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3)
나키아 진 베스타인.
이 장년의 기사는 원래는 요르데스라는 성을 가진 자였으나, 중년 때 전장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베스타인 공작에게 성을 하사받은 인물이었다.
그 말은 곧 능력도 출중하고, 인품 역시 모자라지 않는다는 증거.
실제로 그는 1군단 두 명의 부군단 중 한 명이기도 했으며, 황제가 벌인 전쟁의 후방을 떠받치고 있는 장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군사!”
나키아는 자신의 막사로 찾아온 린델을 보며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나키아 부군단장님.”
“자네가 여긴 어떻게……?”
순수하게 놀라는 그를 보며, 린델은 그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순수한 군인이시니까.’
린델은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전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야! 후방을 제외한 삼방이 적. 경험 있는 장수들도 적어서 고작 버티는 게 최선일 뿐이야.”
나키아는 그답지 않게 불만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혹시 에렌에서 원군이 온 건가?”
나키아는 정말 힘들었던 듯,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걱정할 것 없지! 한 면만! 한 면만 제대로 미뤄줘도 이 지지부진한 전쟁을 단숨에 우리 쪽으로 승기를 가져올 수 있어.”
“원군은 없습니다. 저 또한 그 일 때문에 온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린델은 그리 대답하며 그에게 서신 한 통을 내밀었다.
“영주님께서 보낸 서찰입니다.”
“주군께서? 토벌전에서 돌아오신 건가?”
“일단 보십시오.”
린델의 말에 나키아는 베스타인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는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게 대체…….”
“영주님께서는 일군단을 재편하기로 했습니다. 두 명의 부군단장의 지위는 없애고, 앞으로 군단의 군단장은 나키아 군단장님뿐입니다.”
승진을 했다는 사실은 나키아의 안중에 없었다.
“주군은! 주군께서는?”
“역대 공작님들께서 그리하셨듯 의지대로 떠나셨습니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나키아의 눈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슬픔이었지만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이런 일을 왜 내가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거지? 황제 쪽에서는 일부러 알리지 않을 수 있지만, 최소한 에렌에서는 알렸어야지!”
그는 린델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대공자인가?”
“군단장님이 안 계시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린델이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나키아는 분통을 터트렸다.
“무슨 욕심을 그리 냈는가! 가만히만 있어도 제 밥그릇이 될 터인데!”
“대공자는 그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린델은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영주님께서는 새로운 질서 개편을 위해 일군단을 필요로 합니다.”
“…….”
“황제 폐하께서 무슨 제안을 해 오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주님께서는 알고 싶어 하십니다.”
린델은 내용을 뭉그러트려 이야기했지만, 나키아가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두말할 필요 있는가? 주군께서 후계로 세운 분. 따를 뿐이다.”
“에렌은 정치적인 군단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소한 그게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들겠다고도 약속하셨습니다.”
“말로 하는 충성 맹세 따위는 나도 믿지 않아. 행동으로 보일 거라 말씀드려 주게.”
린델은 고개를 숙여 이 충직한 무장에게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에렌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려 할 뿐. 또 옛 사람이 된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린다 전해 주게.”
“네.”
린델은 그리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군단장님을 보필해야 함이 마땅하나, 명령 받은 게 있습니다. 아마 말보다 행동을 보여 주실 기회가 빨리 올 것 같습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는 그를 보며, 린델은 다시 한 번 예를 표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인데.’
예측 불허인 상대가 하나 남았다.
그 상대는 오베른 제국의 황제.
‘일을 쉽게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어렵게 갈 거라는 예감이 더 강했다.
‘어중간하게 똑똑해서는…….’
영리하거나, 아니면 아예 미련하다면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 * *
“세리아 영지를 오대에 걸쳐 지배하고 있는 대영주이고, 그간 대세를 거르지 않은 가문이었다는 거지.”
책상 위 산더미 같은 서류들.
로라스는 벌서 닷새 가까이 서류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주군, 그걸 꼭 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옆에 있던 번천의 말에 로라스는 외우는 걸 멈추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페컴 백작도 있고, 보좌하는 귀족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페컴 백작은 변방의 남작들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왜?”
“그걸 물어보는 걸 보니 넌 정말 지휘관 타입은 아니구나.”
“그거야 저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가 그리 이상한데?”
“얼마 전 오리앙 백작이 왔을 때 말입니다.”
“그가 왜?”
“그를 아시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쪽 가문의 역사가 워낙 복잡하여, 주군께서도 꽤 오랜 시간을 들여보셨고 말입니다.”
“그랬지.”
“근데 그가 왔을 때는 페컴 백작이 그의 이름을 알려 주고, 주군은 모른 체하셨고 말입니다.”
“하하하. 그게 이상했던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힘들여 귀족들을 기억하시고는, 실제로 그들을 봤을 때는 페컴 백작에게 도움을 받으셨으니 말입니다.”
“간단한 문제다. 그는 공을 세우지 않았다.”
“네?”
로라스는 눈을 끔뻑이는 번천을 보며 다시 한 번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너는 정말 운 하나는 타고났다니까. 그러니 하급 귀족들이나 변방의 소외받는 귀족들의 생리를 모르는 게지.”
“저야…… 그냥 주군만…….”
“그래서 하는 말이다. 귀족들이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서 수많은 파티를 주관하고 참여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그런 곳에서라도 자신의 이름을, 가문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목숨을 건다.
“…….”
“그런 그들에겐, 내가 그들의 이름을 직접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아니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산이 된다. 아! 이 형태 없는 이치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로라스는 잠시 궁리하다 말했다.
“너 용병단이었잖아.”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대 용병단에 갓 입단한 신입 용병이라 치자. 그런데 용병단장이 너를 콕 집어 이름을 부르면 어찌 생각하겠냐?”
“으음……. 기분은 좋을 것 같습니다. 날 기억해 주고 있다는 건……. 아!”
번천이 그제야 뭔가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를 내자, 로라스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그래. 거대 용병단이라 하나 국가에 비하면 작은 조직. 그런 조직에서도 그와 같은 관계란 게 의미를 갖는 법인데, 하물며 에렌에서야.”
“주군에게 기억되기 위해…… 이름을 불리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겠군요. 자신을 위해. 가문을 위해.”
“그래. 하지만 오리앙은 그만한 공을 세우지 않았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내가 그의 가문을 기억해 주고, 이름을 불러 줄 수는 있다. 그래서 그의 충성심을 높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계속 대해 주면.”
“가벼워지는군요. 그 가치가 말입니다.”
“그래.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는 이유는, 또한 써먹지 못할지도 모르면서도 계속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더더욱 큰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함이기도 하지. 언제 어떻게 써먹을지는 나도 모르는 거거든.”
“그런 뜻이 있었군요. 솔직히 저는 귀족들이 워낙 할 짓들이 없어 파티도 자주 하고, 괜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슬쩍 눈치를 살피는 번천을 보며 로라스는 다시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너도 이제 귀족이다, 번천. 그런데 정치적 감각이 그리 없어서야 넌 지금의 자리가 한계일 것 같다. 내 옆에 딱 붙어 있어야겠다.”
“주군을 모시는 게 좋지만, 권력에 큰 욕심도 없습니다. 크게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붙어 있어야지, 이 사람아. 모든 귀족들이 권력을 탐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으로 정치 활동을 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대체 왜 죽는지도 모를 경우도 생기는 거니까.”
“그건 왜 그런 겁니까?”
로라스는 손을 훼훼 저으며 말했다.
“됐다. 하나하나 설명하다가는 끝도 없다. 이것만 고민하면 돼. 지위가 낮을수록 내 의도와는 다른 일에 끌려가는 일이 많다는 것. 그러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하고, 그리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
멍한 번천을 보며 로라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옆에 붙어 있어. 네게 맡긴 에렌 근위대 정도를 간수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도 머리에 쥐가 나려 한다. 얼른 밑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데.”
그러고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모였을 테니 가자.”
“어디를 말입니까?”
“대회의장. 다독이러 가야 해.”
“네?”
“고집 센 사람들이 있어. 모두 오늘 찾아오겠다고 하니 봐야지.”
로라스는 그렇게 번천과 함께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입구에서 페컴이 기다리고 있었고, 로라스는 물었다.
“다 왔습니까?”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어가지요.”
그렇게 로라스가 안으로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장년의 사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라스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일제히 착석하는 사내들.
보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졌다.
당연하다.
이들은 전 세대에서 에렌이 최강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군과 경제, 민의 치안까지 수십 년 동안 할아버지를 보좌하며 능력을 만개시킨 자들 아닌가?
로라스는 그들 중에서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담담하게 보는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랜만입니다, 레빙스턴 백작.”
“이제야 인사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레빙스턴과 로라스는 갑작스럽게 영주와 신하의 관계로 보는 사이는 아니었다.
로라스가 참여했던 가문의 의식 때 총괄책임을 맡았던 이가 레빙스턴이었으니까.
“매우 바빴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여유를 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세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군부의 책임자 중 하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군부의 책임자 중 하나.
그 표현은 오히려 모자란 데가 있었다.
전대 공작이 그랑데일과 함께 양대 기둥으로 세웠던 자가 레빙스턴이었다.
그가 각 군단의 군단장을 한 번 이상씩 했던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디존슨이 일군단을 남부로 보낸 후, 할아버지가 급히 그 공백을 메우게 하기 위해 레빙스턴을 보낸 것도 그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에야 수도로 올라왔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든든해지는 듯합니다. 계속 그리 남아 주셔야지요.”
“…….”
“모든 지위를 내려놓는다는 건 나를 에렌의 영주로 임명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레빙스턴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미 영주님에게는 충성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럼 됐네요. 이군단을 계속 맡아 주세요.”
“소신이 노쇠하여 중임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로라스는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모인 분들 모두 노쇠하여 현재 갖고 있는 임무를 맡을 수 없다는 겁니까?”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로라스는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들인지는 정말 모르겠군.”
“…….”
“새 술은 새 부대에, 먼저 나서서 제 부담을 줄여 주겠다, 뭐 이런 바보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 믿지만.”
소리 없는 웅성거림이 이런 걸까?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열지는 못하고 서로 눈빛으로 정말 많은 의미들이 오가고 있었다.
로라스는 다시 레빙스턴을 보며 말했다.
“정말 아니겠지요, 레빙스턴 백작?”
“그게…….”
“전 에렌 출신이 아닙니다. 후계자로 오랫동안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마저도 락에 있었지요.”
“…….”
“그런 와중에 이런 집단행동은 내 지배력을 의심하는 것이란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입니다. 뭔가 다른 깊은 속뜻이 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만.”
그런데 말이다.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걸 보니,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폼이다.
‘이 양반들아! 그럼 정말 맙소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