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50)
솔직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 늙어서 남은 건 혈육밖에 없었다.
저쪽 세상에서 자신들의 제자가 없었다면, 이리 전생은커녕 광인이 되어 어디선가 칼 맞고 뒈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게 뜻이라니!’
그렇게 걸으니 어느새 할아버지의 집무실, 아니, 이제 나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에렌과 북부 영지의 모든 큰 틀이 결정되는 곳이라 그런지, 분위기만으로도 압도하는 느낌이 있다.
거대한 창을 뒤로하고 놓여 있는 커다란 책상. 그것을 중심으로 삼면이 입구를 제외한 책들과 보고서로 빽빽하다.
‘정말 이기적이지 못하셨네.’
책상 위로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 뭉치들.
‘그 포스를 가지시고도 정력이 다하신 이유가 이것들 때문이겠지.’
좀 더 권력을 나누셔야 했다. 완벽한 독립성을 주고, 보고 따윈 받지 말고 알아서 그냥 둬야 했다.
‘능력 좋은 수하들은 그래서 많을수록 좋은 법인 건데.’
“공작님, 모두 모였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페컴의 목소리.
큰형처럼 알뜰하게 살펴 준 사람. 존대가 익숙지 않지만 또 불편할 것도 없을 터.
“들어오세요.”
“무슨 지시하실 말씀이라도.”
“앉아서 차나 한잔 드세요.”
“공작님, 모두 기다리고…….”
페컴은 입을 열다 급히 다물었다. 그러고는 태연스레 앉아 대기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만, 페컴의 역할은 내성 관리에 가깝다. 이럴 때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터.
“유치한 방법 같습니까?”
“너무 머리를 쓰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때론 이런 방법이 더 확고하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은?”
“첫 회의입니다. 걸러 내시지요.”
결심은 했지만, 은근 걱정이 된다. 이런 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지만 인식은 시켜야 한다. 네가 공작이 된 이상 그들의 격도 올라갔다. 예전처럼 마냥 편하게 할 수 없다.
와카디아의 소영주라면 그래도 됐지만, 에렌, 북부의 지배자가 된 이상은 말이다.
할아버지가 구상해 두었던 기획들을 살폈다.
일에 매진하신 만큼 이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일들을 현실화시키려고 고민하신 흔적들.
그것들을 얼마나 봤을까?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던 햇살이 어느새 달빛으로 변해 있었다.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페컴에게 말했다.
“기척이라도 좀 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첫 번째 대상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함께 대회의장으로 이동했다.
“공작 각하께서 오십니다.”
문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시선들.
아니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지.
하지만 의외로 와카디아에서부터 나를 따르던 녀석들은 그중에 없었다.
옆에 있던 페컴의 시선이 이리저리 쏠린다. 파악하는 중이리라. 모인 이들의 표정을, 그리고 힘들어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시작하지.”
회의를 시작했다.
* * *
“으어! 힘들다.”
“허리가 다 아프다.”
테라와 번천의 말에 오리시암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흐흐흐. 난 좋기만 하더만. 내가 남작이라니! 내가 에렌의 대회의에 참석하다니!”
오리시암은 묵묵히 로라스의 약속만을 믿고, 열심히 뛰어다녔던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서 있는 게 이리 중노동일 줄 몰랐는데. 그런데 왜 그러신 거지? 약속에 늦는 법이 없으셨는데.”
번천은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에르자일을 보며 물었다.
“어찌 아신 겁니까?”
“기다리게 만들 거라는 거요?”
“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권위를 지닌 자가 그걸 보이는 법은 의외로 많지 않아요. 사람에 따라 허례라 할 수도 있고, 유치하다 할 수 있겠지만, 오랜 시간 애용해 오던 방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주군의 권위를…….”
에르자일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오리시암이 옆에서 핀잔주듯 말했다.
“번천 경, 그 우둔함과 우직함의 경계에 있는 듯한 게 번천경의 매력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눈치가 없습니다.”
번천이 오리시암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계속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군기 잡는 거 아닙니까? 군대에서 신병들에게 나이프질도 허락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
“용병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까? 신입 용병한테 다 허용해 줍니까?”
“아!”
그제야 번천도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를 내자, 에르자일이 옆에서 말했다.
“로라스가 여러분들에게까지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이들이 있을 때,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이 곤란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미리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좋았을걸. 혹시나 말씀드린 건데 저도 다리가 다 아프네요.”
위로하듯 하는 말에 번천은 머쓱해했고, 옆에서 오리시암은 웃으며 말했다.
“백날, 천날 서 있어도 전 좋습니다.”
그의 입꼬리는 대회의장에서 그리 기다렸을 때부터 도저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북부 변방 산채의 산적 두목 따위에서, 이제는 남작이라는 작위에 산악군이라는 독립부대의 지휘관으로까지 임명되었다.
테라가 옆에서 말했다.
“초기에 우리의 역할이 제일 중요합니다. 특히 주변으로 접근해 올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언행들 조심하시고, 쉽게 뭔가를 약속하지 마십시오.”
에르자일을 제외하면 모두 정치엔 문외한들. 그나마 테라는 에렌에 오래 있었기에 권력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알았다.
“난 사람 만날 시간도 없다. 주군을 수행해야 해서.”
번천이 말했고.
“흐흐흐. 그런 건 내가 잘하지. 걱정하지 마시게. 내 분수는 잘 아니까.”
오리시암이 받아치자 테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토니 경이야 생각이 깊으신 분이고.”
고스트, 제레미와 쥬시스 쪽은 어둠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엮일 일이 적을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산전수전 겪은 사람들이니만큼, 로라스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테라는 다시 말했다.
“영주님께서 내일 아침에 락으로 돌아가십니다. 모두 잊지 마십시오.”
“아니 왜? 주군의 옆에 계셔서 힘을 실어 주셔야 할 텐데.”
옆에서 번천의 의아한 물음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왜?”
번천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다시 물었지만 답하는 이는 없었다.
* * *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으셨습니다.”
“네가 잊었구나. 내가 에렌 출신이라는 걸.”
로라스는 입을 다물었고, 에듀는 계속 말했다.
“내가 에렌에 있는 게 좋지 않은 건 너도 알 터. 오히려 와카디아로 돌아가 네 기반 세력으로 남는 것이 좋다.”
“다른 것들은 그리 조치했지만, 아버님과 어머님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네가 에렌의 영주다. 아버님 같은 걸 바라지는 않지만, 정에 끌려 다니는 건 나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
“네 어머니야 자유로울 수 있지만 난 아니지. 네 마음은 충분히 잘 알고 있지만, 다른 말 하지 말아라.”
“네.”
에듀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난 에렌이 번잡해 싫다. 여기보단 와카디아의 대영주가 더 재미있고. 게다가 할 일도 생겼으니 거기에 집중해 볼 생각이다. 그 일은 네게 지원, 아니 허락을 받고 싶구나.”
와카디아의 병력이, 영내를 벗어나 북부 전역을 상대로 몬스터 토벌을 나서겠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졌다.
그건 분명 좋은 일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각 영지의 영주들에게는 찝찝할 수밖에 없는 일.
에듀는 그것에 대해 협조를 구한 것이다.
“문제없을 겁니다. 그나저나 갑작스럽게 그리 결정을 내리신 이유, 교황 때문입니까?”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덕분에 너에 대한 민심이 좋아지지 않았느냐.”
“에렌이 안정화되면 토벌전은 에렌에서 주도해도 됩니다. 그 때문이라면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냐? 현재 와카디아를 비롯한 몇 개의 지방을 빼고는 피해가 너무 막심해.”
“그럼 제가 준비될 때까지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에듀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혹시 어머님이 오시고 싶어 하시면 마탑을 통해서 연락해 주십시오. 테라를 보내겠습니다.”
“그러자꾸나.”
에듀는 그러고는 로라스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
“기왕 결심했다면 잘해야 한다. 네 뒤에는 이 아비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신체 보중하십시오. 이 아들은 그것만 믿고 있겠습니다.”
에듀는 두 팔에 한 번 힘을 주고는 풀며 말했다.
“가마.”
에듀가 말에 오르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뒤따르던 시그탑이 말을 멈추고는 로라스를 향해 말했다.
“공작님, 주군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늘 그래 왔듯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시그탑 경.”
“새로 본 경지가 있어 공작님께 확인받고 싶은데. 다음에 꼭 시간을 내주십시오.”
“어려울 것 없지요. 토벌이 끝나면 에렌부터 들르세요.”
“네, 공작님.”
로라스는 그렇게 에듀 일행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언제든 마음먹으면 볼 수 있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의 개념이 락이 아닌 에렌으로 변하니 기분이 묘한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내가 뭐가 우선인지 잊지만 않는다면, 크게 잘못될 것도 없다.’
번잡한 생각을 버리고 싶으나, 다음 일은 번잡을 넘어 심란까지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녀석들.’
분명 그러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아니다.
‘굳이 선을 그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렇게 로라스가 향한 곳은 에펠리온 신전이었다.
“오셨습니까?”
어찌 알았는지 아델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로라스는 그녀를 따라 신전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예배홀까지 가면서도 로라스의 무거운 표정이 풀리지 않자, 아델리나가 말했다.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부님.”
“너에게는 공작이길 바란다.”
로라스의 짧은 대답에 아델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사부님이세요. 늘 확실하셨지요. 이미 정리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곽아!”
순간 부르르 떠는 아델리나.
“네가 날 알듯이, 나도 널 안다.”
“…….”
“널 누구보다 귀애했다.”
“…….”
“계속 그러고 싶구나.”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표정이 굳어 있는 아델리나. 하지만 이내 옅은 미소와 함께 로라스에게 대답했다.
“정이 너무 깊어서 그랬습니다. 앞으로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사부.”
“네가 너란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진즉 알아봤어야 했는데, 네가 여기에 있을지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정한 사부를 용서하거라.”
“저도 한참 후에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저는 사부가 계실 거라고 확신해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물어보고 싶은 게 참으로 많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부.”
로라스의 입가에도 드디어 미소가 어렸다. 천 근처럼 누르던, 그래서 억눌러 왔던 반가움을 폭발시킬 수 있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사부의 흔적은 금방 찾았습니다. 왕삼이란 자를 기억하십니까?”
“왕삼?”
“밥값으로 제황계지를 주셨더군요.”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처음으로 동정을 받았지.”
“그 후부터 어렵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승님보다 늦었지만요.”
아델리나는 계속 말했다.
처음에는 등선한 줄 알았다고 했다. 죽었으면 시체라도 있어야 했는데 사자(死者)의 흔적은 조금도 없었으니 말이다.
“사부가 남기신 것들을 보고, 사제가 단서를 찾았습니다.”
제자들 중 가장 어렸지만, 재능이 제일 뛰어나 먼저 팔보에 오른 이가 악군.
“딱 삼 년 걸렸습니다. 개천지보의 오의를 깨닫고, 사부가 등선이 아니라 어쩌면 기이한 곳으로 갔을지 모른다고 의문을 제기한 건 말입니다.”
그렇게 악군은 제 사형, 사저에게 오의를 전수했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내 예측대로 진행되었다.
그 기이한 용오름. 그것이 그쪽과 이쪽이 연결된 통로라는 걸 알고 넘어왔다.
로라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모르고 넘어왔고, 그의 제자들은 알고 넘어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자아의 문제가 생기더군요. 내가 왜 나인지, 내가 내가 맞는지 끝없는 의문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