, 그대에 관해서는 정말 말을 아끼셨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가 그대를 믿었던 만큼 나도 그대를 믿는다. 난 그분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으니, 믿음도 그리해야 할 터.”

담담한 그의 표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림자가 자유를 얻었는데 왜 날 찾아왔지? 새로운 그림자가 될 생각은 없을 텐데.”

“주군께서 마지막으로 내리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은 안 계시니 모든 것을 이어받은 로라스 님께 보고를 드리려 합니다.”

“계속하게.”

“놈에 대한 정보입니다.”

섀도의 말은 계속되었고.

“인위적인 것이다?”

“게이트를 생성하는 놈들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어지는 섀도의 말은 놀라웠다.

“이미 세력화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실체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제 힘이 미치지 않는 땅이라 더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섀도의 말을 정리하면, 할아버지가 우려했던 그것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다고 했다. 애초에 게이트들이 늘어나는 이유도 그것의 부활.

이건 정말 소설 속 악당이 대마왕을 부활시켜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그것을 거론한 이가 섀도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더 복잡해지겠다.

“그런데 로라스 님.”

“말하게.”

“황궁과의 관계.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아는 게 많군.”

“제가 모시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보고도 보고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를 따라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놀랍게도 내 침실.

“이게 뭔가?”

침상 뒤로 열리는 벽을 보며 어이가 없어 한마디 했다.

“죄송합니다. 최후의 순간에도 저와 저의 조직의 정체는 단 한 사람만이 알아야 합니다. 주군과 함께 역대 가주들께서도 저희가 정체를 드러낼 때에야 아셨지요.”

“저희?”

“들어가시지요. 설명드리겠습니다.”

그가 앞장섰고, 따라 들어갔다.

‘이 성은 참…… 크군.’

내실에 연결된 최후의 보루도 그렇지만, 이쪽 공간도 매우 컸다.

‘그나저나 그만큼 믿으셨다는 건가? 할아버지도, 역대 가주들도?’

침상에 마련된 입구.

그만큼 섀도는 가까이 둬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믿는다는 뜻이다.

물론 암살 따위는 상상조차 못 할 강함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을 것 같지만 말이다.

여하간 비밀 통로를 계속 따라 들어갔다.

“미로인가? 뭔가 좀 이상한데?”

눈앞에서 길이 바뀌고 있었다.

반은 환영이고, 반은 실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섀도가 답했다.

“이곳은 십사 대 가주께서 만드셨습니다. 건설하는 데만 십 년이 넘게 걸렸다 들었습니다.”

최후의 보루를 만든, 건축에 취미를 가진 그분인가 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는 저희 조직원들이 드나드는 곳이고, 침실로 가는 길은 오로지 저만 알고 있습니다.”

“계속 가지.”

그렇게 섀도를 따라 들어갔고, 어느 순간 공간은 확 넓어졌다. 그리고…….

“하아!”

절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지도와 더불어 수많은 작은 지도들이 벽에 붙어 있었고, 서른 남짓한 사람들이 뭔가를 그리거나 쓰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낸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가주께서 오셨다.”

순간적으로 앞으로 달려오는 이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성내 이런 공간에 있는 것인가?

그때 섀도가 말했다.

“이 사람들이 앞으로 로라스 님의 눈이고 귀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