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1)
“동기화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녹아든다고 해야 할까요? 자아가 흔들리니…….”
아델리나가 정리하지 못한 현상을 로라스는 잘 알았다. 그래서 대신 정리해 주었다.
“바뀌어 버리지. 나는 분명 저기의 나인데, 여기의 내가 나라는 게 우선적으로 인식되지. 아닐 수도 있을 거야. 어떠한 계기가 필요한 일이니.”
“저는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곽아로 살렵니다.”
“결국엔 나라는 것으로 귀결될 터인데.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환생(還生)이 아닌 환생(幻生)이고, 전생(前生)이 아닌 전생(轉生) 아니더냐. 현재의 내가 행복하면 그뿐.”
“내 그래서입니다. 여하간 전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사형제들은 모르겠습니다. 저와 같을지, 아니면 다를지 말입니다.”
“그럼 다른 놈들도 다 넘어왔다는 것이냐?”
“확실치는 않습니다. 막내는 확실히 넘어왔을 겁니다.”
“으음…….”
“제일 똑똑했으니까요. 그리고 기억을 잃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찾으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이트에서 그 통로를 다시 보았다. 시간 왜곡도 있었다.”
로라스는 그 사실을 알려 주며 생각했다.
‘어쩌면 노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이일 수도 있을 테고.’
게이트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으니, 어찌 되었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하리라.
“그래서 이제는 어쩔 생각이냐?”
“사부를 보좌해야겠지요. 그때처럼 말입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럴 이유도 없고. 예전처럼 살 생각도 없다.”
로라스는 확실히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예전처럼이라 하니, 아델리나가 대륙통일을 위해 움직일 수도 있다 여긴 것이다.
실제로 이미 자신을 신격화하는 작업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로라스는 목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이렇게. 모두가 무탈하게.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좋은 영주. 그리 살 것이다.”
“그리 알겠습니다.”
아델리나의 대답에 로라스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하간…… 이리돼서 기분이 무척 좋다. 에렌에서도 에펠리온을 밀 테니, 여태 해 왔던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다독이며 그리했으면 좋겠다.”
“네.”
그렇게 아델리나와 그간의 이야기 등을 나눈 후 로라스가 말했다.
“돌아가 보마. 일 없어도 찾아오고.”
“네.”
로라스가 먼저 돌아갔고, 아델리나는 그가 있었던 자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무탈하게. 좋은 사람에 좋은 영주라.’
잊으셨을 것이다.
천왕성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행복하게. 그리 살고자 하셨다.
‘세상이 가만두지 않고, 결국 또 참지 못하고 나서실 것을. 날 왜 거두셨는지는 기억 못하시는 거지.’
유역후. 아니, 로라스는…… 사부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기주의자, 개인주의자처럼 산다고 말해도, 행동은 늘 이타적이었다. 또 즉흥적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시작하셔서, 에렌의 대영주, 제국에 단 셋밖에 없는 공작이 되셨겠습니까?’
물론 자신은 그런 사부가 좋았다. 그래서 더더욱 선을 철저하게 지킬 생각이었다.
여인이 아닌 제자도 상관없다. 일단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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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으으음!”
기분 좋아 콧소리까지 흥얼거리며 성으로 복귀한 로라스를 페컴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인데 이리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혹시 골드맨스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골드맨스?”
처음 듣지만 뭘 하는 이들인지는 예측이 가능할 것 같았다.
‘참으로 직설적인 이름 아닌가?’
“돈을 다루는 자들입니다. 자금력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거물들만 상대하는 자들입니다.”
페컴이 그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로라스는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그들이 왜 찾아왔을까요? 여기서 그들이 얻을 게 없는데. 혹시 우리 재정이 나쁩니까?”
“제가 성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나쁜 적이 없었습니다. 매해 수익이 늘어나고 있고,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몇 년간 재해가 발생해 세금을 걷지 못한다 해도 끄떡없습니다.”
자신 있는 페컴의 말에 로라스는 더 흥미가 생겼다.
“내일 보겠다고 하세요.”
“시간은 어찌 잡을까요?”
“식사 시간까지 할애해 줄 필요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당분간 그 시간에는 영주들과 만남이 잡혀 있습니다.”
“그럼 점심 식사 후로 잡지요.”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방 대신 연무장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바닥. 웬만한 무기는 전부 갖춰진 할아버지의 전용 연무장이었던 곳.
핏줄을 떠나 무인으로서, 사내로서 존경했던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
‘이제 또 홀로 남은 거지.’
생각나 버렸다.
할아버지가 말한 절대자의 고독. 그리고 유역후가 느꼈던 그 고독이 말이다.
‘키우면 될 일.’
괜히 혼자 청승 떠는 것보다야 마음가짐을 바꾸는 게 훨씬 좋을 터.
락에서도 많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사람들을 키웠다.
그런 락에 비하면 에렌엔 더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겠는가?
“역대 가주들과 경쟁하셨다지요?”
재력이든 무력이든, 아니면 어떠한 학문이든. 고독을 달래기 위해 그리 경쟁했었다 했다.
“다음 대 가주부터는 경쟁이 아닌, 얼마나 저를 쫓아왔느냐로 그 승부가 판단될 것입니다.”
역대 가주들이 천 년을 버틸 가문의 기반을 닦았다면, 내 이후로는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오롯이 남을 가문을 만들어 버릴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뜻은 세웠다.
가장 큰 줄기는 역시 할아버지가 우려했던 그 괴이한 마물이다.
사실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세상을 멸할 마왕의 존재 따위는 웃기지도 않을 일. 하지만 동화책 같은 이야기를 꺼낸 이가 절대자였던 할아버지.
준비해야 했다.
거기서 작은 줄기들이 생겨난다.
어려울 거 없다.
무력을 모으고, 그것을 운용할 사람을 모으고, 거기에 소요할 재력을 모을 것이다.
‘가진 걸 쓰지 않는 건 비효율적이긴 하나.’
가문 최후의 보루, 최후의 안식처라 명명된 창고에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나의 뜻을 세웠으니 나의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생각이다. 그리고 가문의 역사에 세세하게 기록을 남길 것이다.
“후우우우우.”
머릿속이 너무나도 맑아지기 시작했다.
* * *
말쑥한 얼굴에 깨끗한 손, 거기에 사제라 착각할 만한 옷차림.
정말 돈을 다루는 사람들이 아닌, 무슨 종교 단체에서 온 걸로 착각이 되었다.
“네 개 랜드의 주인이시며 세계 골드의 지배자이신 퍼스트 맨 오랑트와 님을 대신하여, 에렌의 영주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로라스 백작님.”
게다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말들도 참 많았다.
골드맨스라 찾아온 이들의 숫자는 셋.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기억해 둘 소리는 몇 개 없었다. 대충 퍼스트 맨이라 불린 칭호는 골드맨스의 대장이라는 것 같고, 그 이름 정도만 기억하면 될 터.
“그래서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것이…….”
세 명이 서로의 눈을 보더니, 그중 콧수염을 멋지게 단 이가 입을 열었다.
“에렌과 저희 골드맨스의 채무 관계에 대해 논의드리고자 왔습니다.”
“채무라…….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도움이 돼 주고 싶은데, 이쪽도 여유가 충분하여 그쪽 자금을 쓸 이유가 없다. 투자도 받을 필요가 없고 말이다.”
콧수염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새로운 투자를 할 생각은 저희도 없습니다. 논의하고자 하는 건, 기존 채무에 관한 것입니다.”
“기존 채무? 우리와 그대들과 채무가 있었던가? 혹시 에렌이 혼란하다 하여 야료를 부릴 생각이라면 접어라. 전대 가주께서 오랜 휴식에 들어가셨지만, 그런 게 있었다면 분명 내게 전해 주셨을 터.”
“저희도 전대 가주이셨던 공작님과 거래를 꿈꾸어 왔으나, 그런 영광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채무?”
콧수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디존슨 백작과의 채무입니다.”
뭔 채무인가 싶었는데, 디존슨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걸 왜 이곳에서 이야기하는가?”
“디존슨 백작 개인적인 빚이 아니었으니까요.”
콧수염의 눈이 빛난다.
“저희 골드맨스에 자금을 융통했을 때는 에렌의 임시 영주이셨으니까요.”
“그래서 나보고 갚으라?”
“지금 영주는 백작님이시니까요. 게다가 개인에게 청구하려고 해도, 디존슨 백작과 그 식솔들 모두 락으로 유배를 갔으니…….”
콧수염이 살짝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역시 현재 에렌의 영주이신 백작님이 책임져 주셔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돈을 갚으라는 저 논리는 제법 탄탄해 보인다. 그리고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물어는 봐야 할 듯싶다.
“그래서 디존슨 백작의 부채가 얼마나 되는가?”
“제국의 골드코인으로 삼십만 개입니다.”
‘삼십만 개라…….’
가끔 돈을 숫자로만 보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럴 땐 현물로 바꿔 보면 체감이 확 온다.
골드코인 두세 개면 소가 한 마리. 삼십만 개라면 소가 만 마리 이상.
체감이 확 오지 않나? 그리고 당연히 이런 개소리를 들어 줄 필요가 없다는 결론도 서고 말이다.
그때 콧수염이 말했다.
“원금만 그렇습니다. 디존슨 백작님은 이자로 삼 할을 주시기로 하셨지요.”
“그렇군. 돈 많이 벌겠어.”
“위험부담을 생각하면 그리 크지 않은 돈입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런데?”
“네?”
“그래서 왜 이런 문제에 내 귀한 시간을 뺏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희는 에렌의 대리 영주였던 디존슨…….”
“그래. 디존슨 백작에게 빌려 줬다고 들었어. 그런데 뭐 어쩌자는 거지?”
“당연히 그 돈은 현 영주이신 백작님이…….”
“하하하하하!”
움찔하는 콧수염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긴장한 표정의 페컴과 렌이 있었다.
“페컴 백작 그리고 렌 남작.”
“네, 영주님.”
“두 사람은 내 돈을 책임지는 사람들. 내가 이자들에게 돈을 줘야 하는가?”
두 사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콧수염은 제법 탄탄한 논리를 세웠지만, 방금 대화에서 그걸 스스로 무너뜨렸다.
‘이 큰살림을 맡은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면 곤란하지.’
그렇게 약간의 우려가 있었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페컴은 그리 점잖게 말했고.
“날강도가 따로 없군요. 평생 상인으로 살면서 수 많은 협상을 해왔지만, 이런 흰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렌은 그보다 더 격하게 나왔다.
우리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던 걸까?
콧수염은 적지 않게 당황하며 말했다.
“빌린 돈을 갚지 않겠다는 억지를 부리시면 곤란합니다.”
“억지? 어어억지?”
렌이 과하게 말을 끌고는 나를 봤다.
“왜 날 보는가? 담당은 자네인데.”
렌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콧수염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빌렸다고 하는데, 당신들은 빌려준 적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이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위험부담을 생각하면 큰 이자는 아니라고.”
“…….”
“채무자가 에렌의 영주였다면 위험부담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콧수염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지만, 곁에 있던 동료 하나가 사색이 된다. 저놈은 눈치챈 것 같다.
콧수염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말이다.
이번엔 페컴이 말을 받았다.
“위험부담이라…… 채무가 아닌 거래지, 그건. 디존슨 백작이 영주가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거래.”
“그건!”
콧수염도 뒤늦게 깨달았는지 급히 외쳤지만, 이미 공은 이쪽으로 완전히 넘어왔다.
“그리고 그 거래는 실패했지요. 예상했던 대로 큰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는 거래였고, 그 확률대로 실패했고.”
“나 같으면 절대 그런 거래에 응하지 않았겠지만, 골드맨스는 그 거래를 받아들인 것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저라면 그 거래의 위험도를 생각하면 투자금의 몇 배 이상을 요구했을 텐데.”
“골드맨스는 계산이 철저하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모험을 좋아하는군.”
렌과 페컴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에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