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4)
반면, 혼란한 시기 나름 충성을 증명하고, 내가 마음 편히 힘을 쓸 수 있게 해 주려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로라스는 모인 인물들을 다시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군인 출신들이지?’
할아버지가 명군이긴 했다.
이런 정치 감각 떨어지는 인물들을 이 자리에까지 끌어올린 걸 보면 말이다.
그때 레빙스턴이 말했다.
“생각이 짧아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음을 깔끔하게 인정하며, 바로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지휘부 공백은 반드시 혼란이 일어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일단 지위를 내려놓겠다 말씀드렸지만, 지금 즉시는 아니었습니다.”
“…….”
“저희는 당분간 이선으로 물러나고, 젊은 지휘관들을 일선으로 끌어올려 뒤에서 보좌하는 형태를 취하려고 했습니다. 진정 충심으로 말입니다.”
“그마저도 때가 잘못되었습니다. 지금 에렌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레빙스턴은 조심스레 물었다.
“여유가 없으시단 말씀은…… 혹시 아직 저희에게 적이 남아 있습니까?”
표정을 보니 나름 안정화되었다 생각하고, 집단 퇴진을 제안한 것 같다.
“없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진정 에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감히 그런 놈들이 있다면 소신들이 쓸어버리겠습니다. 그 후에 후임 양성을 위해 물러나겠습니다.”
단호한 레빙스턴의 말에 모든 우려는 사라졌다. 그냥 충실한 군인들이 그 특성답게 과잉 충성하려 한 것뿐이다.
‘하긴, 알려 준 게 없으니.’
로라스는 이들이 우둔한 게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이 이들에게 신뢰를 보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소외감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들은 퇴진하라는 압박으로 받아들였을지도.’
좀 변덕스럽고, 대부분의 일을 지르고 보는 성격이었으나, 잘못된 것은 바로 인정하는 것도 그의 성격.
“내가 실수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측 정도는 여러분과 공유하고 의견을 받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소신들은 그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적이 누구입니까?”
레빙스턴의 물음에 로라스는 린델과 상의한 후 진행하는 일을 이들과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역적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작위에 대한 황제의 재가를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허울뿐이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길 그 작위 말입니다.”
로라스는 소리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앞으로 에렌이,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일일이 황제의 재가를 받다가는 대업을 망칠 수 있으니까요.”
“대업이라 하심은…….”
한 장년인의 물음에 로라스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심플하게 세계 평화로 해 두지요.”
“네?”
“할아버님께서 단 한 가지 찝찝하다 말씀하신 일입니다.”
“게이트…….”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거기에 총력을 기울이려 합니다. 하지만 아시겠지만, 그것도 기회라 하며 제 살 불리기 할 놈들이 천지.”
로라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대의를 세웠으니 빙빙 돌아가지 않고자 합니다. 따르면 함께 가는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쳐 낼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황제 폐하시겠군요.”
“큰 것부터 처리하면 작은 것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들이 필요합니다.”
레빙스턴은 바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소신들의 짧은 생각으로 대업을 망칠 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충성을 받는 이로서, 보여 주지 못한 제 실책이 가장 큽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고, 린델이 돌아오기 전 군 개편 논의부터 시작하지요.”
그렇게 예정에 없던 논의가 시작되었다.
* * *
“우아아아아아!”
병사들의 크게 함성을 지르며 전투의 기쁨을 표현했다.
“완벽하게 정리된 건가?”
“최소한 지금 이 순간 영내의 몬스터들은 모조리 제거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까미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까메유를 보며 말했다.
“영주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게 됐어.”
“주군 앞에서도 그렇지.”
까메유도 씩 웃으며 하는 대답에 까미유도 마주 웃었다.
와카디아의 대영주인 에듀의 대몬스터 토벌전에서 이 쌍둥이 형제들의 활약은 매우 컸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들의 지위는 높아져만 갔고, 어느새 그들은 수천의 병력을 지휘하는 장군급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너무 좋아하지는 말자.”
“당연하지. 이제 기반을 마련한 것뿐인데.”
하지만 이 형제의 눈은 이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제국의 수도 오베른의 몰락 귀족가 출신인 형제.
근래 와카디아가 제국 북부에서 명성을 떨치는 영지이긴 하나, 그 위치의 한계성은 분명했다.
당연히 형제의 목표는 중앙으로의 진출.
헛된 꿈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에렌에 줄까지 가지고 있었다. 남은 건 그 줄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실적.
그리고 이제 락의 쌍둥이 지휘관이라는 명성이 스스로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의 실적도 쌓았다.
“불러 주시겠지?”
“당연하지. 에렌에서 군 개편이 한창인데, 이번이 절호의 기회야.”
현재 에렌은 3군단 체제에서 5군단 체제로 분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각 군단의 병력 숫자는 어느 정도 줄어들겠으나, 지휘관의 자리는 더 많아지게 될 터.
“연대장은 무리려나?”
“욕심은 부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와카디아와 에렌의 규모상, 우리 정도면 일단 대대장과 연대장 중간 정도 되니.”
에렌의 군 체제는 간단하다.
네 개의 소대원 숫자인 백 명을 한 개의 중대로 묶고, 다섯 개의 중대를 한 개의 대대로 묶는다. 그리고 다시 다섯 개의 대대가 연대가 되고, 네 개의 연대가 사단이 된다.
마지막으로 세 개의 사단이 군단이 되는 시스템.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기도 나쁘진 않은데 말이야.”
까이뮤의 말에 까메유도 동의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견을 내놓았다.
“몬스터 상대로만 싸우다가는 올라갈 수 있는 데 한계가 있잖아. 더 올라가려면…….”
“알지. 하지만 여기 일도 보람은 있잖아. 우리가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있으니까.”
“얼마나 남았지?”
“영주님께서 에펠리온 교단에 약속했던 지역의 반은 처리한 것 같은데.”
“그럼 한 번 더 이런 시간을 보내면 된다는 소리인가?”
형제가 앞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키우면 뭘 하나?”
갑작스러운 한 사람의 등장에 형제는 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예를 올렸다.
“충성!”
턱에 난 흰 수염이 목젖까지 내려오는, 와카디아에서 제일가는 노장 토니였다.
“이리 다른 곳 갈 생각부터 하는데.”
토니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형제는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하하하. 됐어. 농담이야.”
토니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젓고는 말했다.
“어쨌든 자네들 소원이 이뤄진 것 같군.”
“네?”
“전출 명령이 내려왔다.”
까미유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에렌으로 말입니까?”
“그래. 영주님의 승인도 바로 떨어졌고.”
“부대장님도 함께 가십니까?”
까메유의 물음에 토니는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하게도 의견은 물어 주셨지만,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락의 부대 중에서 우리 부대가 가장 전공을 많이 세웠는데요.”
“자네들 덕분이지. 나야 뭐 한 게 있나.”
“부대장님이 중심을 잡아 주시니 저희가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거였습니다.”
“하하하하. 자네들은 정말 성공할 거야. 실력도 좋은데 입바른 말도 잘하니까.”
“진심입니다.”
토니는 손을 홰홰 저으며 말했다.
“정말 됐네. 내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내가 락 출신이었기 때문이야. 내가 아는 지역,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대장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었는데요.”
“하하하. 자네들은 그래도 귀족 출신 아닌가. 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내가 귀족이라는 사실이 말이지.”
토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음기를 싹 지우며 말했다.
“그러니 자네들이 잘해야 해. 앞으로도 그분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갈고닦아. 나 같은 놈도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혈통과 능력을 지닌 자네들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지 않나?”
자신의 말에 쌍둥이 형제의 얼굴이 흥분에 붉어지자, 토니는 그들의 등짝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럼 어서 움직이라고. 주군이 기다리고 계신다.”
“네!”
형제는 바로 달려 나갔고, 그 뒷모습을 보며 토니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너무나도 아쉬웠다.
자신의 나이가 마흔, 아니 쉰만 되었더라도 부름에 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포스는 이제 제법 올라왔는데.’
하지만 늙어 가고 있는, 아니 늙어 버린 몸뚱이는 어찌 되돌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력은 올라오지 않는 것이다.
간신히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뿐.
‘좀 빨리 태어나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정말 그랬다면! 어쩌면 지금 달려가고 있는 저 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마음 써 주시니 이 몸은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순간 토니는 로라스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고 지원해 주었던 주군이 말이다.
“허억허억!”
젊은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한다 해도 체력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면서도 계속 움직여야 하는 건,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꿈 꿔 왔던 그런 기회 아닌가.
“힘드셔도 하셔야 합니다, 토니 경.”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움직이길 종용하는 사람은 로라스.
“너무 늦게 입문했어요. 하지만 그 대신 그 누구보다 열정을 가지고 계셨지요. 그러니 토니 경이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슬쩍 자신의 등에 올리는 그의 손에, 토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한결 호흡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덕분에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고, 기어코 로라스가 전수한 움직임을 완수할 수 있었다.
“크허헉!”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에 뻗어 버렸다.
때려죽여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라 생각했다. 실제로 상체는 일으키려 해도 일어날 수 없지 않은가?
“애쓰지 말고 그대로 호흡을 조절하세요, 토니 경.”
그때 자신의 옆으로 오는 로라스.
“……!”
자신의 전신을 우르면서 움직이는 로라스의 손.
그때마다 아랫배에 화끈한 열기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소영주님!”
“어떠십니까? 시원한 느낌이 듭니까? 추궁과혈이라는 기술입니다.”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활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다.
“제가 어찌 이런 은혜를…….”
“토니 경은 제게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깟 추궁과혈 하루 종일 해도 아깝지 않지요.”
“이 늙은이가 뭐라고 그러십니까.”
“모르셨습니까? 토니 경은 기준이 되는 겁니다.”
“네? 기준요?”
“네. 기준 말입니다. 제 사람들에게, 노력을 하고 정진하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기준. 꿈이라고 해 둘까요?”
토니는 순간 로라스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토니 경은 그렇게 존재만 해 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제게 큰 도움이 되니까요.”
“저는 그저…….”
“아직은 제게 그럴 만한 권한이 없지만, 나중에는 귀족 작위까지 드릴 겁니다.”
“네? 제게 말입니까?”
“뭘 그리 놀라십니까?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러니 지금 전해 드린 거, 힘들어도 꾸준히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사실 테고, 그래야 사람들의 꿈이 더 커질 테니까요.”
토니는 마지막에 로라스가 빙그레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또 압니까? 제가 황제가 되어 토니 경을 대영주까지 만들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