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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44화 (244/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44)

실내엔 정말 침묵만이 가득했고, 그 탓에 더 신경을 거슬렀다. 사람의 숨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크게 들린 탓이다.

“…….”

침묵과 침묵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

콰아아아앙.

그리고 어느 순간 문이 열리며, 모두가 기다리던 베스타인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꿀꺽.

숨소리 이외의 다른 소리가 그때 섞였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다시 사라진 소리.

원래 공작이 주도하는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달랐다.

일 년 가까이 자리를 비운 공작이 첫 회의를 여는 자리였다.

공작이 돌아온 지도 사흘.

하지만 공작은 어떠한 방문객도 허락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만날 거라 생각했던 멘토라스와 로라스마저도 거절당하였다. 공작은 그저 자신의 집무실과 침실만 오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더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궁금해했다.

과연 공작이 무슨 말로 회의를 시작할지. 그리고 누구에게 먼저 발언권을 줄지 말이다.

특별히 의도치는 않았지만, 회의장 안은 두 부류로 나뉜 상태였다. 공작과 가장 가까운 곳, 좌우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기준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된 두 사람은 당연히 로라스와 멘토라스.

‘과연 누굴 먼저?’

모두가 궁금해했고, 공작이 중앙 옥좌에 앉아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을 때 그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수척해졌구나!”

하지만 베스타인 공작의 시선과 입은 그 두 사람을 향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주군!”

페컴이 급히 중앙으로 나와 부복했다.

공작은 그런 페컴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힘들었다지? 성내 옥에 갇히기도 했다고?”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고문 비슷한 것도 받았다던데?”

순간 페컴은 물론이고 모두가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흘 동안 공작은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물론 큰일이니만큼 대략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겠지만, 그 누구도 아직 보고한 건 없다. 하지만 공작은 지금 디테일하게 말하고 있었다.

“서부 지역 하급 귀족에게까지 모욕을 당했다던데?”

순간 실내는 추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디존슨 파에 있다가 멘토라스 쪽으로 옮겨 탄 귀족들, 그리고 대놓고 돕지는 않았지만 모른 체하며 그 편을 들었던 중립 귀족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페컴은 외부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느나, 공작의 사대심복이라 불리는 이들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에렌 성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는 자다.

공작의 뉘앙스를 보니 페컴을 수척하게 만든 자를 탓하는 듯했으니 춥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잘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주군.”

“대외적으로 큰 놈에게 맡겼어도, 이 성은 널 믿고 맡겼거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오히려 공작이 페컴을 탓하는 듯하자, 사람들은 갈피를 못 잡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가 근신하라. 따로 명령할 때까지는 방에서 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명령을 받듭니다.”

이 상황이 억울해도 이상하지 않을 페컴이었으나, 그는 바로 허리를 숙이고 퇴장했다.

공작은 이제 멘토라스를 보며 말했다.

“멘토라스.”

“네, 아버님.”

“공석이다.”

설마 나까지야 하며 의기양양하게 나섰던 멘토라스가 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네, 영주님.”

“일을 잘도 해결했더구나.”

“과찬이십니다, 아버지.”

“그리고 감히 내 의사도 모른 채, 디존슨을 죽이려 했고.”

순간 멘토라스는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급히 부복하며 항변했다.

“군단을 영 밖으로 이동하고, 각 주요 관로를 막았습니다. 명백한 영주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흥!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나설 일이 아니지. 거기다 군을 동원해? 내전이라도 일으킬 생각이었더냐?”

“절대 아닙니다!”

멘토라스가 급히 하는 말에, 공작은 잠시 그를 노려보고는 말했다.

“원래는 큰 벌을 내려야 하나, 상황을 참작하겠다. 군권을 내놓고, 네 녀석의 영지에 내려가 근신하라.”

“아……아버님!”

“물러가라!”

멘토라스가 이를 악물며 물러가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로라스에게 쏠렸다.

하지만 공작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잠시 다녀온 사이 이런 사달을 만들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

모두가 급히 고개를 숙이자, 공작은 굵직한 귀족들을 불러 근신 또는 하옥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 경거망동 말라! 물러가랏!”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넌 왜 안 나가냐?”

베스타인은 마지막까지 남은 로라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할 말씀이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네게 할 말이 뭐가 있더냐?”

“칭찬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로라스의 반문에 베스타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돌아오니 엉망이 되어 기분도 안 좋은데, 칭찬 받을 짓을 뭐 했다고?”

“다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

“큰아버지가 할아버님의 측근들을 다 감금했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눈과 귀가 없는 것은 아닐 터인데요.”

베스타인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제 수하들 중에서도 유능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 고스트란 놈들과는 겹치지 않을 터인데?”

“역시 알고 계셨군요.”

“에렌에서 벌어지는 일 중 내가 모르는 건 없으니까.”

“늘 조용히 지내고자 하는데 흔들어 대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래서 준비한 것뿐입니다.”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말 칭찬 안 해 주십니까?”

베스타인은 그런 로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네 큰아비는? 에렌에서는 보이지 않더구나.”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버님이 안전하게 보호하고 계십니다.”

“에듀가?”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다행이 저희 쪽이 빨랐습니다.”

“으음, 못난 놈. 기어갈 데가 없어서. 그럴 바엔 깔끔하게…….”

베스타인이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며 하는 말에, 로라스는 침묵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그래서 상이 필요하느냐?”

그때 베스타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묻자 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제가 알아서 가져갑니다.”

“…….”

“그냥 수고했다는 한마디 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베스타인은 그제야 표정을 풀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그런데 하나만 묻자.”

“말씀하십시오.”

“내전을 막으려고 네가 고생한 건 알겠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았느냐?”

“…….”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냐?”

로라스는 웃음기를 지우며 반문했다.

“아직 선택할 게 남으셨습니까?”

“뭐라?”

“더 쉬운 길이 있었습니다. 많았지요. 하지만 제가 선택한 길은 할아버님의 선택의 고민을 없애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고민이 되십니까?”

자신을 뚫어지게 보며 묻는 로라스를 보자니 베스타인은 기가 찼다.

‘범 새끼가 아니라…… 다 자란 범이로구나!’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로라스가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갔는지도 말이다.

“선택의 고민이라. 그래, 그건 없었구나. 그럼 나도 너의 선택의 고민을 없애 줘야겠지.”

“네?”

“네 아비에게 큰 놈과 함께 오라 이야기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피곤하구나. 이제 나가 보거라.”

베스타인의 축객령에 로라스는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더 필요하실 터.’

로라스는 살짝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린델의 저택.

“축하드립니다, 로라스 백작님.”

공작을 독대하면서 무슨 대화가 오간지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린델은 로라스를 보자마자 기뻐하며 말했다.

로라스의 측근들과 로라스 편의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린델의 발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린델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페컴 백작님을 탓하며 근신을 명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지만, 멘토라스 백작에게 역시 비슷한 벌을 내렸을 때 확신했다.”

“뭘?”

“주군께서 후계 후보가 아닌 하나뿐인 후계자로 누굴 선택했는지 말이야.”

린델이 한껏 기쁜 표정으로 말을 잇자, 귀족 하나가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페컴 백작님을 근신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덕분에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으니까요. 또 멘토라스 백작의 근신 명분도 확보했고 말입니다.”

다른 귀족 하나가 물었다.

“여전히 대공자를 생각하는 거 아니겠소?”

“가능성이야 없지 않지만, 그랬다면 오늘 같은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을 겁니다. 로라스 백작까지 어떻게든 나서지 못하게 했을 터.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습니까?”

보면 볼수록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다.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오늘 할아버님이 말씀하신 걸 잊으면 안 돼.”

린델에게 그리 일러 주고, 다른 귀족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언행에 주의하도록 하십시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까 저어되어 이야기한 것이다.

그 외 별다르게 논의할 이야기는 없었다.

‘디존슨은 어찌 처리하시려고.’

로라스는 할아버지가 남긴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럼 나도 너의 선택의 고민을 없애 줘야겠지.

아무래도 근신 따위로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설마! 다 늙으신 양반…… 상처가 죽을 때까지 남을 터인데.’

아니라고 믿었다.

* * *

에듀를 비롯한 락의 기사들이 에렌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들 일행에 디존슨과 그의 측근 귀족들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동안 평화로웠던 에렌에 다시 한 번 태풍이 불 거라 생각했다.

“왔느냐.”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베스타인은 부복하려는 에듀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됐다. 인사 받자고 부른 것은 아니다.”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너는 좋아 보이는구나. 앉거라.”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베스타인을 보며, 에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큰놈을 돌봤다면서?”

“돌봤다기보다는 그냥 잠시…….”

“말 돌려 할 필요 없어. 왜 받아 주었느냐? 그냥 죽게 냅뒀어야지.”

“…….”

“너무 못난 놈이라……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던 게지.”

베스타인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하는 말에, 에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못나도 자식이다. 에듀는 그것을 잘 알았다.

“와카디아는?”

“덕분에 잘 커 가는 것 같습니다.”

“로라스 덕분이겠지.”

“네. 그것도 맞습니다.”

“잘난 놈이다. 네 아들놈은.”

“잘난 놈이다, 네 아들놈은. 잘 키웠어.”

자식 칭찬에 에듀의 굳은 표정에 미소가 피어났다.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혼자 잘 큰 거지요.”

“그래서 부른 게다.”

에듀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창밖을 보던 베스타인은 몸을 돌려 물었다.

“로라스. 어디서 온 아이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뭘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어. 내가 네 처를 반대했던 이유가, 네 처 가문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인 줄 아느냐!”

“…….”

“네 처, 아이를 낳지 못하지 않느냐!”

에듀는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에렌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 줄 알았더냐! 게다가 당시에 너는 내 뒤를 이을 놈이었다! 네 그릇이라면 내 아들들은 물론이고, 내 사람들 모두 차별 없이 품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순간 에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제 아들입니다.”

“그래, 네 아들이다. 네 귀한 아들, 어디서 온 것이냐!”

“메어리가 낳았습니다.”

에듀의 단호한 말에 베스타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에듀, 네가 왜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지 안다. 하지만 내가 알아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해.”

에듀의 입이 그래도 열리지 않자, 베스타인은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외쳤다.

“네 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걸 나만 알고 있는 줄 아느냐!”

다시 한 번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떠는 에듀를 보며 베스타인이 말했다.

“여태는 묻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알아야 한다, 에듀. 그래야 네 아들을 보호할 수 있다.”

에듀는 멍한 눈으로 베스타인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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