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45)
에렌 대회의.
비정기적으로 열리지만, 공작의 명령하에 백작 이상의 고위급 귀족은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모임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회의장에는 오십여 명의 대영주들과 군부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귀족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한 사람이 등장했을 때, 귀족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바로 디존슨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버지가 나를 버리실 리가 없잖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만남을 요청하였던가?
‘아무리 화가 나셨더라도 한 달간 방에서 근신은 좀 너무하셨지.’
얼굴 한번 비추지 않고 근신만 명령했기에 은근 걱정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디존슨은 공작을 잘 알았다.
처벌을 할 거라면 자신이 에렌에 왔을 때, 바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 동안이나 근신 이외에는 특별한 처벌이 없는 것을 보면 끝난 것이다.
‘하긴 사람들의 눈도 있으니.’
바로 용서하기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걸렸으리라. 그래서 벌을 주는 척하고 시간을 끄셨으리라.
‘근신을 풀어 주는 날을 바로 오늘로 잡으셨다는 건.’
자신을 쳐다보는 귀족들을 보며 디존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즉 그러셨어야지. 나를 단련시킨다고 그리 시간을 끄니, 이번과 같은 사달이 생기는 게지.’
디존슨은 그리 생각하며 귀족들과 하나씩 눈을 맞대었다.
‘내 사람들은…… 아직 근신 중인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들 대영주들 그리고 핵심 귀족들이 곧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거라는 게 중요했다.
“주군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귀족들은 일제히 정자세를 취했고, 잠시 후 그런 귀족들 사이로 베스타인 공작이 들어왔다.
“아버님.”
디존슨만이 반갑게 공작을 부르며 나서려 할 때였다.
‘네놈이 왜?’
자신이 아버지를 에스코트해야 할 자리에 로라스가 있었다.
“네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중앙이다.”
“네?”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상대로 공작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가드들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무슨 짓이냐!”
자신의 양쪽 팔과 겨드랑이에 서늘한 철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디존슨은 크게 당황했다.
“놓으란 말이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지만, 그의 두 팔을 잡은 기사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를 중앙으로 끌고 나가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그사이 공작은 자신의 자리에 앉고는 소리쳤다.
“모두들 들어라!”
갑작스러운 고함에 귀족들은 움찔했고, 공작은 다시 소리쳤다.
“죄인 디존슨은 가진 권리 이상을 이용하여 에렌의 일군단을 영외로 내보내고, 각 영지의 관로를 막았으며, 아무 이유 없이 영내 중요 관리들을 감금하여 영지민들의 불편과 불안을 초래하였다.”
하얗게 질린 디존슨이 급히 소리쳤다.
“아버님! 이유가 있었습니다. 놈들은 반역을……!”
“재판을 치렀다면서? 네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건…….”
“네놈이 이제 감히 이 자리의 위엄까지 손상시킬 생각이더냐!”
“아버님!”
“닥쳐라! 뭐가 됐든 이 자리에 있을 때 뱉은 말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그 재판마저도 네놈의 뜻대로 진행되었다는 걸 영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공작의 모습이었다.
말 한마디, 손가락 하나로 모든 사람들을 통제해 왔던 그였기에 큰 소리가 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오늘 분노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말과 행동은 절대적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덥석 대리직을 받았더냐!”
디존슨은 그제야 자신이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의 모습을 보건대, 여태 받아 보지 못한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님!”
디존슨이 이마를 바닥에 대며 소리치는 말에도, 공작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네놈의 죄는 교수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교수형이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디존슨은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모두가 디존슨이 큰 벌을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 귀족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디존슨을 공개 망신 준 것부터가 엄청 큰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교수형은 또 다른 문제다.
아직까지 이번 일로 죽은 이는 없다. 하지만 공작이 장자인 디존슨을 스스로 죽인다면 못 죽일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그 누가 공작을 막겠는가?
이 일에 관련된 많은 이들이 죽을 터.
일이 이렇게 되니 당연히 머릿속에는 하나의 사실만 떠오른다.
‘다음 후계를 위한 물갈이.’
원래라면 그 대상을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주군! 아니 됩니다!”
“주군! 너무 과한 처벌이십니다!”
디존슨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죽어서는 안 됐다.
모인 귀족들이 일제히 디존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청원하였지만 공작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죄가 너무 커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 말라!”
오히려 더 화를 내자 귀족들도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할 때였다.
“공작님.”
사람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기회는 줘야 하는 법.”
로라스는 공작과 디존슨 사이로 나서며 계속 말했다.
“청컨대 백부와 우둔한 무리에 속죄할 기회를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기회를 주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제국의 내부로는 몬스터들과, 외부로는 수많은 외적들과 싸우는 중입니다. 죄를 지은 자들은 분명 처벌을 받아야 하나, 에렌마저도 혼란스러워지면 제국이 흔들립니다.”
로라스의 열변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까?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공작이 약간의 여지를 주는 물음에 로라스가 답했다.
“하늘 산맥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지고 있는 바, 죄 지은 자들과 식솔들을 북부로 보내 속죄의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로 하여금 몬스터들을 막게 하자?”
“네. 거기서 몬스터 소탕에 큰 공을 세워 쌓인 죄를 탕감해 주시면 모두가 공작 각하의 은혜에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
“으음…….”
공작이 고민의 눈빛을 보이자, 귀족들도 같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라스의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언뜻 로라스가 그들의 목숨을 구원하는 걸로 보이지만, 하늘 산맥은 와카디아에 있다.
정말 디존슨을 포함해 그를 따르던 귀족들과 식솔들이 그쪽으로 가면, 그들의 생사여탈권은 와카디아의 영주인 에듀에게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세력을 불리겠다는 건가?’
역적 취급당하고 있는 귀족들이지만, 그들의 자본과 사람들은 여전하다.
‘그걸 로라스 백작이 틀어쥐게 되면?’
에렌에서 로라스의 영향력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때 들리는 공작의 목소리.
“쓸모없는 것들. 몬스터의 밥이 되어 세력이나 불려 주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깨달았다.
정치적 계산은 나중에 해야 한다는 사실을.
디존슨이 죽으면 모두가 숨죽이며 살아야 한다. 특히나 예상외로 멘토라스의 입지마저도 좋지 않은 상황이다.
최소한 지금 상황을 유지하려면 디존슨은 살아 있어야 한다.
“로라스 백작의 제안이 무척 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시옵소서, 주군.”
“죽이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인 일이 될 터. 그들을 변방에 유배 보내 속죄하여 돌아올 길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폭포수처럼 귀족들이 나서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약간이라도 디존슨에게 줄을 댄 자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나섰고, 멘토라스 파의 귀족들 역시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쩌겠는가?
에렌의 지배자가 칼을 들고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그건 막아야 했다.
“으음.”
공작은 다시 한 번 나직이 소리를 내더니, 슬쩍 좌중을 훑어보며 말했다.
“경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죄인들의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다.”
“주군의 은혜가 하늘같습니다.”
“현명한 선택에 만민이 기뻐할 것입니다.”
귀족들의 입발림 소리가 쏟아졌고, 공작은 가차 없이 디존슨과 그 파벌에 대해 와카디아로 유배를 명하였다.
그러고는 로라스에게 불렀다.
“로라스.”
“네, 공작님.”
“네게 줄 것이 있다.”
로라스는 살짝 의아했지만,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로라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로라스 진 베스타인에 로라스 린 베스타인이라 새로 이름을 내리니, 오늘 여기 모인 이들이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공작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귀족들은 놀랐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건 당사자인 로라스.
‘갑자기 왜?’
이건 사전에 없던 이야기. 무엇보다 미들네임만 바꾼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베스타인 성씨는 제국에서 황가와 함께 큰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 혈통의 순수성은 다른 성씨들보다 낮다.
충성스럽고, 큰 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베스타인 성을 내리는 게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스타인 성을 받은 이상 혈통상으로는 모두가 평등하다.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지켜져 온 베스타인의 전통이다.
그래서 늘 제국의 최고 명문가라는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고 말이다. 능력 있는 자들이 그 성을 받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니 당연한 일이다.
여하간 무슨 이유인지 궁금증이 들었으나 여기서 뭐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공작은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회의를 끝낸다. 오늘 지시한 일은 신속히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 * *
공작의 집무실.
로라스가 들어가니 착잡한 표정의 베스타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로라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래도 되겠느냐?”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나 역시 네게 선택의 고민을 없애 주겠다 하였다.”
“저 역시 할아버님께 고민을 드리지 않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죽이는 게 깔끔할 것이다. 네 큰아비가 아무리 못나도, 내 장자란 위치는 언제든 분란의 소지를 만들 것이다.”
“그러니 더욱 살릴 것입니다. 아들을 죽인 아비. 할아버님에게 그런 고약한 말을 남기게 할 수 없습니다.”
로라스의 단호한 말에 베스타인은 헛한 웃음을 내며 말했다.
“허허허. 네 녀석이 잘난 건 알았지만, 그런 말까지 들을 줄은 생각지 못했구나.”
“그 잘난 녀석이 감당할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실 감당하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닙니다. 편히 가고자 했다면 이 방법을 택하지도 않았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겠지.”
베스타인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북부로 보내자는 건 린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냐?”
“그도 할아버지와 생각이 같았습니다. 죽이는 게 상책이라 하더군요. 에렌에 남아 있을 큰아버지의 세력을 흡수하는 것도 좋지만, 그 혈통은 죽을 때까지 위협이 될 것이라고요.”
베스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멘토라스는 어찌할 생각이냐? 녀석은 쳐 낼 명분이 없다. 분명 너와 힘을 겨루려 할 것이다.”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법 아니겠습니까? 강한 자가 베스타인가를 이끈다, 그게 전통이지 않습니까.”
“…….”
“너무 걱정이 많으십니다. 상황이 어찌 변해도 그 역시 죽이지 않을 겁니다. 할아버님의 핏줄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천운을 타고난 것이니까요.”
“허허허허.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로라스는 옅은 미소로 답했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달라졌구나. 예전에는 능글맞게 조금 숨기는 시늉이라도 내더니, 이제는 숨김없이 내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카르이샤 막내 숙부가 그리되지만 않았어도, 락에서 나올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 그놈이 네 아비와 가장 많이 달렸었지.”
“상황이 변했습니다. 제가 마음먹으면,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모두 만족하게 됩니다.”
베스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진 힘은 숨기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법. 곧 널 후계로 공표하려 한다.”
“굳이…….”
로라스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려 하자, 공작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더 시간을 끌다가는 정말 피를 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사실 작년에 그래야 했다. 너와 카르이샤를 저울질하고 있었지.”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천천히 결정하셔도 됩니다.”
공작은 그런 로라스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네?”
“때가 된 게지.”
로라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