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239)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주군.”
갑주를 완벽하게 걸친 사내의 말에 멘토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건 차질 없겠지?”
“완벽합니다. 성문을 장악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성문 책임자인 레이브 남작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 식솔들을 전부 우리 군영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멘토라스는 반문을 하면서도 이미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명분이야말로 내가 완벽하지.’
‘디존슨이 기존 아버님의 세력과 중립 세력을 다 처리해 주고, 로라스까지 처리해 주면.’
자신은 디존슨의 반역을 명분 삼아 그를 친다.
이거야말로 완벽하지 않은가?
‘참으로 사랑스러운 조카님이 아닌가. 내게 이런 기회도 만들어 주고.’
문제는 준비 기간이 짧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디존슨이 부담스러운 귀족들을 정리하는 순간, 자신은 오로지 디존슨과 그 측근 귀족들만 제거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로라스가 원했던 결투재판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린 상태다.
디존슨의 측근들도 모인 상황이니, 그 전투 한 번만 이기면 자신이야말로 에렌의 유일한 계승자가 될 터.
대규모 병력은 필요 없는 단 한 번의 기습.
그 전투는 역사를 바꿀 것이다.
‘쓸 만하긴 한데.’
아쉬운 건 로라스다.
‘품을 수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하지만 그 능력이 너무 출중하다.
가진 실력에 인맥 그리고 지금의 와카디아는 예전 변방의 영지 따위가 아니지 않은가?
조금 클 기회만 주면 에듀가 어찌 나올지 모른다.
‘그걸 모두 감안하더라도 아쉽단 말이지. 녀석이 내 밑으로 들어만 오면…….’
순간 멘토라스는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오늘 디존슨이 그를 죽일 테니까.
‘차라리 잘됐다. 고민도, 찝찝함도 같이 처리해 줄 테니.’
멘토라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시작하지.”
* * *
딸랑딸랑.
무당이냐?
츠어질이 정말 무당처럼 아기 머리통만 한 큰 방울들을 흔들어 대고, 그사이 마법사가 봉을 바닥에 세운 후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불 속성의 마나였는데 놈이 외는 건 의외로 대기 마법이다.
‘무슨 마법이냐?’
보통 마법사들이 마법을 욀 때 쓰는 언어는 공통적이다. 그래서 대기 마법 계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의 종류까지 정확히 알아낼 수 없는 건, 저마다 단어를 조합하고 운율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이게 칼 든 자의 싸움이라 생각해 보라.
마치 ‘내가 오른쪽을 공격함과 동시에 좌보를 밟아 하단을 노릴 것이오!’라고 외치면, 또 다른 상대는 ‘난 대보라는 보법을 밟아 애초에 부딪치지 않고, 바로 옆구리를 노릴 것이오!’ 이런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단어의 조합과 운율을 달리하며, 마나의 흐름을 변화무쌍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여하간 충분히 마법을 완성하는 걸 기다려 줬다.
‘응?’
그리고 얼마 안 가 놈들이 뭘 하는지 알아차렸다.
‘듣기로는 정신 계열, 그리고 저주 계열이라 했는데.’
츠어질의 방울 소리가 커지며, 마법사의 주문의 기운을 묘하게 돋우고 있었다.
‘무공으로 치면 증增과 폭暴 그리고 흡(吸)인가?’
마법사의 앞으로 하나의 공기 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기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공기를 압축시키고 변형시키니 그 이질감은 분명 보였다.
‘재미있네.’
저것으로 끝은 아닐 것이다.
잔뜩 압축시킨 공기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마법사의 기운이 달라지고, 순식간에 그 벽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날아왔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마저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의 강렬한 열기. 보는 것만으로도 타 버릴 듯한 거대한 붉은 출렁거림.
그런 화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당도했다.
* * *
사람들은 그저 눈만 크게 뜰 뿐이었다.
비명도, 놀란 탄성을 지를 틈도 없었다.
그건 그렇게 순식간에 로라스를 덮쳤고.
퍼어어어어엉!
강렬한 폭음과 함께, 로라스가 있었던 자리에는 거대한 불기둥만 존재했다.
“으악!”
“살려 줘!”
“물! 불을 꺼 줘!”
폭발은 잔불을 만들어 사방으로 휘날리게 했고, 애꿎은 사람들만 혼비백산하게 했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어버버 표정으로 불기둥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도 허무하더니 이번에도 그랬다. 다른 게 있다면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불기둥이 훨씬 눈요기가 되었다는 것일까?
반면 관계자들의 표정은 달랐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
모두가 로라스에게 목숨을 맡겼는데 이리 결정되었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죽음이 결정되었다.
반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디존슨을 비롯한 그 측근들.
사실 이들을 처형하는 것도 큰 부담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모조리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 중 그런 표정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얼굴이 야차같이 일그러지며 몸을 부르르 떠는 이. 분노에 검을 손에 쥐고 성큼 앞으로 나서려는 이.
테라였다.
불안불안했었다. 하지만 정말 최악의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다 죽인다!’
원수들이 방심하고 있다. 마법사부터 죽이고, 츠어질을 죽일 것이고, 마지막으로 디존슨의 목을 벨 것이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살(殺).
그 감정 하나만 품고 나가려던 때 그의 목덜미에 힘이 느껴졌다.
“크흑!”
그 탓에 목에 압박을 느낀 테라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분노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려.”
자신의 분노한 표정과는 달리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는 자는 번천.
테라는 화가 났다.
“주군이…….”
그래서 로라스가 얼마나 너를 아꼈는데 뒤로 빠져 있냐고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아니 못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웃고 있었다.
번천의 옆에 있던 에르자일이 말이다.
“기다린 것치고는…….”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 형편없지 않나요, 테라 경?”
“에르자일 님…….”
“저 마법사를 압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손꼽히는 자이지요. 매지스터이면서도 용병이라 유명하기도 하고요.”
에르자일은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뭔가 대단한 걸 보여 줄지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막상 결과는 참으로 잡스럽군요.”
거대한 불기둥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잡스럽다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잡스러워요!”
에르자일은 마치 확인이라도 해 주듯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리며 말했다.
“차라리 순수한 불이었다면 모를까! 저 신관!”
그러고는 츠어질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신성력도 아니고 마나도 아닌 기운을 가졌군요. 흑마법인가? 여하간 양쪽 모두 위력을 위해 잡스러운 것들을 섞어 놓았으니 로라스가 엄청 화가 났겠네요.”
“네?”
“주문을 기다려 줬잖아요. 그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나요? 단숨에 끊을 수 있어요. 거리를 벌려 줬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요.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곳의 마법이라면 모를까.”
“주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그래서 화가 났을 거예요. 평상시의 로라스와는 달랐잖아요. 단 일 초에 저쪽 무인을 베었어요. 손에 일말의 정도 안 남기고.”
그러고 보니 그랬다.
로라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람을 잘 죽이지 않았다. 제압하기 위해 부상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늘 느긋한 성격이고, 웬만해선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확실히 뭔가 다르기는 했던 것이다.
에르자일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다는 건 남들에게 보여 주기로 한 거예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이에요. 여태 괜히 걱정했네요.”
“…….”
“여태 몰랐어요. 로라스가…….”
에르자일은 말을 잇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여태 왜 몰랐을까?’
포스마스터에 매지스터.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서른도 안 되어서 보여 줬던 로라스다. 그런데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하기는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지.’
로라스가 초월자의 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말이다.
‘언질이라도 해 줬다면.’
여태 걱정했던 것이 바보스러워 짜증이 나는 것 같았다.
누가 자신의 생각을 알았다면 말도 안 될 거라 했을 것이다. 그 베스타인 공작도 나이 오십에 이룬 경지가 초월자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스승인 헤르메스를 따라 자주 공작을 본 사람이다.
‘거인이셨지.’
매지스터는커녕 마법사라고 불리기도 뭐했던 시절에도 그렇게 느꼈고, 지금 그 거인의 기운을 로라스에게도 풍기고 있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홀로 존재하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저 불은…….”
하지만 테라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번천과는 달리 마나를 전혀 몰라,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토옹.
에르자일은 지팡이를 바닥에 살짝 치며 진 안의 마법을 테라에게 걸었다.
그러자 테라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분명 시뻘건 불기둥만 보였던 것이, 그 안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
그러다 테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사그라들고 있던 불기둥이 더 강력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조잡스럽긴.’
마나도, 포스도 아닌 기이한 기운.
하지만 생소하지는 않다.
언제였지?
이런 조잡스러운 기운을 이리 한가득 받아 봤을 때가?
가물가물하면서도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배교였던가? 아니면 혈마교였던가?’
중원에도 그런 놈들이 있었다.
내공도 아니고, 도력도 아닌 이상한 잡스러운 기운을 쓰는 것들이.
뭐, 자기 나름대로는 전통도 있고 발전시키는 체계라는 게 있다고 한 것 같지만.
‘똥물 한 그릇에 수만 그릇의 맹물을 넣어도 똥물은 똥물인 법.’
본질이란 건 그래서 중요하다. 바뀔 수가 없는 거니까.
지금도 그렇다.
‘이도 저도 않는 걸 하나라고 우기니.’
차라리 따로 나섰다면, 그래도 그 나름의 특질이라도 봐 주겠지만 말이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똥통도 이 정도는 아닐 터.’
그대로 손을 들었고.
‘그래도 해 보겠다고 이리 애를 쓰니.’
휘저었다.
‘기운에 걸맞은 곳으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나?’
꼴에 이것도 불의 속성이라고 열기를 발한다.
‘어찌 돌려보내야 잘 돌려보내 줄까?’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정말 불이란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감싸고 있던 불을 내력으로 태우기 시작했다.
불을 태운다는 말이 좀 생소하긴 했지만 실제로 난 그 불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시뻘건, 그리고 누런빛의 놈들의 불을 변화시켰다.
커다란 것을 작게, 시뻘건 것을 연하게 그리고 연하디연하게 만들어 하얗게.
보기에는 그렇게 화려했는데 역시 본질은 어디 가지 않는다. 밀도가 허무하게 낮아 하늘까지 치솟아 올랐던 불의 기운은 고작 내 손을 덮는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돌아가라. 네 주인들에게.’
그들을 향해 손사래를 치듯 손목을 휙 저었다.
쏴아아아아아!
빠르지 않은 속도로 백화가 주변을 태우며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러다 아쉬워졌다.
불을 바꿔 돌려보냈다지만.
‘누가 있어 그 사실을 알려나?’
확실히 보여 주기로 하지 않았는가.
최대한 화려하고 확실하게 보내기로 마음먹었지 않은가!
그래서였다.
허공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은 이유는. 허공을 바닥 삼아 걷기 시작한 이유는 말이다.
‘살기를 드러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그러기 위해서다.