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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49화 (249/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49)

“주군.”

“왜?”

“그를 믿으십니까? 여러 번 뒤통수를 친 자입니다.”

번천의 말에 로라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안 믿지.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소인이다. 디존슨도, 멘토라스도 제가 가진 무게를 알고, 걸맞은 행동만 했어도 내가 앉은 자리는 그 둘 중 하나가 됐을 테니까.”

“그런데 왜?”

“그런 약속을 했냐고?”

“네…… 정말 그들이 진심으로 협조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좋지 않나? 할아버지의 핏줄이다. 또한 공이 있으면 응당 상을 내려야 하는 법이다. 그게 올바른 인사지.”

로라스는 그리 대답하다 이내 쓴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럴 것 같지는 않다만.”

“잘 감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고스트와 제레미 등이 알아서 할 거야. 오늘 볼일은 다 봤으니 가서 쉬어. 난 할아버님을 만나야 하니.”

로라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성으로 향했다.

“왜 벌써 나오셨습니까?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요.”

“선대 공작들 얼굴을 좀 봤다.”

오로지 베스타인 공작만이 출입 가능한 내실. 그 안은 선대 베스타인 공작들의 초상화가 가득했다.

공작이 손을 휘저으니 초상화 틀들에 가라앉은 먼지들이 쓸려 갔다.

“바쁘겠지만 잊지는 마라. 모두 역사를 하나씩은 쓰신 분들. 그분들의 얼굴에 먼지가 끼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매일매일 온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지만,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나도 이렇게만 존재하려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쓸쓸한 목소리에 로라스는 속에서 울컥함을 느꼈다.

노년이란…… 늘 그렇다.

스스로의 영정을 준비하고, 자신이 입을 수의, 관까지 준비하는 사람마저도 있었다.

정말 때가 왔음을, 그래서 공작이 그리 서둘렀음을 아는 로라스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초상화는 엄청나게 크게 그릴 겁니다. 늘 햇볕이 드는 곳에 모실 것이고, 성 곳곳에 걸어 둘 겁니다. 그 누구도 할아버님을 잊지 않게, 잊지 못하게 할 겁니다.”

“흐흐흐, 나쁘지 않구나.”

로라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공작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로라스를 부르며 말했다.

“가자꾸나.”

“어디를…….”

순간 중앙 벽이 뒤로 밀려 열리자, 로라스는 다가가며 말했다.

“성에 이런 비밀 공간도 있었군요.”

특별한 장치도 없는 밋밋한 벽.

“어떻게 여신 겁니까?”

“그리 찾아도 특수한 장치는 없다.”

“그럼?”

“포스로 민 것뿐이다. 포스 마스터가 아니면 어림도 없지. 그리고 그런 포스 마스터가 도둑일 확률도 적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보안이군요.”

“제일 걱정한 부분이었다. 네 아비 빼고는 모두 비실비실한 놈들이었으니 이걸 전해 줄 수나 있을까 했지.”

공작은 그리 말하며 먼저 들어갔고, 로라스가 뒤따랐다.

마정석으로 빛을 밝히고, 돌로 사방이 정돈된 길.

먼지가 좀 쌓이긴 했지만, 공작이나 로라스가 지나감에도 먼지 한 톨 피어오르지 않았다.

‘외부로 나가는 길이군.’

밀폐된 공간이지만 한참을 걷고 있었다. 내성이 크다 하나, 이미 크게 몇 바퀴 돌고도 남음이 있었다.

‘응?’

로라스는 눈앞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길을 보며 놀랬다.

실내 공간에서 안개가 웬 말인가?

그때 베스타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이 포스로서 세계를 평정했지만, 삼대 가주께서는 너처럼 마법에 취미가 많으셨다. 꽤나 공들여 만드셨다 전해진다. 더 짙어질 테니 잘 따라오너라. 기왕이면 길도 외우고 말이다.”

공작의 말대로 바로 앞에 있는 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하나의 길이 아닌 여러 개의 갈림길이 계속해서 나왔다.

길은 안개 자욱한 던전이라 할 정도였지만, 길을 외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 세계에 와서 던전을 어디 하루 이틀 격파했던가?

순서가 아니라 지도까지 그릴 수 있었다.

공작의 말은 계속됐다.

“지금은 안개뿐이지만 십삼대 가주가 남긴 말씀으론, 안개가 아닌 독연(毒煙)이라 하셨지. 십이 대 가주께서 말씀을 안 해 주시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하셨지.”

“재미있으신 분들이군요.”

“대대로 가주들은 절대자들. 하지만 그분들도 사람이다. 외로움을 달랠 것들이 필요하셨겠지.”

그런 설명을 들으니 마치 어디 고대 유적을 탐색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내가 검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것처럼 말이다.”

공작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만은 재미는 있을 게다.”

“이미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로라스의 대답에 공작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더 재미있을걸. 베스타인 가문의 최후의 보루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니까.”

“최후의 안식처요?”

“십사 대 가주께서 붙이신 이름이다. 창 한 자루로 천하를 호령하셨다 했는데, 그 양반이 걱정을 사서 하시는 성격이라 전해진다. 처음에는 역대 가주들의 취미 삼아, 재미 삼아 생긴 곳이지만.”

어느 순간 안개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앞으로는 수많은 석굴이 보였다.

공작은 고개를 돌려 로라스를 쳐다봤다.

“그 가주께서 천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위기를 준비하신다고, 안쪽을 이리 만드셨지. 물론 그 이후로! 내 대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을 활용한 적은 없다. 그저 창고일 뿐.”

“선조께서 들으셨으면 화를 내셨을지 모르겠네요.”

“그 이후 가주들 전부 창고로 사용하셨다. 우리 가문에 이런 최후의 안식처 따위가 필요할 리가 있겠느냐? 내 보기에는 그분은 건축에 취미를 가지지 않으셨나 싶다.”

“창고치고는 엄청 큰데요?”

“실제로 쓰이지 않을 것들을 모아 둔 곳이니 창고가 맞다.”

공작은 그리 말하며 석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시간 있을 때 저런 거 하나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 때도 한 개 만들었으니.”

“굴을 말입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역대 가주들의 창고. 너도 개인 창고는 하나 가져야 하지 않겠냐?”

“그걸 꼭 여기에…….”

“은근히 재미도 있다. 선대 가주들과 경쟁하는 재미 말이다.”

“무슨 경쟁요?”

공작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 데나 한 군데 들어가 보면 안다. 네가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구나.”

로라스는 나름 기대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럴 줄 알았다. 처음 보면 놀랠 수밖에 없지.”

뒤따라온 공작이 로라스의 놀란 모습을 보며 하는 말에, 로라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다 뭡니까?”

대체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것인지 모를 금화가 바닥에 널려 있었고, 어른 머리통만 한 금괴도 어렵지 않게 널려 있는…… 그야말로 금산(金山).

“오대 가주의 취미가 금붙이 수집이었다. 이런 게 몇 개 더 있다.”

“몇 개나 말입니까?”

“금이란 묘한 데가 있지. 역대 가주들 중 가장 많이 가지셨던 취미지. 아까 이야기했지? 전대 가주들과 경쟁하는 재미가 있다고.”

공작은 괜히 금화 하나를 주워 들고는 튕기며 말을 이었다.

“오대 가주 말고도 팔대 가주도 금을 좋아하셨다.”

“…….”

“팔대 가주께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오대 가주께서 모은 금붙이의 양을 능가하겠다고 마음먹으셨다. 그뿐일까? 십육대 가주께서는 그 두 개의 석굴을 보며 경쟁심에 불타오르셨고.”

어이가 없는 이유로, 로라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승부욕들은 어디 안 가실 분들. 게다가 특별한 취미도 없으셨으니.”

“이건 창고가 아니라 보고 같은데요?”

“심심할 때 가끔 오면 재미있을 것이다. 다른 곳도 몇 개 보자꾸나.”

공작의 안내까지 받으며 로라스는 안을 구경했다. 그리고 점점 더 기가 찼다.

금붙이와 장신구 등은 재물이라, 구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석굴들은 그런 게 아니었다.

번천에게 막강한 포스를 갖춰 준 드레고레. 그걸 말려 밀봉한 것들이 최소한 다섯 수레는 됨 직하게 있었다.

“원래 더 많았다고 하던데, 지금은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기록에 없으면 몇대 가주께서 쓰셨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것도 이미 넘칠 정도입니다. 포스 마스터 둘은 만들겠습니다.”

“영약도 있는 반면 수많은 독을 보관한 곳도 있다. 독학(毒學)에 취미가 있으신 가주의 창고지. 시간 보내기에는 배우는 것만 한 게 없지. 재미있을 것이다.”

“할아버님도 하셨습니까?”

“건강을 위해서. 어떤 독은 조합에 따라 영약이 되기도 했으니까. 독이 가득한 몬스터 요리는 너도 먹지 않았느냐? 그게 내 레시피다.”

그 이후로도 공작은 즐거운 듯 로라스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점점 말이 많아졌다.

평소의 공작과는 다른 모습에 로라스가 의아할 정도였다.

그렇게 절대 평범치 않은 창고를 어느 정도 둘러보았을 때, 공작이 말했다.

“로라스.”

“네, 할아버님.”

“네게 내 삶처럼 살라고는 절대 이야기 안 할 것이다. 힘에 따른 의무? 그런 건 굴레야. 남들은 네가 오른 그 자리에 목숨을 걸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

“시간이 너무 아까워. 왜 그걸 진즉 깨닫지 못했는지.”

“할아버님…….”

공작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넌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한다. 하기 싫은 건 하지 마. 착하게 살 필요도 없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착하면 손해를 본다.”

“모르셨습니까? 전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악인도 될 수 있습니다.”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이기적인 놈은 제 입으로 이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고민 할 필요도 없지요. 세상은 강자에게 스스로 고개를 숙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을 위해 살았지. 조절해라.”

“네, 알겠습니다.”

“몇몇은 멋모르고 기어오를 것이다. 오랜 평화가 지속되니 강자를 보는 눈도 사라졌다. 재판 때도 그랬다던데?”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마법도 익히다 보니.”

예상보다는 겁을 먹지 않았다는 걸 떠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될 겁니다. 할아버님 말대로 멋모르고 기어오르는 몇몇이 생길 테니까요.”

“단호하게! 뒤통수를 맞아도 아프지 않겠지만, 그 자체를 허용하지 마라.”

“단호하게 혼내겠습니다.”

“너무 물렁물렁해. 내가 너였다면 두 놈을 정리해 달라 했을 것이다.”

“베스타인이니까요.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고맙구나.”

그 짧은 대답에 로라스는 불안을 느꼈다.

“왜 그러십니까? 또 뭐가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너에게 모두 맡긴 이상 그런 건 없다. 오늘은 참 즐겁구나.”

“가시지요. 배고픕니다.”

로라스가 불안함을 억지로 감추며 하는 말에,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돌아가거라.”

“이곳에 더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곳이 내 마지막 장소다.”

“네?”

“가문의 묘지 중에서 가주들의 무덤이 있더냐?”

로라스는 흠칫했고 공작은 말을 이었다.

“역대 가주들 어디에 묻혔는지는 가주들만이 아는 법이다. 너도 이제 알았고.”

“할아버님!”

“우리는 일반인들이 아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 그런 복 따위는 없다. 있어서도 안 되고!”

“…….”

“베스타인 가문의 가주는 죽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이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죽음이란 단어와 조금의 연계도 시켜서는 안 된다.”

공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한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일어날 수도 있는 혼란을 방비할 수도 있다.”

“거기서 생기는 혼란 따위는 짓누르면 됩니다.”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셔야지요. 제겐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기적이지 않으냐.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이 짐작이 되는데. 아니냐?”

굳은 표정의 로라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편하시다면 더 고집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손자의 가슴에 못을 박으실 정도의 결심이셨는데 지켜 드려야지요!”

“그래, 그래야 새로운 베스타인이지.”

“물러가겠습니다.”

로라스는 신형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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