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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55화 (255/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5)

황제?

변방의 그리 크지 않은 영지. 그것도 아직 제대로 된 작위도 없는 젊은이가 입에 올릴 단어는 아니었다.

다른 이가 했다면 헛바람이 잔뜩 들었거나 망상 가득한 정신병자라 했겠지만…….

‘우리 주군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으시지. 뜻만 계시다면.’

떡잎부터 다른 분이었다.

열 살도 안 된 나이였지만, 그 누구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영지민들에게는 친근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랬다.

‘이미 반쯤은…….’

에렌의 영주와 황제가 다를 것도 없다. 오히려 어느 부분에서는 에렌 쪽이 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말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데.’

그저 늙은 나이가 원망스러울 뿐.

‘그래도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을 이루지 않았나.’

토니는 애써 그리 자위하며 병력을 정리했다. 그리고 병력과 와카디아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초기 이천의 토벌대가 이제는 오백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지역 몬스터들이 씨가 마른 이상 천여 명은 다른 토벌대에 합류하기 위해 보냈고, 나머지 병력은 쌍둥이 형제에게 딸려 보냈다.

“날이 좋구나.”

서부 원정을 시작할 때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풍경도 좋고.’

생각해 보면 평생을 락에서, 기껏해야 와카디아 영지만 보고 살았던 삶이었다.

‘바다란 것도 보고 싶지만, 그건 욕심이겠지?’

서쪽으로 보름쯤 더 가면 바다가 있는 지역이 나온다. 혼자라면 마음먹고 다녀오겠지만, 지금은 병력을 이끌고 있으니 그건 무리.

‘은퇴하면 꼭 한번 봐야지. 그렇게 멋지다던데.’

토니가 그 생각에 옅은 미소를 지을 때였다.

두두두두.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몬스터들은 이미 다 정리되었다 하지 않았나?”

토니의 물음에 오랫동안 함께해 왔던 부관도 당황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영지 측에서도, 우리 쪽 척후로도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게…….”

그때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몬스터가 아니다! 이건!’

소리가 다가오면서 확실해졌다. 이 소리는 말발굽 소리였다.

“부대 집합! 진형을 짜라!”

일단 진형을 짜기 시작했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서부로 좀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아군 내 영역이다. 어느 영지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의 하나라도 마적들이라면!’

오백밖에 남지 않았다지만 모두가 와카디아의 정예병들이다.

물론 마적 따위들이 수백 단위로 모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설사 아군의 배가 많다 하더라도 도륙을 낼 자신은 있었다.

다가오는 기병들. 그 선두에서 펄럭이고 있는 커다란 깃발.

“어디 가문의 깃발이지?”

검은 바탕에 붉은 물감을 뿌린 듯한 기묘한 문양.

“북부에는 없는 문양입니다. 몇 명을 보내 어디 소속인지…….”

부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토니가 크게 소리쳤다.

“전군 전투준비!”

“부대장님!”

“우리가 있는 걸 보고도 속도를 멈추지 않는다. 적으로 간주하는 게 맞다!”

“여기에 누가 있어서!”

“새로운 놈이 생겼을지도 모르지.”

토니는 부관을 보며 불렀다.

“부관.”

“네, 부대장님.”

“이러지 않아야 할 곳에서 이러는 걸 보니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다. 혹시라도 활로가 열리면 너는 무조건 빠져나가야 한다.”

“그게 무슨…….”

“바란!”

부관은 화들짝 놀랐다. 부대 내에서는 이름 대신 늘 부관이라 칭해 왔던 토니다.

“자식이 없는 내게 넌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네 상관으로서, 그리고 오랫동안 널 곁에서 봐 온 마을 어른으로서 말한다. 열리면 빠져나간다.”

“부대장님!”

“저 문양을 기억해라. 그리고 반드시 이 사실을 영주님에게 그리고 소영주님에게 전해야 한다.”

부관 바란은 점점 불안해져 왔다. 지금 토니는 여기서 죽을 거라는 걸 기정사실화한 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지지 않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토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적은 준비하고 자신을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아군 지역에서 저런 병력을 끌어모았다는 건 필승의 자신도 있다는 뜻일 터.

무엇보다 적들의 숫자는 이쪽보다 많아 보였고, 전원 기병들이었다. 반면 이쪽의 병력은 오백. 그나마 기병은 백여 명 정도밖에 안 됐다.

“바란! 약속해라! 너는 무조건 이곳을 빠져나간다고!”

“부대장님!”

“바란!”

“아저씨! 저도 아버지처럼 아저씨를 따랐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습니다.”

“멍청한 놈!”

토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누군가는 전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는 저들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네 실력으로 그게 가능하겠느냐!”

토니는 멍한 표정의 바란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전군 들으라!”

그러고는 병력을 보며 소리쳤다.

“작전 따위는 없다. 오로지 이곳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만을 생각한다.”

“하아앗!”

와카디아의 병사들도 좋지 않은 상황을 인지했지만, 외치는 소리에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보병들은 미안하다! 기병들의 호위가 없을 것 같다. 어떻게든 산 쪽으로 도망쳐라!”

“하앗!”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알고 있다.

달라지는 건 없다고.

두렵다고 멍청하게 그냥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 악착같이 싸워서 하나라도 데리고 가면 나는 죽어도 내 옆의 전우는 산다.

호전적이라 그런 게 아니다. 평생을 몬스터들 곁에 살다 보면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기병들은 뚫리면 빠져나간다. 뒤돌아볼 필요 없다.”

“하앗!”

“전우의 복수를 할 기회를 버리는 짓은 하지 마라! 살아서 전하면 우리의 주인이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니!”

“하아아아앗!”

토니는 자신의 검을 움켜잡았다.

“전군 돌격!”

외침과 함께 토니는 자신이 제일 먼저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침상에서 볼품없이 죽는 것보다야!’

토니는 자신의 검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며 미소를 보였다.

‘그래도 이게 있어 제법 폼이 나지 않느냔 말이다!’

두두두두두.

그렇게 토니의 부대와 정체 모를 기병대가 충돌했다.

까아아아아앙!

강렬한 철음.

“으아아악!”

그런 철음에 뒤처질세라 들리는 비명.

“죽어랏!”

허연 수염과 하얀 포스를 날리는 토니의 노호(怒號)가 울려 퍼졌다.

휘두르고, 찌르고, 쳐 내고, 쪼갰다.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자신의 검과 그것에 갈라지는 적군.

지휘관으로서 통솔보다는 오로지 앞을 갈라 나가는 도살자를 선택한 노장.

중과부적에 병종의 불리함. 유일한 목적은 활로를 여는 것.

다시 한 번 베고, 찌르고, 밀어내고, 갈라냈다.

시야는 극도로 좁아지기 시작했고.

“허어어억! 허어억!”

세상 혼자만 사는 듯, 들리는 건 자신의 숨소리뿐.

“……!”

그리고 깨달았다.

앞을 막은 적이 없다는 것을!

“하아앗!”

깨닫는 순간 말 머리를 돌렸다.

도망쳐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

자신이 한 명령을 스스로는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이 끌고 있는 병력의 반은 어렸을 때부터 봐 온, 그중 몇몇은 갓난아기 때 자신이 품에 안아 보기까지 했던 이들이다.

게다가 지휘관이 좋은 게 뭔가?

병사들은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자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 아닌가!

“흐아아아앗!”

토니는 자신이 달려온 길을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명령을 어길 셈이냐! 돌아가랏!”

그 사지를 뚫고 나온 일부 기병들이 자신에게 따라붙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됐다.

뚫었다 하나, 적이 추격하기 시작하면 빠져나가지 못할 확률이 더 크다. 빠져나가는 이가 많을수록 오늘의 사태를 전할 수 있다.

“혼자 보내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같이 가는 겁니다, 토니 아저씨.”

죽음을 이미 확정해서일까?

속마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부대장보다 토니 아저씨라는 부르는 게 그들에게는 훨씬 편했다.

“이놈들아! 그걸 말이라고! 당장 안 가!”

하지만 이탈하는 이들은 없었고, 토니는 더 뭐라 말하기 전에 되돌아오는 적을 다시 상대해야 했다.

‘오냐!’

말 머리를 돌리게 하기에는 늦었고, 그러면 더 이상 수가 없었다.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

“으아아아아아아!”

토니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적진을 베어 나갔다.

까아아아앙!

그리고 처음으로 베이지 않는 적을 만났다.

사십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

무슨 말이 필요한가?

토니는 상대가 뭐라 하든 말든 그를 향해 두 번째 검을 날렸다.

“…….”

토니는 뭔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 파란 하늘이 보이니 쓰러졌는가 하는 의심을 할 뿐.

‘바다는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토니는 그렇게 의식을 잃었고.

“이 정도에 이리 애를 먹으면서 너희들이 헤네켄의 기사라 할 수 있겠느냐?”

중년인은 어느새 정리되고 있는 전장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시선을 향했다.

‘락의 기사들 중 가장 최약체라 들었는데…….’

순간 중년인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 * *

“물자를 버려! 몸이라도 빠져나가.”

렌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이 아비규환에서 그처럼 일반인의 목소리는 금세 함성과 비명에 묻혀 버렸다.

“이런 건 나중에 다시 구하면 된단 말이다!”

렌은 계속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이제는 쉬어 버리기까지 한 목에서 나는 소리는 숨소리보다 작게 들렸고.

‘너무 방심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감히 북부에서 락의 깃발과 에렌의 깃발을 보고도 달려드는 마적 따윈 존재할 리 없지 않은가?

호송 병력도 적은 게 아니다.

그 숫자가 무려 일천이다.

게다가 상단 소속의 짐꾼들은 정식으로 싸우는 법을 배우지 않지만, 거친 삶 속에서 일반인 한둘 정도는 너끈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날아오는 불덩이에 대해서는 전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법사! 대체 어떤 놈들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피하는 것밖에는 말이다.

불길은 점점 더 거세져 왔다.

* * *

“장부는 정말 쓰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지금같이 어수선한 분위기라면 요긴하게 쓰일 것 같습니다만.”

요르크의 말에 로라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아느니만 못한 것들이야. 알려 주지 마. 그냥 흐름만 파악하고 있는 걸로 충분해.”

요르크가 말하는 장부는 다른 게 아니었다.

에렌 흑사회의 수입은 한 영지에 버금갈 정도로 막대했고, 그 돈은 여러 귀족들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 나갔다.

옛날 디존슨의 자금줄을 막을 때 에렌의 흑사회를 먼저 장악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자금은 고아를 양육하는 데 쓰이고 초기 락의 개발 자금으로 쓰였지만, 상당 부분은 여전히 귀족들에게 상납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고스트가 에렌 흑사회를 장악했을 때도 그 상납금은 끊은 적이 없었다.

원래는 그렇게 함으로 디존슨과 멘토라스 지지 세력에 타격을 주려고 했는데, 후계 싸움이 단 한 번에 끝나 버리는 바람에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장부는 존재하고, 그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엮인 귀족들을 명분을 가지고 쳐 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사람을 앉힐 수 있었고, 좀 작업만 하면 그 가문의 재산까지 몰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요르크는 로라스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없자 혹시 몰라 확인을 하려 한 것이고. 실제로 로라스도 그것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인지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지금 로라스의 상태는 ‘한 놈 또는 한 세력만 걸려라!’라는 상태이다.

로라스는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리고 전대 공작이 우려했던 일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빙빙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천명한 상태였다.

장부는 위력은 있지만, 엄청나게 임팩트를 줄 수는 없다. 게다가 모든 귀족들이 엮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중에 곁다리로 쓸 수도 있을 테니.”

“좀 아깝습니다. 상납하던 걸 멈추기만 해도 상당한 자금을 모을 수 있어서 말입니다.”

“좀 어렵나?”

“요샌 다들 몸을 사리는 분위기들이라 수입이 많이 줄긴 했습니다. 꼭 필요한 지출이 모자랄 정도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반드시 일이 터질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란스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영주님.”

그리고 로라스에게 뭔가를 급히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요르크와 발란스가 동시에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들은 감히 몸을 펴지 못했다. 아니, 미동조차 보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로라스의 거센 살기가 덮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저녁에 성으로 오도록.”

로라스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지고 나서야, 두 사람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누가?’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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