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242화 (242/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42)

‘쉽게 쉽게 가면 더 좋았잖아.’

디존슨이 재판에 불만을 가지고 결과에 불복하여 못난 꼴을 보여 주길 바랐다.

그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와 심복을 제압하고, 뇌옥에서 회의했던 대로 단숨에 에렌을 장악하려 했다.

‘그냥 바로 쳤으면 좀 더 편했을까?’

멘토라스가 움직이기 전에 내가 먼저 디존슨을 제압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귀족 사회는 명분으로 움직이는 곳이다.

압도적인 폭력으로는 한계가 있고, 이후로도 계속 문제가 된다.

그 멍청한 디존슨마저도 단숨에 페컴을 비롯한 다른 반대파 귀족들을 바로 죽이지 않고, 누명을 씌워 재판을 통해 제거하려 했을 정도로 말이다.

‘십 분만 있었어도.’

디존슨이 분명 불만을 가지고 추하게 병력을 동원하여 나를 제압하려 했을 텐데 말이다. 그럼 나도 그를 제압할 명분을 가지고 말이다.

‘천운이었던 게지. 멘토라스에게는.’

그는 정말 완벽한 타이밍을 잡은 것이다. 그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여하간 페컴의 말에 잠시 멈칫했던 멘토라스의 입이 열렸다.

“집사님.”

페컴은 베스타인 가문의 집사는 맞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호칭은 옳지 않다.

페컴은 엄연히 백작이다.

그는 할아버지를 존경했고, 할아버지 또한 그를 옆에 두길 원했기에 자연스레 그리된 것뿐.

할아버지 직계가 아니라면, 베스타인 핏줄이 아니라면 감히 그에게 집사라 부르지도 못할 정도다.

하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서 집사라고 부른 건 다분히 의도적일 터.

“저는 그저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여기 모인 분들이 인정만 해 주신다면 그러고 싶다는.”

“이공자께서 에렌을 이끌어 나가는 건 서열상으로 당연한 것. 저희가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페컴의 차분한 답변에 오히려 멘토라스는 할 말이 사라졌다. 인정한다지 않은가.

‘페컴 백작은 확실히 내게 섰는가?’

이런 분위기에서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런 듯했다.

여하간 두 사람의 대화 분위기는 상당히 무거워졌다.

“하하하하!”

멘토라스는 눈치 빠르게 그리고 현명하게도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확실히 역적들에 대한 문제는 아버님의 소관이지요. 그럼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일단은 에렌의 안정이 우선이니까요.”

멘토라스는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지요. 디존슨을 어찌 찾아 잡아야 할지도 상의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하면서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로라스.”

그리고 나가려는 날 불렀다.

“네. 말씀하십시오.”

“너는 잠깐 기다리거라. 우리 둘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후, 방 안에 그와 단둘이 남았다.

“조카님.”

“네, 멘토라스 백작님.”

“갑자기 왜 그리 부르느냐. 그냥 백부라 부르면 편하지 않겠느냐? 이제 앞에 별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될 테니. 짧게 말이다.”

둘째 큰아버지에서 둘째를 빼라는 건, 디존슨의 죽음을 확실시 하는 말

‘그리 자신 있는가? 정말 잡히기라도 하면…….’

그때 그가 또 말했다.

“이제 정말 그리 불러도 된다.”

둘만 남아서일까?

아니면 모든 상황이 끝났다 생각해서일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특유의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해한다.

내 세력이라고 할 만한 존재감이 없고, 에렌을 틀어쥔 이상 자신의 세상이라 생각할 테니까.

‘가면을 썼으면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데. 아직 미숙하단 말이지.’

웃는 얼굴로, 하지만 그를 슬쩍 건드려 봤다.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당분간 에렌의 영주이신데 말입니다.”

“힘든 자리지. 이 자리는 정말 그렇다.”

“그러니 할아버님께서 몇 명의 후계를 뽑아 영지의 일을 돕게 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늘 우리를 경쟁시키셨지.”

멘토라스는 그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지만 이제 그 고단한 일도 끝난 것 같구나. 이제 다 정리되지 않았느냐?”

나름 숙이고 들어오라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뭐, 확실히 어느 정도는 정리된 것 같군요.”

막내 숙부가 아닌 그와 손을 잡아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직 완벽하게 파악한 건 아니지만, 제 사람들은 챙기는 스타일인 것 같으니까.

문제는 이제 내가 에렌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에 있다.

‘오늘은 기가 막힌 때를 잡았지만, 이 문제는 완벽하게 빗나간 거지.’

진즉 손을 내밀었다면 좀 나았을까?

아니, 이번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신의를 보여 줬다면 고민이라도 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널 못 믿겠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라. 일단 안정이 우선이니까.’

시선만으로 사람을 꿰뚫을 수가 있다면, 지금 멘토라스는 몇 번이라도 날 뚫었을 것 같다.

“조카님, 잘 생각하시게.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이 백부 아래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음이니.”

“모두가 평화로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할아버님이 오시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혹시 락…… 아니, 네 부친의 도움을 받아 뭘 할 생각이라면 정말 추천해 주고 싶지는 않구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심이다.

목 하나 따는 건, 내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 * *

콰아아앙!

“건방진!”

탁자를 치는 소리와 함께 멘토라스의 욕설이 같이 튀어나왔다.

“주군, 고정하시옵소서.”

옆에서 심복이 하는 말에도, 멘토라스는 로라스가 나간 문을 뚫어지게 보며 욕을 내뱉었다.

“이 건방진 놈이! 기회를 줬음에도 끝까지 맞서려 들어?”

“로라스 백작이 거절하였습니까?”

“대놓고 이야기하지만, 여러 번 나와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더군.”

“후훗!”

순간 심복이 내는 웃음소리에 멘토라스는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게 웃을 일이더냐?”

“웃어야지 않겠습니까?”

“응?”

“로라스 백작이 젊긴 젊습니다. 그리 대놓고 속내를 드러낼 정도라면 말입니다.”

멘토라스는 순간 흠칫했고, 심복은 말을 이었다.

“오히려 움직이기가 더 편해지지 않았습니까? 애매한 아군보다 명확한 적이 상대하기 편한 법이지 않습니까?”

“으음…… 그게 그렇게 되는군.”

“굳이 로라스 백작을 곁에 두시려는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멘토라스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아까워서 그랬지. 쓸 만한 놈이야. 그때는 몰랐지만 놈이 포스 마스터까지 이겼다면서?”

“확실히 그 무력은 놀라운 바가 있었습니다. 본 사람들 말로는 권신 에르페유 백작과 비견할 만하다더군요. 하늘로 걸어 올라가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합니다.”

멘토라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하늘은 무슨, 높이 뛰었던 것이지. 아니, 놈은 마법사니 마법 도구라도 있었을지도. 여하간 그런 놈을 두면 나쁘지 않아. 군단장 자리 하나 주면 충성을 다할 거라 생각했는데.”

“득보다 실이 큽니다. 미미하다 하나 세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마냥 예뻐서 이러는 게 아니야. 녀석을 내 밑으로 두면 엄청난 득이 하나 더 있지.”

심복은 조심스레 쳐다보았고, 멘토라스는 말을 이었다.

“에듀. 와카디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점도 있지. 제 자식 놈이 내 밑에 있는데, 에듀가 감히 적대시할 수 있을까?”

“아! 제가 그 생각을 못 했군요.”

“에듀…… 무시해선 안 될 인물이지. 그런 놈이 와카디아까지 손에 넣었으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잠시라고는 하나, 놈이 아버지의 모든 관심을 다 가진 적도 있었다.

‘늙은이가 말년에 노망이라도 나서…… 만의 하나.’

멘토라스는 순간 그런 것마저 염두에 둬야 한다는 생각에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거면 차라리 암살을…….”

“멍청한 놈!”

심복의 말에 멘토라스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와카디아가 있다고 몇 번이나 말해? 디존슨이 녀석을 제거하지 못한 순간, 이미 손을 댈 수가 없어졌다는 걸 왜 몰라?”

“소신은 그저…….”

“이런 것들을 믿고 내가……. 와카디아가 변방의 영지일 뿐이다,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이냐?”

“틀린 건…….”

“와카디아가 일개 변방의 영지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거다.”

심복은 움찔했고 멘토라스는 계속 소리쳤다.

“국경에만 있다 보니 흙먼지가 귀를 다 막은 것이냐! 사람들이 와카디아에 대해 뭐라 평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들은 건 있습니다. 기회의 땅이라는…….”

“그래! 국경에서도 그런 소문이 있다면 그리 가볍게만 생각해서는 안 되지. 또 소문만은 아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만 명은 된다 하더군.”

“만 명이야 웬만한 지방에서도 충분한 숫자 아닙니까?”

“그건 징집병들을 포함한 숫자고. 와카디아는 오래전부터 산맥으로부터 내려오는 마물을 막아 낸 영지다. 병력의 질이 다르다고!”

“아! 제가…….”

“이런 머저리들을 믿고 내가 일해야 하다니. 나가. 나가서 일 벌이지 말고 그냥 귀족들이나 포섭해 놔. 나중에 문제 생기지 않게.”

심복은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고, 멘토라스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젠장! 거사는 분명 성공했는데.’

답답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디존슨만 잡으면!’

확실히 마무리 짓지 못해서 생기는 불안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겐 그 패가 있지 않은가! 로라스를 한 번에 떨쳐 낼 수 있는 패가!’

그 생각에 멘토라스는 안심이 되었지만, 이내 눈앞의 문제 디존슨이 떠올랐다.

‘확실하게 죽여야 해! 그래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이 죽은 걸 확인할 때까지는 수하들을 닦달할 생각이었다.

* * *

에렌은 혼란스러워졌다.

평상시라면 감히 발도 들이밀지 못할 가문에 들어가, 얼굴도 보기 힘든 귀족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역적의 식솔들을 체포하라!”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몇몇 가문에서 반항은 있었지만.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된다!”

병사들에 의해 금방 진압되었다.

“샅샅이 뒤져 역적의 자금을 모두 압류하라!”

그러고는 털리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가문에서 일하는 기사들이 나섰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몇몇 충실한 기사들은 굴하지 않고 나섰으나,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지 못하는 법.

결국 피를 보게 되는 곳이 생겨났고, 순식간에 그 소식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항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단합하여 대항하기에는 구심점도 없는 상태였다.

모두가 그날 처형장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디존슨과 핵심 귀족들은 다 성 밖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번엔 멘토라스에게 줄을 서기 위해 노력했다.

여하간 멘토라스의 세력들이 위세를 떨고 있을 때, 로라스는 자신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정말 놀랐습니다.”

“그건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테라와 번천은 결투재판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고, 에르자일 역시 신기해하며 물었다.

“중력을 반전시킨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비행 마법도 확실히 아니었거든. 뭐였어?”

“무사히 여기에 있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언어도단이야. 무사하다는 건 위험이 있었어야 했다는 건데, 그런 게 있었어?”

에르자일의 물음에 로라스는 피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에르자일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꼭 알려 줘야 해. 마법으로 한 거라면 말이지.”

“마법이 아니어도 수련하면 할 수 있지. 그보다…….”

로라스는 번천을 보며 물었다.

“놈은?”

번천은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버렸습니다.”

“사람들 틈으로 버렸습니다. 이 손으로 죽일까 하다…… 이미 죽어 가는 놈을 보니 가치가 없다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로 던져 버렸습니다.”

“훌륭한 무인이군.”

“그리 좋은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버리지 않고 치료했겠지요. 제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번천이 그 마법사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는 로라스였다.

‘역시 멀쩡한 놈을 던져 줘야 했는데.’

하긴, 생각하면 그 꼴인 놈을 죽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번천은 계속 말했다.

“그런 놈에게도 천운이라는 게 있어 살아남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평생 불구로 살 테니까요.”

“그게 더 복수가 될지도 모르지. 마법도 못 쓰는 몸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충분합니다. 그런 놈에게 더 이상 신경 쓴다는 건 가치가 없는 일. 이제 앞만 보려 합니다.”

“그리 생각하면 훌륭하지.”

로라스는 그리 대답하고는 에르자일을 보며 물었다.

“에르자일, 아버님하고 연락이 될까?”

“아직은 힘들어. 디존슨 그놈이 마탑을 폐쇄해 놔서. 다시 정상화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해. 그런데 갑자기 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테라.”

“네, 주군.”

로라스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가 직접 움직여 줘야겠다. 아버님에게 반드시 디존슨은 우리가 잡아야 한다고 말씀드려. 꼭 그리돼야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