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41)
“으악!”
“적이다!”
“주군을 보호하랏!”
날아드는 볼트에 의해 디존슨의 주변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만의 하나를 위해 대비한 석궁병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문제는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석궁병은 가장 강력한 병종 중 하나다. 특히나 이렇게 고지대에 자리를 잡은 상황이라면, 최소한 수배의 병력이 있어야 했다.
현재 디존슨의 주변에는 뛰어난 기사들이 많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신에게 날아오는 걸 저지하는 것뿐.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었다.
포스로 석궁병이 쏘아 대는 볼트들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람 살려!”
석궁병의 표적은 명확했지만 주변에 병사들이 쓰러지니, 일반인들도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로라스는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쳐다보았다.
‘이건 약속에 없던 것인데?’
오히려 사전에 군사적 움직임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아 두기까지 했다.
오늘 여기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 반드시 내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럼 와카디아도 내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명확하게 주의를 주었음에도 이런 상황이란 건.
‘정말 예측할 수 없는 놈이구나!’
멘토라스가 움직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차도살인을 노린 건 알겠고, 그게 엎어졌으니 나선 것 같은데.’
현재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석궁병. 그리고 저 끝에서 달려오는 기사단의 규모를 보면 미리 사전에 준비했을 터.
‘보자!’
대충 멘토라스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부담스러운 자들을 디존슨의 손을 빌려 제거하고, 또 자신을 이용하여 디존슨의 세력을 제거했을 터.
사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으니, 아무래도 전자에 무게를 두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분노는 고스란히 디존슨에게 향할 터이고, 자신은 조용히 득만 취하겠다는 거지?’
제법 훌륭한 시나리오였는데, 변수가 생겼을 것이다.
그의 시나리오 중에 내가 죽지 않고 오히려 판을 반대로 엎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어떤 시나리오냐?’
그렇게 혼란한 와중에도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날 똑바로 보는 번천을 보며 생각났다.
‘아!’
일단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마법사에게 향했다.
츠어질은 볼트에 박혀 죽든, 사람에 깔려 죽든, 나랑 아무 관계가 없지만.
‘넌 번천의 몫이니까.’
타아앙!
놈에게 다가오는 눈먼 볼트를 쳐 내고는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통쾌한 맛은 없겠지만.’
놈을 끌고 가, 사람들이 도망치는 쪽으로 던졌다. 다가가는 번천의 눈이 묘하다.
‘상황이 이러지만 않았다면 놈을 직접 잡아 줄 기회를 줬을 텐데.’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호위 기사들의 틈에서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는 디존슨.
‘설마 저렇게 죽는 건 아니겠지?’
곤란하다.
그는 죽어서는 안 됐다.
할아버지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거지, 혈육을 잃은 슬픔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니까.
놈들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디존슨을 지키고 있던 기사 하나가 날 보며 급히 경계했다.
예상이 맞다면 이들은 곧 죽는다.
멘토라스는 디존슨과는 다르니까.
제대로 기습을 했다 치더라도, 세력 자체만으로 봤을 때는 디존슨이 훨씬 크다.
멘토라스가 오늘 디존슨과 그 측근들을 죽이지 못하면 당하는 건 본인일 테니 이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손을 뻗었고.
“어!”
허공섭물로 기사가 들고 있던 검을 뺏어 왔다. 그러고는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다 죽을 작정인가? 적은 석궁병만이 아니다.”
“그게 무슨…….”
시야가 그리 좁아서야.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열린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 무리의 기사단과 기병들이 보였다.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된 기사는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큰아버님, 일단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라스…… 너…….”
디존슨이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여전히 상황 판단이 안 되는가?
“제가 아닙니다. 누가 적인지 잘 아셨어야지요. 와카디아 기사단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측근 중 하나가 소리쳤다.
“저놈들은 붉은군화 기사단입니다. 주군! 피하셔야 합니다!”
“멘토라스! 이놈!”
저리 부들부들 떨기 전에, 일단 걸음부터 옮겨야 하는데 말이다.
“피하시지요. 애초에 전 큰아버님을 어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을 벌인 건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 갔으면 하는데 말이다. 그래야 편히 멘토라스가 어찌 나올지 즐길 수 있으니까.
“가자!”
제정신을 차린 디존슨이 측근들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저 중 얼마나 살아남을까?’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에르자일에게 전음을 보냈다.
―에르자일. 디존슨은 죽으면 안 돼.
여기서 원거리로 디존슨을 호위할 수 있는 건 나와 에르자일뿐.
―왜?
마법 전어로 날아오는 물음.
―놈이 살아 있어야,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이 우리에게 신경을 덜 쓸 테니까.
―다른 놈들은?
―디존슨만.
그리 알려 주며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저 바닥에 널린 돌조각이며 볼트 따위 막는 건 일도 아니다.
손가락을 튕겨 디존슨 쪽으로 향하는 볼트의 궤적을 바꿔 냈다.
“으악!”
그 탓에 디존슨 주변에 있던 놈들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놈들 따위야 내게도, 그리고 할아버지에게도 의미가 없다. 어차피 놈들의 세력을 줄여 멘토라스와 균형을 맞추는 것도 의미가 있고 말이다.
‘참 어렵네.’
물론 죽이지 않고 권력을 손에 넣는 건 정말 지난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어려운 거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한다.
터엉! 터엉!
디존슨을 조준 사격하는 석궁병들이 있는 듯했다. 시선을 떼면 금방이라도 디존슨의 몸에 구멍이 생길 것 같다.
‘어디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로 향하는 볼트를 역추적하면 되는 거니까.
피이잉!
돌조각을 볼트의 궤적이 시작된 곳으로 쏘아 냈다. 굳이 결과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한결 낫군.’
이제 대부분 눈먼 볼트였으니까.
“사람들을 구하랏!”
그리고 마침내 기사단과 기병대가 공터에 도착했다. 일반인들을 한편으로 몰아내고 병사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전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수뇌부들이 이미 죽거나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서, 기사들과 기병대에 대항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몇몇 강성한 사람들만이 의미 없이 대항하다 죽었을 뿐.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공터에 멘토라스가 모습을 보였다.
궁금했다.
또 어떤 멋진 시나리오를 준비했는지 말이다.
* * *
여기는 에렌 성.
멘토라스는 제법 머리를 썼다.
할아버지가 항상 앉는 상석을 비워 둔 채 귀족들을 위로했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
“모두 아시다시피 저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섣불리 대항하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었고 말입니다.”
솔직히 감탄했다.
멘토라스가 준비한 시나리오에 말이다.
‘구원자란 말이지? 그것도 매우 겸손한.’
현장에 도착한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포박당해 있던 모든 사람들을 풀었다.
그리고 디존슨의 측근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또한 그중 핵심 귀족들은 모두 에렌성에 모이게 만들었다.
“그가 이런 일은 꾸밀 거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그러고는 왜 자신이 나서서 막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했고…….
“제 형님이지만……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왜 그런 과욕을 부렸을까요?”
디존슨을 확실하게 반역자로 못 박았으며…….
“하지만 이제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 제가 가만있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모인 이들을 안심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 오해라도 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오늘 이리 모이게 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을 알려 드리기 위해섭니다.”
멘토라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또 여러분들의 가신과 기사 들의 감금은 해제되었고, 각자의 근신 명령 또한 모두 해제하겠습니다. 아버님이 계셨던 그때에 에렌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반신반의했던 귀족들은 그들의 기사들과 사병들도 돌려주겠다는 말에 조금씩 의심을 거두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제 말을 여러분께서 인정해 주시겠다면 말입니다.”
방금 멘토라스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아주 훌륭했다.
어찌 됐거나 디존슨은 할아버님에게 정식으로 부여받은 권력.
이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으로 이들을 설득하여 자신이 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뜻 아닌가?
‘디존슨보다는 낫지만 언행이 너무 가볍다. 저 탈을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디존슨에게 날 넘길 때, 그리고 이번 결투재판 때도 알려 주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손을 잡아서는 안 될 놈이다. 잡을 생각도 없긴 하지만 말이다.
“아버님이 돌아오고 계십니다. 그때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때까지만 인정해 주시면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귀족들을 안심시키는 멘토라스.
죽 쒀서 개 줬다는 말이 딱 맞다.
디존슨뿐만 아니라 내게도 말이다.
여기 모인 이들 중 반 이상은 나와 손을 잡았지만, 그들 중에서도 흔들리는 자들이 보인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내가 결투재판에서 이기긴 했지만, 실제로 자신들을 구원한 건 멘토라스였으니까.
‘제법 귀찮아지긴 하겠군.’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놈을 단숨에 죽인다거나 무력으로 장악하는 그런 하책을 쓸 생각은 없다.
‘린델 녀석이 뭐라 할지 궁금하군.’
그리 생각하는데, 페컴이 입을 열었다.
“이공자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대공자……가 더 급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귀족 하나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맞습니다. 오늘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그는 일군단의 수장입니다. 내일이라도 쳐들어올 수 있습니다.”
멘토라스는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유 있는 표정은 잃지 않았다.
“아직 모르고 계십니까? 일군단은 수도로 내려갔습니다. 기껏해야 몇 개 대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요. 물론 거기에 에렌 수비부대와 몇 개의 기사단, 게다가 그를 추종하는 가문들이 있어 위협적이긴 합니다만.”
말끝을 길게 늘이는 멘토라스.
그렇게 사람의 반응을 확인하며 다시 입을 여는 걸 보니, 확실히 난 놈이긴 난 놈이다.
“그 지휘관들, 귀족들은 오늘 대부분 죽거나 다쳤습니다. 멀쩡한 놈들도 모두 성 밖으로 도망쳤을 터. 성내에 남아 있는 역적들은 구심점이 없는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
“게다가 대부분 디존슨에게 속아 역모에 가담했을 터!”
멘토라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한다면 모두 용서해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 역모에서 그들의 이름을 빼 줄 생각입니다.”
정말 제법이다.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디존슨의 잔당 세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흔들릴 것이고 정말 멘토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곳이 생겨날 것이다.
“이공자!”
그때 페컴이 입을 열었다.
“훌륭한 조치이긴 하나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멘토라스는 해 보란 듯이 쳐다봤고, 페컴은 말을 계속했다.
“분명 이 상황을 수습한 것은 공자이시나, 이번 일은 조금의 가감도 없이 주군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공자께서 빼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
“애초에 우리들이 힘이 없어서 당한 것도 아닙니다. 일단 대공자가 주군께 정당한 권력을 위임받았기에 아무것도 못하고 순응했던 것뿐입니다.”
좌중은 조용해지고, 페컴은 힘 있게 말했다.
“그러니 혼란을 수습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그 외에는 법도에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그 순간 보았다.
멘토라스의 눈에 살기가 도는 것을 말이다.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겸손한 구원자가 그렇게 살기를 보이면 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